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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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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81
추천수 :
2,527
글자수 :
469,180

작성
22.11.1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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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글자
19쪽

호손시(市)의 사정(2)

DUMMY

매달린 간판들이 바람을 받아서 흔들렸다.


분수대가 있는 광장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십여 곳의 가게들이 모여 있는 상점가가 나왔다.


그 중 내가 찾은 곳은 포목점과 나란히 붙어있는 의류점.

슬슬 이 세계의 옷을 맞춰야 할 때임을 느꼈던 탓이었다.


가문의 예복이라 둘러댄 휴브리스사의 패딩이나, 그동안 입고 있던 니트 셔츠는 품질은 더할 나위 없었지만 이곳에선 지나치게 하이테크였다.


덕분에 귀족인 척 연기하는 데는 잘 써먹었지만 평소에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해보였다.


막말로 욕심을 낸 사람한테 강도라도 당하면 어쩔 텐가?


지금 내가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도 프란츠가 내준 망토를 꼼꼼하게 싸매고 있는 것 역시 그래서였다.


다만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활동량이 많지는 않았음에도 벌써 나흘째 단벌신사 신세이다 보니 슬슬 불쾌한 냄새가 올라왔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릴리나 프란츠 영주도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샤워를 했던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는 어제 받은 빗물로 빨래랑 목욕을 하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새 옷이라도 입어야겠다.


“릴리 씨는 잠시 다른 가게라도 구경하고 있을래요? ”

“네, 그럴게요. 천천히 일 보시고 나오셔요. ”


현대의 상점가 같은 상호는 없었지만, 나무판에 그려져 있는 직관적인 그림 덕에 헤매지는 않았다.


“계십니까? ”

“어서 옵쇼. 무슨 일이시오? ”

“옷을 한 벌 맞추려고 하는데요. 겉옷이랑 속옷 세트로. ”


제법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주인장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혹시 외국 분이시오? ”

“그렇습니다. ”

“이거 말이 너무 유창하셔서 몰라볼 뻔했군. 음, 죄송스럽지만 외국인과는 소개장 없이 장사하지 않소. 신분증명이나 통행증이 없다면 가까운 여관에서 방이라도 잡고 오시오. ”

“그렇습니까. ”


그 말을 듣자 문득 의문이 일었다.


의류점 주인의 말마따나 자신은 외국인, 아니, 외계인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들이랑 아무 문제없이 소통할 수 있을까?

릴리의 말처럼 ‘제국어 = 한국어’라도 되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암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여기는 어딜 봐도 한국보다는 서양의 중세사회에 훨씬 가깝다.


‘그러고 보면 문자는? 설마 한글일 리는 없고... ’


나는 프란츠에게 받은 신분증명서를 꺼내보았다.

그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모종의 라틴 계열 문자로 쓰인 문서인가 했는데 순식간에 글자들이 흩어지더니 재배열되었던 것이다.


{본 증서를 소지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청년]인 [이미르 휴브리스]는, 호손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영주인 나 프란츠 폰 호손의 귀한 손님으로서 신분이 보장된 인물로, 감히 그를 박대하거나 기만하거나 해치려고 하는 자는 호손의 정당한 분노에 맞닥뜨리게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


단호한 어투로 쓰인 이국의, 아니, 이세계의 신분증명은 어느새 더없이 익숙한 문자로 치환되어 있었다.


‘실시간 번역 같은 건가? ’


고민해보았지만 당장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일단은 마법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갈 수밖에.


“오. 신분증명서가 있으셨구먼? 보여주시겠소? ”

“여기요. ”

“아하! 영주님의 손님이셨구려. 이거 큰 실례를 할 뻔했소. ”

“괜찮습니다. ”


겸연쩍게 웃은 그가 증명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래, 어떤 옷이 필요하시오? 영주님과의 만찬에 입을 예복이라도 찾고 계신 게요? ”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평상복이면 됩니다. 아무 때고 대충 입을 수 있는, 무난하고 편한 옷으로요. ”

“재질은 무엇으로? ”

“전문가께서 알아서 부탁드리겠습니다. ”


원래부터 나는 패션 센스라고는 없었다.


한 번은 나름 작정하고 코디를 해 봤는데, 장을 봐온 여동생이 봉투를 툭 떨어뜨리더니 방바닥에서 지네라도 나온 것 마냥 비명을 지르더라.


그때부턴 옷을 살 때는 마네킹에 입혀둔 걸 통째로 샀다. 아니면 속편하게 점원에게 물어보거나.


