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74,051
추천수 :
2,527
글자수 :
469,180

작성
22.11.20 12:45
조회
1,006
추천
31
글자
18쪽

신명재판(4)

DUMMY

북쪽 ‘천사의 산맥’으로부터 내려오는 은광석이 남방으로 가기 전에 잠시 동안 머무는 곳.


은의 도시 토런스를 다스리는 영주이자 백작 아르노 드 토런스는 요즘 들어 심기가 불편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사랑돌로 만든 사철 추출기 덕에 토런스의 철 생산량은 종전의 두 배에 이르고 있었고, 지긋지긋했던 부자병도 호손시 근교에서 발견된 생명수를 몰래 공수해서 마신 덕분에 크게 호전되었다.


게다가 동쪽에서 창궐한 괴수들로 몇 년 전부터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남방의 카탈리나 공국은, 토런스가 보내는 은과 기사들에게 점점 의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노는 이 여세를 몰아 어렸을 적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어린 영주를 끌어내리고 호손을 다시 자기 발 아래로 되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를 위한 계획들이 하나 둘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시점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궁지에 몰린 프란츠 자작이 앤더슨 상단이 내민 계약서에 마침내 서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르노 백작은 쾌재를 부르며 카탈리나 공국으로 사신을 보냈다. 다소 무리하면서까지 공국의 공증인들을 붙여준 보람이 있었다며.


감히 주군으로부터 하사받은 신성한 영주의 권리들을 금화에 눈이 멀어 장사치들에게 팔아치웠으니, 제아무리 프란츠를 아픈 손가락으로 생각하는 카탈리나 공작이라도 더는 그를 비호할 수 없으리라.


녀석의 짓거리는 적어도 서방의 귀족들 입장에서는, 자작 자신뿐만 아니라 온 귀족의 명예를 땅바닥에 내던져버린 폭거와도 다름이 없었다.


어린 자작은 급한 나머지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이고, 카탈리나 공작은 스스로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그로부터 영지를 회수하고 다른 봉신을 임명해야 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새로운 봉신은 지금 자기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프라도 자작이 됐을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다음 날 공국에서 돌아온 대답은 믿을 수 없게도 ‘일단 내년 여름까지는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결정의 배경을 백작은 오늘 알게 되었다.

그의 발 앞에 넙죽 엎드린 뚱뚱한 사내, 프라도 자작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호손 쪽의 사신이 먼저 공국에 도착했던 모양입니다. ”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빠른 말을 골라서 보냈지 않나? 그런데도 놈들이 먼저 갔다고? ”

“아무래도 이쪽의 의도를 사전에 간파한 것 같습니다. 편지의 필사본을 구해 읽어 보니... ”


프라도 자작이 순간 말을 머뭇거렸다.

아르노 백작이 역정을 내며 그를 다그쳤다.


“뭐라고 했는데? 냉큼 말하지 못해? ”

“예, 예에! 그러니까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


그가 글자로 빼곡히 찬 양피지 조각을 들고 읽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카탈리나 공작 전하, 곧 불편한 소식을 듣게 되실 줄로 압니다. 각하께서 내려주신 봉토의 권리를 소신이 장사치들한테 팔아넘겼다는 기막힌 소리를 말입니다. 하지만 그 계약은, 감히 귀족의 권리를 금화 몇 푼으로 사려고 하는 상인들을 엄히 벌하여 그들이 다시는 그런 꿈을 꾸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소신의 비책입니다. 내년 여름이 지나기 전에 계약은 무효가 될 것이며, 놈들은 뼈저리게 자신의 주제를 알게 될 것임을, 공작 전하의 충성스런 가신으로서 여신님의 이름에 걸고 약속드립니다. ]


자신의 계획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기라도 한 것 같은 그 내용에 아르노 백작은 부아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꼬맹이가... ”

“그, 그리고 각하. ”

“또 뭐? ”

“앤더슨 상단에서 탄원서가 올라왔습니다. 이번 일의 실패로 본 손해가 너무 막심하니 뭐라도 보전을 좀 해달라고... ”

“하! 나보고 말이냐? 그만큼 판을 깔아줬는데 사랑돌 광산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놈들 잘못이지! 덕분에 사철 추출기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돼버렸으니 오히려 내가 손해를 보상하라 해야 할 판이다! ”

“오,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

“어차피 이 일만 끝나면 버리려고 했다! 심지어 일을 실패까지 했으니 구해줄 이유 따윈 더더욱 없지. 안 그런가? ”


프란츠를 쫓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앤더슨 상단의 계획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사실 아르노 백작도 서방의 꽉 막힌 귀족들 중 하나였다.


