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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마마바 님의 서재입니다.

죄악과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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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마마바
작품등록일 :
2018.11.09 16:08
최근연재일 :
2019.08.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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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388

작성
19.08.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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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탑(5)

DUMMY

그들이 떠날 준비가 되기까지 만 하루가 걸렸다. 그동안에도 댄은 자신의 결정을 끊임없이 의심했다. 그러나 앨런을 데려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니, 사실 이유는 많았지만 차마 그녀를 두고 갈 수 없었다.

댄은 마른 빵과 앨런의 옷가지 몇 개를 자루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방의 한쪽 구석으로 가 잡동사니를 뒤적거리며 쓸 만한 것을 찾다가 큰 방패를 발견했다. 어깨부터 엉덩이까지 가리는 크기의 네모난 철 방패였다. 그는 그걸 꺼내어 한 손에 들었다.

“출발하자.”

앨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로 바짝 붙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멀리 바라보자 비스듬히 올라가는 통로를 끝도 없는 어둠이 채우고 있었다.

“횃불 좀.”

앨런은 고정대에서 횃불을 빼내 건네주었다.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리자 군데군데 균열이 생긴 회색 층계에 검갈색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댄은 핏자국을 무시한 채 앞에 놓여있을 함정들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앞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어 피를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역겨운 피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댄은 층계를 하나씩 밟아 올라갔다. 일단 움직이면 피도 그리 신경 쓰이지 않을 것 같았다. 지하실 앞의 계단에는 함정들이 없었다. 한때는 많았겠으나 고장 나 있는 듯했다. 댄은 위쪽에서 틈을 발견했는데 지나가도 아무 일이 없자 그렇게 판단했다. 누군가 함정을 수리하면서 깊은 곳은 그냥 넘어간 모양이었다.

“올라와.”

앨런이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댄은 횃불을 높이 들어 앞을 비추었다. 출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계속 걸어 올라갔다. 층계가 눌리는 느낌과 함께 철컥 소리가 들리면서 위에서 원형 날이 떨어졌다. 댄은 횃불을 떨어뜨리고 양손으로 방패를 비스듬히 들어 올려 날을 흘려보냈다.

방패와 날이 부딪히며 난 큰 소리에 앨런이 놀라 움찔했다. 뒤돌아보자 앨런은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순간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앨런은 봐왔던 것처럼 겁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댄이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혼자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와 함께 다닌다면 이런 함정보다 더 무서운 것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그러고 보면 나가고 난 후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놓지 않았다. 앨런과 같이 움직여야 할까? 그건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위험했다. 댄은 생각을 접어 두었다. 지금은 탈출에 집중해야했다. 나가기만 한다면 방법은 많았다. 앨런을 근처 마을에 두고 갈 수도 있었고, 돌봐주던 사람을 찾아 맡길 수도 있었다.

횃불이 굴러 떨어져 주위가 캄캄했다. 댄은 앨런에게 횃불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앨런은 불덩이를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불을 세심히 조종해 앞길을 환히 밝히게 하였다. 댄은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탑에서 나가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해보였다. 함정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천천히 나아가면서 신중하게 상황을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이대로 함정을 하나씩 막아나가다 보면 안전하게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방심하지는 않았다. 댄은 여전히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섯 발 앞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계단 디딤판 쪽에 작은 발바닥 모양이 오목새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댄은 디딤판 앞에서 잠시 멈추고 방패를 들어 올린 채 발을 디뎠다. 걱정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댄은 안심하며 디딤판을 지나갔다. 앨런도 뒤를 따랐다. 그런데 앨런이 디딤판에 발을 디디자 작은 철컥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앨런의 머리 위에서 묽은 액체가 쏟아졌다.

“조심해.”

댄이 그녀를 끌어당기다가 쏟아지는 액체를 뒤집어썼다. 댄은 뭔가 잘못되리라 생각해서 움츠렸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액체는 그냥 물이었다. 썩었는지 냄새가 고약하긴 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물이 계속 쏟아져 내려왔다. 이 지하통로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계단 깊은 곳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뛸 수 있겠어?”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댄은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계단 옆 벽에서 화살이 튀어나왔다. 댄은 방패로 막아내고 계속 달렸다. 앨런이 뛰는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속도를 맞춰가며 움직였다. 주기적으로 뒤돌아보며 앨런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물이 그리 빠르게 차오르지 않아 무리해서 빨리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 올라왔는지 함정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일곱 걸음에 하나 꼴로 함정이 설치되어 댄은 기민하게 움직여야 했다. 개중에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장전되는 함정도 있어 앨런과의 거리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옆에서 칼이 찔러 들어와 댄은 앨런을 뒤로 밀어내고 자신은 위로 한 발짝 올라가 피했다. 칼이 다시 들어가자 곧장 앨런이 올라왔고 둘은 다시 달렸다. 이때 앨런이 서 있는 쪽에서 또 소리가 났고, 물이 쏟아져 내려왔다. 물이 한군데에서 나올 때는 견딜 만 했지만 이제는 너무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댄은 속도를 높이기 위해 앨런의 팔을 붙잡고 달렸다. 앞쪽에서 작은 돌멩이들이 날아와 방패로 막아냈다. 물이 점점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수면과 그들의 거리는 이제 고작 열 걸음 밖에 되질 않았다. 댄은 위험 속에서 달렸다. 오래 전에 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얼마 전에 바위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가? 그렇다면 댄은 그녀를 구하지 못할까? 그때 소녀를 구하지 못했던 것처럼? 댄은 순간 얼어붙었다. 앨런은 소녀의 대용품이 아니었다. 앨런과 소녀를 같이 생각했던 것만으로도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앨런이 그를 잡아당겼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시 인식되었다. 그의 왼쪽에서 쇠사슬이 달린 철퇴가 날아오고 있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가까웠다. 댄은 방패를 올려 막아냈다. 날아오던 힘 때문에 댄의 자세가 무너졌고 건너편 벽에 세게 부딪혔다. 팔을 잡고 있던 앨런도 같이 부딪혀 그녀가 띄워뒀던 불이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통로는 어둠에 잡아먹혔다.