“음. 망토는 입고 계시니 따로 필요 없으시겠지? ”

“예산에 맞지 않으면 빼셔도 될 겁니다. ”

“얼마에 맞춰 드리면 되겠소? ”

“은화 한 닢이요. ”

“1온스라. 그 정도면 충분할 거요. 어디 보자, 조만간 날씨가 추워질 것을 고려하면 짐승 털로 만든 쉥즈(Chainse)와 꼬뜨(Cotte)가 적당하겠군. 평상복이니 문장이나 자수를 넣을 필요는 없겠지요? ”

“없어도 됩니다. ”

“언제까지 만들어드리면 되겠소? ”

“오늘 해가 저물기 전까지 가능하시겠습니까? ”

“흐음. 손님만 괜찮다면야 예전에 만들어 놨던 게 있으니 바로 가져가시면 될 거요. 새로 만들려면 하루는 기다리셔야 할 테고. 어떻게 하시겠소? ”

“빠른 쪽으로 하겠습니다. ”

“알겠소이다. 아까 실례했던 것도 있고 재고품을 가져가주시는 격이니 싸게 해드리겠소. ”

“고맙습니다. ”

“속옷이랑 겉옷을 합쳐서 동화 열일곱 개. 은화를 주시면 동화 세 닢을 거슬러드리지. 아직 안 드셨으면 그걸로 점심이라도 해결하면 될 거요. 개인적으로는 부둣가에 있는 ‘피에르의 온도’를 추천하지. ”

“오? ”


피에르라는 이름을 보니 엠마가 말한 곳과 같은 집인가.

입을 모아서 추천하는 것을 보니 맛집은 맛집인가 보다.


“방금 점심을 먹긴 했지만 참고하겠습니다. ”

“그런가? 아쉽구먼.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꼭 들러보시오. 거기 맥주랑 대구가 예술이거든. 특히 그곳의 튀김은...! 비싸긴 해도 은화가 쌓이면 계절에 꼭 한 번은 먹으러 간다오. ”


뭐? 튀김이라고! 그건 못 참지.


본능적으로 뛰쳐나가려던 발을 겨우 멈춰 세웠다.

몇 시간만 있으면 만찬이잖아? 참자, 참아.


“아니면 남은 돈으로 장갑이나 신발이라도 맞추시겠소? ”


그 말을 듣고 나니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혹시 여성용 장갑도 있습니까? ”

“장갑이 장갑이지, 뭘. 크기만 작으면 되겠지. 귀부인이 쓰는 실크제를 말하는 거라면 그건 많이 비싸다오. ”

“가죽이나 털로 된 것 중에 괜찮은 건 얼마나 합니까? ”

“불의 마법사들이 쓰는 샐러맨더의 가죽 같은 거? 그야 웬만한 실크보다도 훨씬 비싸지! ”

“아니, 그딴 거 말고요. ”

“크크, 농담이오. 거스름돈에 동화 한 개만 얹어주시면 좋은 걸로 골라드리겠소. 합쳐서 은화 한 닢에 동화 한 닢이오. ”


주인장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프란츠가 준 돈이 든 가죽주머니와 전에 촌장에게 받은 은화를 동시에 꺼냈다.


고민이 되었다.


‘음. 뭘 내지? ’


가죽주머니에는 은화 두 닢과 동화 다섯 닢이 들어있었다.

치러야 할 값은 은화 한 닢과 동화 한 닢.


어차피 순수한 내 돈은 은화 한 닢뿐이니 이대로 계산하려면 주머니에 손을 넣기는 해야 한다.

그럴 거면 그냥 여기서 다 꺼내 쓰는 편이 쉽겠지.

게다가,


[연관 검색어 : 은화 (상태가 좋지 않다.) ]

[연관 검색어 : 동화 (상태가 나쁜 편이다.) ]


가죽주머니 속 주화들은 그다지 품질이 좋지 못한데 비해 촌장에게 받은 은화는 반짝이는 새것이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빳빳한 새 돈은 왠지 쓰기 싫은 느낌. 지갑에 넣어두고 오래오래 보관해두고 싶은 마음.


그러니 여기서는 프란츠가 준 돈을 꺼내 쓰고 멀쩡한 은화는 아껴두도록 하자.


...라고 하기에는 또 기분이 영 찝찝했던 것이다.


물론 쓰라고 준 거지만 나는 프란츠의 돈을 쓰는 것이, 나와 릴리를 옭아맬 건수를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나친 상상은 아닐 것이다. 귀족쯤 되는 사람이 갈 거면 그때 준 돈 뱉고 가라고 나오지는 않겠지만 마음의 빚도 분명히 빚인 거니까.