영주의 권리를 돈으로 사서 배를 불리려는 상인의 생각이 괘씸하게 느껴진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지금 대놓고 그 녀석들을 내쳐 버리시면, 토런스의 편에 선 다른 상단들도 의심을 품고 불안해할 겁니다. ”

“에라이!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놈들, 생명수가 나는 마을의 촌장한테 물의 비밀을 알아냈다 했지? 당분간 전매권을 줄 테니 그걸로 해결하라고 해! ”

“그게 며칠 전에 저도 그렇게 말해봤습니다만... ”


프라도 자작이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듣기로는 요즘 생명수가 거의 팔리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

“뭐라고? 어째서냐? ”

“호손 쪽에서 아예 생명수의 기운을 농축해서 만든 치료제를 개발해버렸다고... ”


그 말에 아르노 백작의 눈이 커졌다.


“뭣이? 그걸 어디서 구해... 아, 아니지. 어쨌든 이쪽과는 상관없는 얘기 아니냐? 서로 봉쇄령을 내렸고 상로도 막혀서 토런스의 성문을 넘어올 수 없을 텐데? 밀수인가? ”

“밀수는 아닐 겁니다. 프란츠 자작이 약을 판매하는 대신 성과 가도에서 공짜로 나눠주고 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자선활동은 여신님의 뜻에 따라 봉쇄령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랜 불문율이지요. ”


프라도의 말에 아르노 백작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덕분에 열심히 깎아둔 프란츠의 평판도 나날이 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쪽에서 퍼뜨린 건지는 몰라도 앤더슨 상단에서 만드는 생명수가... ”

“생명수가 뭐? ”

“호손 영주가 무료로 뿌리는 약을 물에 타서 만들어 파는 거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덕분에 상단은 물론 놈들에게 팔 자리를 내준 우리까지 욕을 먹고 있고요. 어찌어찌 팔더라도 그 값이 갤런 당 금화는 고사하고 은화 한 닢이 못 돼서... ”

“빌어 처먹을 애새끼! ”


욕설을 내뱉은 아르노 백작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래도 프란츠를 너무 어리게만 본 것 같습니다. 하긴 그날 이후로도 어느새 8년이 흘렀으니까요. ”

“닥쳐라, 프라도! 그 놈은 그냥 애새끼일 뿐이야! 제 아비 후광으로 과분한 평가를 받고 있는 애새끼일 뿐이라고! ”

“... ”


아르노는 납작 엎드린 시종장을 쭉 찢어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마음에 안 든다. 그 자식이 뭐라고 다들 치켜세워주기 바쁘단 말인가?


그래, 그 날에도 그랬다.

아버지의 전승기념 파티에서 천하디 천한 무두장이의 손바닥에 귀싸대기를 맞았던 날.


허벅지를 인두로 지져도 시원찮을 연놈들의 앞에 서서 그 밤톨만한 꼬맹이는 혀 짧은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뎡말 사과드립니다, 아르노 공. 제 시죵이 고귀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큰 실례를 해씁니다. 허락해쥬신다면 제가 집에 돌아가서 아쥬 큰 벌을 내릴 테니, 아부지와 제 얼굴을 봐서라도 아량을 베풀어쥬십시오. ]


똑똑한 자신은 그게 거짓말임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곱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분칠까지 한 계집애는 몰라도, 거친 숨을 씩씩 내쉬고 있는 여자의 오라비한테서는 무두장이 특유의 역겨운 가죽냄새가 진동을 했으니까.


감히 제 아비의 주군인 내 아버지께 거짓말을 하다니 볼기짝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대죄였다.

그런데 당신은 오히려 미소까지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해 주겠느냐?’고 내게 물으셨던 것이다.


