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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마마바 님의 서재입니다.

죄악과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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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마마바
작품등록일 :
2018.11.0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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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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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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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1.탑(3)

DUMMY

4.

햇빛이 탑의 지하까지 들어오자 댄과 앨런은 불편한 잠에서 깨어났다. 빛은 단 한 곳, 앨런 쪽 벽에 붙은 굴뚝에서만 들어오고 있었다.

앨런은 구석에 놓인 물통으로 다가가 나무그릇으로 물을 떠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물로 얼굴을 닦았다. 댄은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잠을 쫓고 있었다. 상처 때문인지 쌓인 피로 때문인지 몽롱했다.

앨런은 충분히 씻고 나서 물기를 천 조각에 문질러 닦고는 댄의 눈치를 보며 굴뚝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소매를 걷어 올리고 치마는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다리를 한쪽으로 접고 앉아 다리와 팔, 얼굴에 햇볕을 쬐였다. 그러면서도 주위를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댄은 고양이가 햇볕 받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보고 있자니 민망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림자가 드리우며 햇빛이 사라졌다. 앨런은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댄과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놀라며 구석으로 총총거리며 물러났다.

굴뚝에서 낡은 천으로 묶인 보따리 하나가 떨어졌다. 앨런은 긴장을 풀고 보따리에 다가갔다. 보따리를 풀자 마른 빵 덩어리, 밀 낱알, 당근과 시금치, 말린 고기 등의 식료품과 깨끗한 물이 담긴 가죽 물통, 나무 장작 한 무더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앨런은 가죽 물통의 물을 식료품 더미 옆에 있는 나무 물통에 부었다.

“별 일은 없지?”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굴뚝을 타고 들어와서 소리가 심하게 울렸다.

“응. 아무 일 없어.”

앨런이 굴뚝에 대고 크게 말했다.

“거짓말 마. 계단에 피가 가득한데. 죽었어?”

“응.”

앨런은 댄을 곁눈질로 훔쳐봤다.

“날이 더워. 거긴 어때?”

댄은 그들이 대화하는 동안 계단 쪽에서 나는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둘은 대화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는 그에게는 분명하게 들렸다. 발소리와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여기는 아주 덥진 않아.”

“그래도 물을 많이 마셔. 충분히 가져왔으니까.”

“알았어.”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없어.”

“그래. 가볼게.”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발소리가 사라지자 계단 쪽에서 나던 소리도 사라졌다.

“저 사람은 누구야?”

“그냥 아는 사람.”

앨런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설명을 요구하듯 계속 그녀를 쳐다봤지만,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앨런은 새로 받은 식료품을 앞으로 가게 잘 늘어놓고 맨 뒤에 있는 식료품들을 꺼내 굴뚝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잠시 댄 쪽을 흘끔거리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아까 받은 장작 중에 몇 개를 골라 굴뚝에 원 모양으로 펼쳐 놨다. 벽으로 다가가 횃불을 고정대에서 꺼내 불을 나무로 옮겨 붙였다. 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다음으로 옷가지 뭉치 뒤에서 움푹 들어간 냄비를 가져다가 물을 담고 불 위에 올려놓았다. 물이 끓어오르자 고기와 빻은 밀, 당근을 넣고 푹 끓였다. 어느 정도 익자 초록색 야채들을 넣고 더 끓였다. 익숙한지 동작에 막힘이 없었다. 곧 재료들이 잘 익어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풍겨왔다. 그녀는 나무 국자로 스프를 떠서 맛을 보고 양념을 좀 더했다.

앨런은 댄을 다시 흘끔 봤다. 그녀는 나무 그릇 두 개에 스프를 나눠 담고 그 중 하나를 든 채 댄에게로 조심스레 걸어왔다. 댄이 가만히 앉아 받기가 멋쩍어서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앨런은 얼어붙은 듯이 멈춰 섰고 댄도 그녀의 반응을 보고 멈췄다. 다시금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앨런은 우물쭈물하며 그릇을 들고 있었다. 댄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해칠 생각 없다니까. 안심해.”

댄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다. 앨런은 더 경계하여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며 한걸음 더 물러섰다. 그녀는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아 버렸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그 구석자리로 자기 몫의 스프와 함께 돌아가 버렸다. 그녀는 눈을 치켜떠 그를 보면서 스프를 마셨다.

“이러기야?”

댄이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다고 앨런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고 스프 그릇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피를 많이 쏟아서인지 눈이 핑 돌아 벽을 짚어야 했다. 다리에 힘을 주자 옆구리의 상처가 비명을 질러대었다.

앨런은 댄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미안한 빛을 띠었다. 동시에 경계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더 긴장했다.

댄은 앨런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또 너무 아팠기 때문에 살살 움직였다. 스프는 방 한가운데에 놓여있었다. 스프 그릇 앞에서 허리를 구부렸다. 통증이 느껴져서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 소리에 앨런이 움찔했다. 댄은 한 손으로 그릇을 잡고 다른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겨우 허리를 들어올렸다. 다시 어기적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얼굴에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려갔다. 식어서 미적지근한 스프를 입에 우겨넣었다.