특히 릴리 같은 좋은 말로 하면 선인, 나쁜 말로 호구에게는 더더욱 그럴 거다.


더군다나 내 옷은 몰라도 장갑은 선물인데 남의 돈을 보태서 사는 것은 주는 나로서도 김이 새는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프란츠 자작의 돈을 쓰는 일은 지양하는 편이 낫지 싶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죄송한데 동화 한 닢만 깎아주십시오. ”

“아니, 아실만한 분께서 왜 이러시오? 말했지만 이미 이것도 싸게 주는 거요. 남는 것도 별로 없단 말이오. ”


장사꾼이 가장 흔히 하는 거짓말이 돌아왔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

“안 되지요. 보아하니 돈이 없으신 것도 아니구먼. ”

“함부로 이 돈을 쓰기에는 그런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

“허! 손님 사정만 사정이오? 나도 그 돈은 꼭 받아야하는 사정이 있소이다. 안 그럼 마누라가 내 등짝을 때릴 거거든! ”

“끄응. ”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서 은화와 동화 한 닢씩을 꺼냈다.

그런데 막 돈을 받으려던 주인장이, 내 새끼손가락과 약지 사이에 끼어있던 은화를 슬쩍 보더니 손을 멈추었다.


“에헤이! ”

“왜 그러십니까? ”

“이분이 이제 보니 나를 놀린 거였구먼? 아까 샐러맨더 가죽 얘길 했다고. 젊은 분이 그렇게 속이 좁아서야 쓰나? ”


어안이 벙벙해져있는데 그가 덧붙였다.


“새 은화를 갖고 오셨으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

“새 은화라고요? ”


분명히 들었는데도 뭔 소린지 이해가 안 되었다.

새 돈을 내면 뭐 깎아줄 수 있다는 소린가?


그 말은 곧 새 돈과 헌 돈의 가치가 다르다는 얘기와 다름이 없었다. 세뱃돈을 처음 받은 어린애도 아니고 노련한 장사꾼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쪽은 나라는 소리다.


‘아! 그렇구나. ’


새 돈이든 헌 돈이든 액면가는 같다.

따라서 그것이 가진 구매력도 같다.

그것이 내 세계에서의 상식이었다.


내 세상의 화폐였다면 당연히 그랬겠지.

하지만 이곳은 현대의 지구가 아니었다.


이쪽의 중세에도 그랬듯이 이 세상의 화폐는 금화, 은화, 동화 등의 ‘귀금속 덩어리’.

거의 완벽하게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새 돈과 여기저기가 깎이고 떨어져나간 헌 돈은, 그것이 실제로 함유하고 있는 귀금속의 그램 수부터가 다르다.


“그놈으로 계산하신다면 내 동화는 빼드리겠소. 장갑도 특별히 좋은 놈으로 골라드리지. ”


태세를 바꾼 의류점 주인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

“흐흐! ”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그가 장갑을 들고 돌아왔다.


“살펴보시오. 비록 손가락을 나누지는 않은 미튼(벙어리장갑)이지만 겉감은 양가죽을 안감은 면을 쓴 일품이라오. 튼튼한 녀석이니 이번 겨울을 나는 데는 문제없을 거요. ”

“좋아 보이네요. ”

“후후, 좋은 거래였소. 옷은 어떻게, 바로 입어보시겠소?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에게 물었다.


“덤으로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 * *



“이건 리나 은화요. 이름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남방의 대영주이신 카탈리나 공작 전하께서 발행하시는 은화지. ”


의류점 주인이 앞면에는 초승달이 뒷면에는 새가 그려진, 여기저기 흠집 나고 각인도 반쯤 뭉개진 꼬장꼬장한 은화를 가리켰다.


“그리고 요것도 리나 은화... 이긴 하지만 토런스 은화라고도 불린다오. 나처럼 장사하는 사람에겐 그쪽이 더 익숙하지. ”


그가 이번에는 내가 낸 깨끗한 은화를 들어보였다.


“서로 다른 은화라는 겁니까? 새겨진 문양이 같은데도요? ”


오라클의 검색결과에 따르면, 한 나라의 중앙은행이 화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하고 관리하는 현대와는 달리, 권력이 분산되었던 중세시대에는 발행이익(시뇨리지)을 노린 귀족들이 각자 화폐를 발행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문제는 내가 가진 은화들은 품질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동일한 각인이 새겨져있는 같은 화폐라는 점이었다.