그날 밤,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은 것은 믿을 수 없게도 프란츠가 아닌 자신이었다.


[오늘 같이 중요한 날에! 평민 계집애 따위한테 손을 데려다가 손님들 앞에서 망신살을 뻗치다니! 네 녀석이 그러고도 토런스의 후계자냐? ]


종아리를 후려갈기는 고통 속에서도 아르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일 년에 하루 찾아올까 말까한 평민과 귀족이 같은 연회장에 있는 것이 허락되는 날에, 춤 하나 출 줄 모르면서 얼굴에 밀가루 칠까지 하고 왔으면 당연히 그 천한 몸뚱이를 내밀러 온 게 아니냐는 말이다.


향유를 바를 형편은 못되었는지 몸에서 가죽 냄새가 나는 촌년이었지만 얼굴과 피부는 반반하니 마음에 들었었다. 하룻밤 가지고 놀다가 마음에 들면 정부(Mistress)로 삼고 아니면 은화 몇 닢 던져주고 끝내면 되는 일이었다.


당시 스물이었던 아르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날의 파티가 린우드가 토런스에 복속한 것을 기념하는 전승기념 행사임과 동시에, 지배자가 바뀌어 불안해하는 린우드의 성민들에게 토런스 백작가의 위엄을 보이고 그들의 위민정신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했음을 그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개최한 행사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린우드의 성민을 잡아 가두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런 일인지.


그렇다고 귀족이 평민에게 뺨을 맞은 상황에 그들을 그냥 보내주는 것 또한 얼마나 위신이 상하는 일인지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어린 프란츠는 말 그대로 솟아날 구멍을 마련해준 셈이었다.


물론 이 역시 아르노는 알지 못했다. 8년 전의 과거에도, 지금도.

그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아버지께 항의했을 뿐이었다.


[아버님께선 왜 애꿎은 저를 벌하십니까? 저를 모욕한 그 천한 무두장이 놈들과, 그들을 자신의 시종으로 속여 빼낸 프란츠 꼬맹이 녀석이야말로 벌을 받아야지요! ]

[어리석은 것 같으니라고! 그 조막만한 시종장의 아들내미가 때마침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금화를 스무 닢도 넘게 들인 파티가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 될 뻔했다! 나이는 그 아이보다 두 배도 더 많은 놈이 어찌 이리도 우매할꼬? ]

[... ]

[후우, 네 녀석이 그 아이가 가진 총명함의 반만 따라갔어도 내 이리도 앞날이 걱정되지는 않으련만. ]


그때 아르노는 맹세했었다.


그 빌어먹을 애새끼를 언젠가 반드시 자기 눈앞에 무릎 꿇려 증명하겠다고. 토런스의 후계자에 어울리는 현명한 자는 프란츠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그 날이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어느새 다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어림없는 얘기다. 그렇고말고.


“‘앤’한테서 소식은 아직이냐? ”

“제가 올 때까진 아직...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


오래 엎드려 있던 탓인지 온몸에서 육수가 줄줄 흐르는 프라도 자작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뚱거리며 되돌아왔다.


“도, 도착했답니다! 바로 올려 보내겠습니다! ”

“좋아! ”


아르노 백작이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여신은 아직 내 편이로군! ’


잠시 후, 다리에 쪽지가 매달린 새하얀 전서구 한 마리가 백작 앞으로 올라왔다.



* * *



[예상대로 호손의 대전사로는 잭슨 터너가 나올 모양입니다. 예. 8년 전에 감히 백작님께 손찌검을 했던 그 무두장이지요. 새로 개발한 갑옷을 입혀서 승산을 높일 심산인 듯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입수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


[해안가에 제분소가 하나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마을이라도 만들려고 하는 걸까요? 조만간 조사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


- - -


[프란츠 자작이 해안가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 생각인 모양입니다. 사랑돌을 판매할 항로를 개척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주변을 단속하셔야 할 듯합니다. ]


[앤더슨 상단에서 사철에 대한 권리들을 계속 주장하고 있는 덕분에 호손의 철 생산량은 보잘 것 없습니다. 쓰지도 못하는 사랑돌이 한쪽에 한가득 쌓여있더군요. 이쪽도 추출기를 추가로 만들기 어려워지긴 했지만 이미 생산량에 압도적인 차이가 벌어져 있으니 걱정하실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


