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74,036
추천수 :
2,527
글자수 :
469,180

작성
22.11.20 00:45
조회
1,016
추천
41
글자
11쪽

신명재판(3)

DUMMY

“릴리랑 저는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근데 정분이 났다고요? 누구랑요? ”

“그그, 있잖습니까? 촌장 집에서 일하다가 졸지에 같이 잡혀서 억울한 옥고를 치렀다던 그 집 하녀 말입니다. ”

“내니요? ”

“아! 그 이름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보고 있자면 아주 그냥 꿀이 뚝뚝 떨어져서 눈꼴이 실 정도지요. ”


게일이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보니 이걸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던 거구만.


“부러우면 게일 씨도 한 번 노력해보시죠? ”

“하, 나요? 난 먼저 간 아내를 아직 못 잊었수. 게다가 후고 녀석을 두고 새장가를 가는 것도 솔직히 엄두가 안 나고... 저번에 쇤네가 촌장한테 뒤통수를 맞고 감금됐을 때, 집에 돌아가자마자 녀석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요? 내가 자기를 버리고 여자랑 도망간 줄 알았답디다. ”

“허... ”

“그동안 마을 놈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걸 주워들은 모양이지요. 내가 곡식을 떼먹어서 모은 돈으로 새살림을 차리려 든다고. 그놈이 말이 좀 어눌해서 그렇지, 귀가 멀거나 아예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닙니다요. ”

“그렇군요. ”

“에이, 그 얘기는 됐고. 조나선 영감은 아마 촌장 집에 있을 겁니다. 같이 가드릴 깝쇼? ”

“그 핑계로 일 안하고 노시려고요? ”

“하여간 쓸데없는 부분에서 눈치가 빠르시다니깐. ”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석회동굴과 연결된 갱도로 들어가서 이제 완전히 광산촌이 된 마을로 올라갔다.

우물로 위장했던 수직갱도에는 사다리를 설치했기에 굳이 밧줄을 잡고 낑낑대며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간만에 다시 찾아간 촌장 없는 촌장의 집.


[거참, 볼수록 곱게 생겨먹은 녀석일세! 새하얀 날개에 요 깜찍한 부리 하며... ]

[호호, 그렇지요? ]

[물론 우리 내니보다는 못하지만! ]

[어머! 남사스러운 말씀을... 밖에 누가 듣겠어요! ]

[듣긴 누가! 지금 여기엔 우리들밖에 없는 걸? ]


죄송합니다. 지금 제가 실시간으로 듣고 있네요.


[흐흠! 그러니까 내니... ]

[어머멋? 나이도 자실 마큼 자신 분이 왜 이렇게 참을성이라곤 없으실까? ]

[알잖아? 나는 평생을 불과 함께해온 남자라고. 몸은 늙었어도 마음의 불씨는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어! ]

[호호! 아주 시인이셔. 그런 점이 싫지는 않지만요. ]

[그, 그럼... ]

[그렇지만 나중에! 여자에게는 혼자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랍니다? 이렇게 일과시간에 갑자기 들이닥치시는 것도 솔직히 곤란해요. ]

[어차피 지금은 촌장도 없잖아?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테고. 내니는 이제 그냥 자유민과 마찬가지야. ]

[덕분에 화장도 못하고 꾸미지도 못했다고요! ]

[그런 거 없어도 내니는 충분히 예뻐. ]

[그래도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더 예뻐 보이고 싶은 게 여자 마음인 걸요? 하여튼 남정네들은 여자 마음을 몰라! ]

[크흠... 그런가? 그건 내가 잘못했구먼. ]


의기소침하게 대답한 조나선이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그, 그나저나 새를 키우고 있었으면 진작 얘기하지! 친한 방앗간지기한테 말해서 모이라도 구해다 줬을 텐데. ]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라서 제가 주는 것만 먹어요. ]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만... ]

[그보다도 여기까지 온 김에 조나선 씨 일 얘기나 들려줘요. 듣기로는 자작님께서 엄청 총애하고 계신다던데? ]

[헛헛! 총애랄 것까지야. 인연이 오래되긴 했지만. 근데 그런 얘기는 여자가 듣기에는 재미없지 않아? ]

[전혀 아닌걸요? ]

[그래? ]

[전 재밌기만 하던데요? 새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

[무엇보다도? ]

[이야기를 할 때 빛나는 당신의 눈이 너무 멋지니까. ]

[내, 내니이...! ]


얼씨구?

아주 청춘, 아니, 황혼드라마를 찍고 계신다.


그나저나 내니 저 아줌마, 촌장이랑 있을 때는 줄곧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저런 낯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알았구나.


계속 엿듣고 있기도 뭐해서 흠흠, 헛기침하고 노크했다.


-똑똑!