“같지만 또 다르다오. ”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 주인장이 덧붙였다.


“보다시피 질 차이가 많이 나거든. 정확히 말하면 품질이 좋은 새 리나 은화를 가리켜 토런스 은화라고 부르오. 카탈리나 공작 전하께는 죄송한 얘기긴 하지. ”

“모르긴 몰라도 토런스 백작과 관계가 있겠군요. ”

“그렇소.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의 이야기지. 천지가 뒤흔들리는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 이 일대가 온통 쑥대밭이 돼 버린 적이 있소.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고 누가 말했던가? 토런스 백작... 아, 지금 백작님 말고 선대 백작님 말이오. 그분이 혼란을 틈타 군사를 일으켜 동쪽의 린우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을 복속시키셨지. 헤르만 폰 호손 선대 자작님 역시 그때의 공으로 이곳의 영주가 되셨다고 들었소. 덕분에 백작께서는 엄청난 양의 은을 긁어모으셨지. 북쪽 ‘천사의 산맥’에서 내려오는 은광석에 통행세를 매길 수 있게 되었거든! ”


그가 빳빳하게 선 콧수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카탈리나 공작께서는 토런스 백작께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오. 매년 일정량의 은을 공국에 넘기는 대신 리나 은화를 찍어낼 수 있는 권한을 나눠주신 게지. ”

“아하! 그래서 새로 찍은 리나 은화를 토런스 은화라고 부르기도 하는 거군요. ”

“그렇소이다. 궁금증이 풀리셨소? ”

“일단은요. 감사합니다. ”

“혹시 나중에라도 새 신발이 필요하면 찾아주시오! ”


의류점 주인과의 대화를 마치고 가게에서 나오자, 맞은편 잡화점 앞에 서있던 릴리가 돌아보더니 손뼉을 쳤다.


“어머나! ”

“괜찮습니까? ”

“와! 잘 어울리세요. 이제는 척 봐도 학자님 같으시네요! ”

“그렇습니까. ”


패션과 관련해서 칭찬을 받은 건 처음이라 괜히 뿌듯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드레스풍의 베이지색 속옷에 무릎을 가리는 짙은 갈색의 겉옷, 거기에 프란츠로부터 받은 검은색 로브까지 걸치니 내가 봐도 중세 시대의 학자님이 따로 없었다.


‘생각보다 만족스럽네. ’


로브 안에 받쳐 들고 있는 원래 옷보다야 거칠고, 특히 신축성이라고는 없는 소재지만 이 시대의 옷도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단, 신발을 제외하면.


이왕 온 거 간이라도 한 번 볼까 하고 신어봤는데 시착 즉시 오싹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통풍이나 배수는 어디론가 갖다 버린 통가죽 재질에, 두꺼운 밑창에도 땅의 굴곡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신비함.

대한민국 전투화가 선녀처럼 보이는 날이 올 줄이야.


덕분에 신발만은 원래 신던 운동화 차림 그대로였다.

어차피 돈도 모자랐고, 짙은 색 운동화라 크게 눈에 띄지 않는 데다 로브가 대부분을 가려주니 이만하면 되겠지 싶었다.


“그나저나 릴리 씨는 뭐하고 계셨습니까? ”

“아, 그게... ”


릴리의 시선이 뒤쪽의 잡화점으로 향했다.

그것을 쫓아가던 내 눈이, 언제부턴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주인장과 마주쳤다.


외국인을 본 게 신기해서 저러나?

인사라도 할까 싶었는데.


“저 아가씨 남편이슈? ”


다짜고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왔다.

만일 내가 이 세계의 성년이 15세인 것을 몰랐다면 대략 정신이 멍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현지 옷도 입었겠다 이 정도쯤은 가뿐하지.


“아닙니다. ”

“아직 결혼은 안했나 보지? 아무튼 빨랑 돈 갖고 오슈. ”

“괘, 괜찮아요! 그냥 구경만 한 거예요. ”

“구경? 그 정도로 구경했으면 사는 것이 예의요! ”

“뭔데 그럽니까. ”


내가 다가가자 잡화점 주인이 보드게임에서 쓰는 주사위처럼 생긴 까만 팔면체 두 개를 눈앞에 내어놓았다.


“돌을 깎은 겁니까? 아니면 쇳덩이? ”

“요게요게 아주 신통한 물건이요. 토런스 백작령에서는 없어서 못 구한다는 귀중한 보물이지! ”

“특별할 건 없는 것 같은데. ”

“잘 보쇼... 이렇게 두 녀석을 나란히 놓고 점점 가까이 가져다 대면! ”


딱! 소리와 함께 두 팔면체가 찰싹 붙었다.