- - -


[프란츠 자작이 새로 개발한 갑옷을 완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입니다. 모양새는 갖추었지만 {왼--쪽} 겨드랑이 부근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하더군요. 재판 때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


[가져온 비둘기가 다 떨어졌군요. 나머지 이야기들은 아침에 복귀해서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토런스 성에 하얀 비둘기들이 날아드는 사이 약속된 결투 재판의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

“오오! 어서 오게, 라딘 경! 강골한 모습은 여전하군. 징세관 일은 할 만 한가? ”

“반짝이는 은화도 매일 봤더니 질리더군요. 썩혀가던 무용을 펼칠 기회가 왔다 해서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

“그래, 그래! 좋은 기회지. 좋은 기회이고말고! ”


또래에 비해 키가 크지는 않은 아르노 드 토런스 백작이었지만, 접견실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기사의 체구는 이를 감안해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컸다.


라딘 남작.

프란츠 자작의 아버지 헤르만이 토런스의 시종장으로서 무용을 떨치던 시절 그의 부관을 자처했던 남자.


비록 헤르만의 전술안과 기교까지 갖추지는 못했지만 타고난 거구와 거기서 나오는 힘만큼은 그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던 괴력의 사내였다.


듣기로는 그가 힘을 실어 창을 던지면, 둘 셋은 무리라도 한 명 즘은 확실히 갑옷 째로 꿰뚫을 수 있다던가?


잔뼈가 굵고 산전수전 다 겪은 북방의 장사꾼들이 비싼 통행세를 군말 없이 내는 데는, 웬만한 말솜씨나 논리 따윈 완력으로 깔아뭉개버리는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아르노가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은 직후 헤르만을 토사구팽하려 했던 것도, 지나치게 커져버린 그의 영향력이나 아들 프란츠와의 악연 역시 있었지만, 저 라딘이 있다면 굳이 헤르만까지는 필요 없을 거라는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라딘 남작의 무력과 프라도 자작의 지략, 그리고 이제 ‘피에르 광산촌’이라는 이름이 붙은 호손 서쪽의 마을에 몰래 잠입시켜놓은 앤 남작부인의 정보력.


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세 가신의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그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으리라. 게다가 하나가 아닌 셋에게 능력이 분산되어 있는 만큼 이쪽이 틀어쥐고 관리하기도 쉽겠지.


아르노 백작은 그렇게 생각했고, 적어도 최근까지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아 보였다.


“소신을 결투 재판의 챔피언으로 삼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영광스런 임무,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

“고맙네. 알다시피 난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말이야. 그놈의 대가리를 직접 쪼개줄 수 없는 게 너무나도 아쉽군. 혹시라도 연습시간이 부족하지는 않겠나? ”

“기사가 된지 10년도 되지 않은 무두장이 놈을 상대로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당장 이 한 손으로도 놈의 머리통을 깨부숴 줄 수 있습니다. ”

“하하, 든든하구먼! ”

“게다가 부르시기 전에도 소신은 하루가 멀다고 창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지푸라기 인형 따위론 도저히 성에 차질 않아서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습니다. ”

“좋네, 좋아! 갑옷을 벗는 대로 연회장으로 오게. 내 특별히 경을 위한 만찬과 시녀들을 준비했으니, 오늘은 푹 쉬면서 몸 상태를 점검하도록 하게. ”

“물론 그것도 좋지만, 소신은 결투에 쓰게 될 랜스를 한시라도 빨리 손에 쥐어보고 싶군요. ”

“오, 그래? 물론이지. 경이 식사를 마치는 대로 곧바로 내어주라고 일러두겠네! ”


라딘 남작은 남작대로 몸이 달라 올라 있었다.


10년 전에만 해도, 헤르만 자작 옆에서 전장을 누비며 뭇 사람들의 환호와 동경을 받았던 그다.


헤르만 자작이 영지를 얻어 바깥으로 나가면 비게 되는 시종장의 자리는 자연히 자기 것이 되리라, 라딘은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지금 시종장 자리에 올라, 자작 작위를 받고 떵떵거리고 있는 것은 프라도 그 뚱땡이였다.