“조나선 씨? 혹시 안에 계십니까? ”

[음? 이 목소리는 이미르 님이군. 어엇? 그러고 보니 어느새 그림자의 길이가... 이, 이만 가볼게, 내니! ]


벌컥 문을 열고 나온 그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었다.


“그, 죄송합니다. 잠깐 얼굴만 보고 온다는 것이. ”

“아닙니다. 달아오른 쇠를 물에 넣어 담금질을 하듯이, 타오르는 마음도 때때로 식혀 줘야 하는 법이죠. ”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 참, 나이를 헛먹은 건지 이제 와서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는 게... 아, 아니, 이런 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겠지요! 이 시각에 여기 오신 걸 보면 뭔가 따로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

“그렇습니다. 그동안 철은 좀 모였나요? ”

“음, 철광석의 품질이 워낙 좋은 덕분에 사철을 쓸 때보다는 빠릅니다만 아무래도 손이 달려서 한계가 있습니다. 화살촉으로 쓸 품위가 낮은 녀석들은 도제들을 돌리고 있고 무기나 방어구에 쓸 것들은 저와 직인들이 직접 뽑고 있는데 어느 쪽이든 하루에 50파운드가 고작이더군요. 빨리 그 고로란 걸 완성해야 소결해 둔 광석을 싹 처리할 수 있을 텐데... 아! 참고로 지금은 괴철로에서 철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시간대라서 일종의 쉬는 시간입니다? ”

“누가 뭐랍니까? 아무튼 그럼 갑옷 한 벌을 만들어볼 정도의 양은 모였겠군요. ”


나는 그에게 양피지에 그려온 설계도를 내밀었다.


“가장 품위가 좋은 강철을 모아서 이걸 만들어주십시오. ”

“이건... 갑옷과 투구입니까? 한데 제가 원래 알고 있던 형태와는 다르군요. ”

“네. 연철로 만든 링을 엮어 만드는 사슬갑옷이 아니라 강철로 만든 판금을 이어서 만드는 갑옷입니다. 물론 관절 부위나 틈새에는 사슬을 덧대지만요. 투구는 얼굴 전체를 가리면서도 경첩을 달아서 여닫을 수 있게 했습니다. 되도록 모양에도 신경써주십시오. 다 나름의 의미들이 담겨 있으니까요. ”

“허, 강철판을 이렇게 얇고 넓게요? 그것도 곡면으로? ”

“쉽진 않을 겁니다. 필요한 솜씨도 솜씨지만 웬만한 품위의 쇠로는 어려울 테죠. 여태까지 모은 철을 죄다 써야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물건이에요. ”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소문이 정말인가 보군요. 궁내관께서 결투 재판에 사용하실 갑옷입니까? ”

“저쪽의 대전사로 누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병력의 차이가 있으니 그쪽에서 나온 놈이 더 강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장비로라도 격차를 메워야지요. ”

“어려운 숙제가 늘었군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믿고 있겠습니다. ”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자 릴리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볼일은 다 마치셨나요? ”

“네. 돌아갑시다. ”


그렇게 다시 호손 성채로 향하는 길.


“...생각해보니까 이상하네. ”

“네? 뭐가요? ”

“확실히 이상해. 가자마자 확인해 봐야겠어. ”

“아... 또 혼자서 고민 중이시구나. ”


나는 달리는 말 위에서 흔들리며 중얼거렸다.

문득 올려다 본 늦가을의 푸른 하늘을, 새하얀 새 한 마리가 일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 * *



“지하 감옥의 죄수 명단을요? ”

“어렵겠습니까? ”

“아, 아니요. 가능할겁니다. 이미르 님께서는 이 호손의 은인이시니까요. 다만 너무 갑작스런 요청이라... ”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한 내 요구에 시녀장 엠마는 조금 곤란해 하면서도 프란츠 자작에게 알렸다.

그리고 곧 내려온 시원한 허락으로 나는 성채의 지하 감옥에 있는 서류 한 장을 꺼내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

“최근 일주일 상간이면 됩니다. ”

“예? 그거라면 익히 알고 계신 내용과 같을 텐데요. ”

“그래서 확인하려고 하는 겁니다. 보여주십시오. ”


간수의 도움으로 나는 가장 최근에 추가된 여섯 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는 낯설고 일부는 익숙한 이름들.

그중 단 하나를 빼고는 죄수가 이미 석방되었음을 알리는 가로줄이 쫙 그어져 있었다.


나는 간수에게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확실히 여기 있는 이름이 전부지요? ”

“그렇습니다. ”

“여자는 명단을 따로 적어 관리하거나 하진 않고요? ”

“예? 물론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죄수의 명단인데 남녀의 차이를 두겠습니까. 이름을 보면 아시겠지만 최근의 죄수들은 전부 남자였습니다. ”

“그렇군요.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예상대로 이곳에 ‘촌장 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잡혔다가 무죄방면 된 억울한 하녀’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즉시 프란츠 자작과 궁내관 잭슨을 호출했다.