“어떠쇼? 아주 그냥 좋아 죽는다는 듯이 찰지게 달라붙지 않소? 남녀가 사랑의 부적으로 삼기에 이만한 게 없지! 내가 그쪽에 친척이 하나 있어 아는데, 토런스 백작령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몇 달 전부터 이미 난리가 난 모양이오! ”

“아. ”


비로소 이해가 갔다.

왜 릴리가 이 앞에서 한참을 기웃거리고 있었는지.


“자석이군요. ”

“잉? 자석? ”

“제 고향에서는 저 돌을 그렇게 부릅니다. ”


자연 상태로 나온 것을 매끈히 다듬었을 뿐인 것 같지만, 방금 시연한 걸 보니 품질이 꽤 괜찮아보였다.

내 옷에 달려있는 똑딱이보다 출력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뒤에 쭈뼛거리며 서있던 릴리를 불렀다.


“릴리 씨, 전의 나침반 목걸이 좀 빌릴 수 있을까요? ”

“네? 아, 그게요... ”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와버렸어요. ”

“아... ”


하긴 이렇게 갑자기 자작의 식객이 될 줄은 둘 다 몰랐지.


“그럼 은화도? ”

“네... ”


그래서 계속 구경만 하고 있었구나.


“아무튼 다 보셨으면 갑시다. 굳이 살 필요는 없겠죠? ”


나중에 목걸이를 가져와서 잠깐 빌리면 충분할 거다.


“네, 네! 그냥 가요. ”

“아, 아니? 뭐라고? 이걸 그냥 간다고? ”


떠나려는 우리를 잡화점 주인이 붙잡았다.


“이보쇼, 외국인 양반! 혹시 모르나 싶어 알려주는데, 여자가 시장에서 뭔가를 골똘하게 보고 있을 때는 과감하게 딱 사줘야 점수를 따는 거요! ”


그치만 선물이라면 이미 샀는데.

게다가 원래는 릴리가 나보다 여섯 배는 부자고.


“그냥 눈 딱 감고 사쇼! 지금 사면 특별히 싸게 해드릴 테니까. 좋은 인연 잘 이어가시기를 바라는 의미로다가. ”

“우린 그런 사이 아닙니다. ”

“아니기는! 이 시각에 젊은 남녀가 단 둘이 시장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빤하지. ”


확신으로 가득 찬 그의 표정에 나는 해명하길 포기했다.

근데 내가 그 정도로 어려 보이나? 서양인 눈에 동양인이 젊어 보일 수는 있겠다만.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물어나 보기로 했다.


“얼만데요. ”

“개당 은화 한 닢씩, 딱 두 닢만 주시오! ”

“바가지 같은데. 그것도 엄청. ”

“뭔 소리요? 보석 값이 이 정도면 싼 거지. ”

“보석은 무슨. ”


나는 코웃음을 치고 돌아섰다.


“갑시다, 릴리 씨. ”

“아아, 알았슈! 합쳐서 단돈 1온스! 요 정도는 어떠쇼? ”

“됐습니다. ”

“야이, 그러면 동화 한 개라도 내 놓고 가쇼! 그쪽한테 보여주느라고 때 탄 건 어떻게 보상할 거요? ”


나는 동전 대신 양피지 한 장을 내밀었다.

잡화상의 입이 다른 극끼리 닿은 자석마냥 꾹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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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신명재판(1) +4 22.11.18 1,037 36 15쪽
24 곰과 여우와 돼지(4) +4 22.11.17 1,025 35 14쪽
23 곰과 여우와 돼지(3) +5 22.11.17 1,040 37 18쪽
22 곰과 여우와 돼지(2) +5 22.11.16 1,060 38 15쪽
21 곰과 여우와 돼지(1) +4 22.11.15 1,085 42 12쪽
20 피에르의 온도(6) +4 22.11.14 1,084 37 13쪽
19 피에르의 온도(5) +2 22.11.14 1,073 38 16쪽
18 피에르의 온도(4) +3 22.11.13 1,090 37 13쪽
17 피에르의 온도(3) +3 22.11.13 1,157 42 16쪽
16 피에르의 온도(2) +3 22.11.12 1,274 39 14쪽
15 피에르의 온도(1) +1 22.11.11 1,341 34 18쪽
» 호손시(市)의 사정(2) +1 22.11.10 1,414 39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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