선대와 달리 원래도 말보다 마차를 좋아했던 아르노 백작은, 부자병에 걸려 발이 불편해진 이후로는 무(武)와 완전히 담을 쌓아 버렸고, 전시가 아닌 평시라는 점도 겹쳐 상대적으로 무신(武臣)인 그에게는 소홀해졌던 것이다.


물론 은광석의 통행료를 징수하는 징세관이라는 직책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은화가 떨어지는 보직이었지만, 헤르만까지는 아니라도 전장의 주역이었던 그에게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서있기만 하는 일은 너무나도 따분했다.


그는 전사의 명예와 그 ‘부산물’을 원하고 있었다.


시원한 맞바람을 맞으며 전력으로 말을 달려, 사슬갑옷의 링 사이에 정확히 창날을 꽂고, 있는 힘껏 밀고 들어가 체인메일을, 그 안의 갬버슨을, 그 속의 피부와 내장을 통째로 꿰뚫어버릴 때의 손맛!


구멍 뚫린 허파에서 비명 대신 새어나오는 바람소리와, 죽음의 공포와 절망으로 차오른 눈물 아래 점점 빛을 잃으며 흐려져 가는 적의 눈동자!


몇 년 넘게 이어진 평화 속에서 그 황홀한 맛을 보고 느껴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던 것이다.


그랬다.

라딘 남작은 기백에 이르는 토런스의 기사 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열렬한 전투광이었다.


바로 그 점이 무와 담을 쌓은 아르노가 그를 멀리 했던 이유임은 꿈에도 모른 채, 거구의 남자는 서늘한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번 재판에 나오는 무두장이 놈 말입니다. ”

“음? ”

“딱히 죽여 버려도 상관없는 거지요? ”


비틀려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보며 아르노 백작은 내심 질려하면서도 즉답했다.


“당연하지!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여 버려! ”


그 역시 직접 피를 흘리는 것이 두려울 뿐, 복수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내는 아니었으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3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5) +2 22.12.01 696 23 14쪽
42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4) +2 22.11.30 700 25 16쪽
41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3) +3 22.11.29 719 24 13쪽
40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2) +3 22.11.28 746 21 16쪽
39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1) +1 22.11.28 811 21 14쪽
38 두 번째 신탁(2) +5 22.11.27 810 29 14쪽
37 두 번째 신탁(1) +7 22.11.27 837 30 13쪽
36 신종계약(5) +3 22.11.26 862 24 13쪽
35 신종계약(4) +13 22.11.26 907 32 14쪽
34 신종계약(3) +3 22.11.25 906 24 13쪽
33 신종계약(2) +5 22.11.24 921 29 15쪽
32 신종계약(1) +6 22.11.23 950 33 14쪽
31 신명재판(7) +6 22.11.22 968 35 13쪽
30 신명재판(6) +5 22.11.21 935 30 16쪽
29 신명재판(5) +5 22.11.21 952 31 17쪽
» 신명재판(4) +4 22.11.20 1,007 31 18쪽
27 신명재판(3) +2 22.11.20 1,017 41 11쪽
26 신명재판(2) +5 22.11.19 1,007 33 14쪽
25 신명재판(1) +4 22.11.18 1,037 36 15쪽
24 곰과 여우와 돼지(4) +4 22.11.17 1,025 35 14쪽
23 곰과 여우와 돼지(3) +5 22.11.17 1,040 37 18쪽
22 곰과 여우와 돼지(2) +5 22.11.16 1,059 38 15쪽
21 곰과 여우와 돼지(1) +4 22.11.15 1,085 42 12쪽
20 피에르의 온도(6) +4 22.11.14 1,083 37 13쪽
19 피에르의 온도(5) +2 22.11.14 1,073 38 16쪽
18 피에르의 온도(4) +3 22.11.13 1,090 37 13쪽
17 피에르의 온도(3) +3 22.11.13 1,156 42 16쪽
16 피에르의 온도(2) +3 22.11.12 1,273 39 14쪽
15 피에르의 온도(1) +1 22.11.11 1,341 34 18쪽
14 호손시(市)의 사정(2) +1 22.11.10 1,413 39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