서로 머리를 맞댄 회의는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 * *



“이, 이렇게 그냥 막 들어가도 돼요? ”


급히 말을 달려 도착한 촌장의 집에서 릴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차피 주인 없는 집이잖습니까? ”

“내니 씨가 살고 계시잖아요. 하녀분이시라지만 지금은 그분의 집이나 마찬가진데. ”

“그분은 조나선 씨랑 데이트 하러 갔습니다. 예전부터 하도 광산을 보고 싶어 한다기에 까짓 거 보여주고 오라고 했죠. ”


물론 종유동굴로 통하는 통로는 미리 막아두었다.

나는 가지고 온 양초를 벽난로에 갖다 대어 불을 켰다.


“아직 햇빛도 있는데 벌써 초를 켜세요? 킁킁... 어? 그것도 엄청 비싼 밀랍초를? ”

“냄새가 남으면 안 되거든요. 작전 수행 중이라. ”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 릴리를 두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일전에 궁내관이 집을 수색했을 때 참관했던 터라 빛만 있으면 지하실을 뒤지는 일은 쉬웠다.


그리고 역시 녀석들은 생각했던 곳에 있었다.

며칠 전에 게일이 꽁꽁 묶인 채로 널브러져 있던 장소에.


나는 ‘구구구국!’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새하얀 비둘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릴리 씨. 저쪽으로 가서 비둘기를 여기로 몰아줄래요? 녀석들 대가리를 잠깐 잡아야 하거든요. ”

“네? 머리를요? 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고... 혹시 잡아먹으실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딱 봐도 엄청 소중하게 기른 애들 같은데... ”

“잡아서 백숙을 만들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 그저 약간의 ‘해킹’을 해둘 뿐입니다. ”

“해킹이요? ”

“그런 게 있습니다. 자, 오라이! 오라이! ”


내 부추김에 못이긴 릴리가 거듭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훠이! 훠이!’ 비둘기들을 내 쪽으로 몰아주었다.


나는 그 중 가장 가까운 한 마리의 목을 틀어쥔 다음 주머니에서 좁쌀 만한 팔면체의 돌조각을 꺼냈다.


[구, 구국? ]


그래. 인간이 미안해. 조금만 참으렴.

나는 조각 하나를 녀석의 이마 위에 올려놓고 꾹 눌렀다.


“자! 나머지 녀석들도 대가리 딱 대! ”


그렇게 모든 비둘기들의 머릿속에 같은 돌조각을 심었다.

비유하면 중세 버전의 이메일 해킹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3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5) +2 22.12.01 696 23 14쪽
42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4) +2 22.11.30 700 25 16쪽
41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3) +3 22.11.29 718 24 13쪽
40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2) +3 22.11.28 746 21 16쪽
39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1) +1 22.11.28 810 21 14쪽
38 두 번째 신탁(2) +5 22.11.27 810 29 14쪽
37 두 번째 신탁(1) +7 22.11.27 837 30 13쪽
36 신종계약(5) +3 22.11.26 862 24 13쪽
35 신종계약(4) +13 22.11.26 907 32 14쪽
34 신종계약(3) +3 22.11.25 905 24 13쪽
33 신종계약(2) +5 22.11.24 920 29 15쪽
32 신종계약(1) +6 22.11.23 950 33 14쪽
31 신명재판(7) +6 22.11.22 967 35 13쪽
30 신명재판(6) +5 22.11.21 935 30 16쪽
29 신명재판(5) +5 22.11.21 951 31 17쪽
28 신명재판(4) +4 22.11.20 1,006 31 18쪽
» 신명재판(3) +2 22.11.20 1,017 41 11쪽
26 신명재판(2) +5 22.11.19 1,007 33 14쪽
25 신명재판(1) +4 22.11.18 1,037 36 15쪽
24 곰과 여우와 돼지(4) +4 22.11.17 1,025 35 14쪽
23 곰과 여우와 돼지(3) +5 22.11.17 1,040 37 18쪽
22 곰과 여우와 돼지(2) +5 22.11.16 1,059 38 15쪽
21 곰과 여우와 돼지(1) +4 22.11.15 1,085 42 12쪽
20 피에르의 온도(6) +4 22.11.14 1,083 37 13쪽
19 피에르의 온도(5) +2 22.11.14 1,073 38 16쪽
18 피에르의 온도(4) +3 22.11.13 1,089 37 13쪽
17 피에르의 온도(3) +3 22.11.13 1,156 42 16쪽
16 피에르의 온도(2) +3 22.11.12 1,273 39 14쪽
15 피에르의 온도(1) +1 22.11.11 1,341 34 18쪽
14 호손시(市)의 사정(2) +1 22.11.10 1,413 39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