“앨런 괜찮아?”

“너는 괜찮아? 갑자기 왜 멈춰선 거야.”

댄은 대답하지 않고 어둠속을 달렸다. 멀리서 빛이 보였다. 아주 흐릿한 빛이. 뒤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앨런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었다. 댄은 팔을 당겨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물이 바로 뒤에서 찰랑거렸다. 앨런의 하반신은 이미 잠겨있었다. 댄의 발도 물에 잠겼다. 계단이 미끄러워 속도는 더 늦어졌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거친 바람소리가 들렸다. 출구가 멀지 않았다. 댄은 다리를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희망에 사로잡혔을 때 어둠 속에 숨어있던 원형 날붙이가 날아들었다. 어두운 탓에 댄은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어설프게 들려있던 방패에 튕겨 위로 날아간 날붙이는 댄의 어깨를 찔렀다. 힘이 빠져 방패와 앨런의 손을 놓쳤다. 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러는 동안 물은 계속 차올랐다.

차가운 물이 공포처럼 그들을 감쌌다. 댄은 찬 물이 머리에 닿자 놀라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앨런부터 찾았다. 곧 발버둥 치던 앨런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 댄은 앨런을 끌어 당겨 자신의 앞에 오게 하고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단단한 계단을 밟아 그걸 지지대삼아서 앨런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 깊게 빠진 것이 아니라서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머리를 수면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앨런이 숨을 쉬면서 만들어내는 진동이 느껴졌다.

댄은 자신도 올라가려 애를 썼다. 앨런을 들고 있는 터라 몸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힘껏 뛰어 봐도 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숨이 부족해 머리가 멍해져갔다. 절박함에 입을 열자 썩은 물이 들어왔다. 숨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힘이 풀려갔다. 그때 앨런의 몸이 손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댄은 그녀를 붙잡으려고 애썼다. 또 실패하는 것이다. 또 구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를 구할 수 있다는 그의 환상은 오만이고, 기대는 헛되었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그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숨 쉬게 해야 했다. 그는 그래야했다. 그런데 앨런은 그의 손을 떠나가고 있었다.

댄이 절망에 사로잡혔을 때 누군가 그의 팔을 잡고 끌어올렸다. 댄의 몸은 물살을 가르며 떠올라 마침내 신선한 공기에 닿았다. 앨런이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댄은 썩은 물을 한차례 토해내고 기어올라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자, 익숙한 탑의 벽이 보였다.


어두운 밤, 탑은 빗물을 막아내며 꼿꼿이 서 있었다. 자신과 대항해 싸운 두 작은 생명체에게 존중을 보이듯 사뭇 엄숙하고 정중해 보였다. 그 내부, 황량하고 쓸쓸한 공간에서 댄과 앨런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마주보며 웃었다.

사실 댄이 웃을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어깨의 상처는 피를 뿜어냈고, 아물어 가던 등의 상처도 터져 피가 새어나왔다. 또한 전신 타박상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살아있었다. 선택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로 오랜만에 마음 편히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해방감을 만끽하고 나서 출구를 찾아 헤맸다.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아 앨런이 불덩이를 만들어 띄웠다. 그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기억 한편에 밀어 두었던 것이 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 의미 없던 것이 지금은 너무나 중요하게 느껴졌다.

“잠깐만!”

급히 외쳐 봐도 막지 못했다.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불덩이는 벽에 빼곡한 낙서를 드러냈다. 자신의 가족, 친구의 소중한 이름들.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가죽을 벗겨내 죽일 테다, 똑같이 불태워 주겠다, 저마다 토해낸 증오의 흔적들. 말라붙은 피와 하얀 재가 되어버린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앨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눈동자는 글씨들 사이를 느릿하게 오갔다. 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시선을 돌려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출구로 데려갔다.

앨런이 만들어낸 불덩이는 세찬 빗줄기 속을 떠다니다 사그라들었다. 바위산에서 내려다본 황무지는 어둡고 넓어보였다. 빗줄기가 그들의 몸을 때렸다. 결코 걷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걸어야했다. 탑에서 멀어져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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