식사 이후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서로 구석에만 처박혀 있었기에 할 게 별로 없었다. 앨런은 익숙한 듯 이 고요함을 즐겼다. 댄에게는 지루함이 그녀에게는 평화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편안해 보였다. 책을 꺼내 보는 것을 제외하면 움직임이 없었다. 댄은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녁식사는 아침에 만들어둔 스프를 데워 먹는 것으로 때웠다. 메뉴뿐만 아니라 식사법도 같아 댄은 또 스프를 위한 긴 여정을 해야 했다. 이러한 일상은 한동안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일상에서 앨런은 댄과 거리를 두었다.

그 동안 댄은 소일거리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언젠가 나가야 할 테니 도움 되는 것들을 찾아보자는 식이었다.

먼저 굴뚝을 살펴보았다. 댄이 굴뚝으로 가자 앨런이 놀라며 일어나 다른 구석으로 가버렸다. 댄은 성가심과 미안함을 느끼며 불 꺼진 아궁이에 쭈그리고 앉아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굴뚝은 높았고 밋밋해서 짚을 곳이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로 나가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다음으로는 계단을 살폈다. 계단은 댄이 있던 구석자리 바로 옆에 있었다. 계단 안에는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높아서 그런 건지, 빛이 안 들어와서 그런 건지 끝도 보이지 않았다. 피를 오래 보는 게 힘들어 일단 지금까지 알아낸 것은 그 정도밖에 없었다.

계단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의문이 다시 튀어나왔다. 저 피는 왜 뿌려져 있는가. 대체 누가 이 허름한 탑에 들어오려고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접어두었던 앨런에 대한 의심이 다시 솟아나는 것이었다. 이곳은 마녀의 탑이고 사람들은 당연히 마녀를 잡으러 오는 것일 테고 안에 있는 여자는 당연히 마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그런 불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댄이 의혹을 담은 눈빛으로 앨런을 보면 그녀는 당황하여 고개를 푹 숙이거나 벽돌 개수를 새는 것 마냥 벽을 관찰하고는 했다. 그러면 그녀를 의심하기가 힘들어졌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중간에 해가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기에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댄은 대략 일주일 쯤 지났다고 짐작했다. 그날따라 앨런이 불안해 보였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가,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가, 댄을 봤다가 바닥을 봤다가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댄은 기다리다가 앨런이 말을 꺼낼 기미가 안보이자 먼저 말을 건넸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앨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상처. 다시 감아야해.”

앨런이 찢어진 천 옷과 단검 손에 들고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

댄이 일어나며 대답했다.

상처는 잘 아물고 있었다. 어깨와 등의 상처를 빼면 나머지는 깊지가 않아 벌써 다 나았다. 통증도 요 며칠 사이에 놀랍도록 나아졌다. 덕분에 일어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댄은 별 생각 없이 앨런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불편해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앨런은 전보다는 편안한 표정으로, 그러나 여전히 경계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뒤돌아.”

앨런이 말했다. 댄은 순순히 돌아앉았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댄에게 가까워지고 난 후에는 아주 조심해서 움직였기에 많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했다.

댄은 셔츠를 벗었다. 꽤나 말라 앙상한 등뼈가 피부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따뜻한 손이 등에 와 닿았다. 앨런은 배에 감긴 천부터 풀어냈다. 피가 천에 달라붙은 채로 말라있었다. 들고 온 단검으로 천과 상처에 같이 들러붙어 있는 마른 핏덩이를 잘라내며 천을 풀어냈다. 마침내 등허리 왼쪽에 난 상처가 보였다. 화살촉은 이전에 제거해 두었고, 상처는 이제 딱지가 앉아 피가 멎어 있었다.

앨런은 쪼그려 앉은 채 유심히 상처를 살폈다. 등의 상처를 살피고 나서 급하게 처치하느라 놓친 상처가 있는지 염려되어 붕대가 감겨있던 곳을 쭉 둘러보았다. 배에 약간 왼쪽 부분에 세로로 길게 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흉터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몸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오래된 흉터가 많았다. 놓친 상처는 없었다. 앨런은 다시 등의 상처를 처리하는데 집중했다.

댄은 어깨너머로 앨런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오랫동안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당황하여 얼굴을 돌리려 했겠지만 지금 그녀는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눈이었다. 평소에 옅은 초록빛의 두 눈은 흐릿했고 그 아래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피곤해 보였다. 시무룩한 혹은 겁먹은 표정은 눈과 잘 어울려 어딘가 아파보이고 불안정해보이게 만들었다.

반면 지금은 눈에서 제법 활기가 느껴져 얼굴을 생생하고 보기 좋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열의가 느껴졌다. 다소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걸 보면서 댄은 자신의 의심을 버렸다. 남을 도우면서 저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사람이 마녀일 리가 없었다.

“이런 거는 어디서 배운 거야?”

댄이 조용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물었다. 앨런이 놀라서 그에게서 물러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짓이긴 약초를 상처에 꼼꼼히 바르느라 집중하여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책에서.”

앨런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묻어나왔다. 그녀는 천 옷을 단검으로 길게 잘라 댄의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어깨에 감긴 천을 걷어냈다.

“왜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거야?”

댄이 물었다. 앨런의 반응에 고무되어 좀 더 과감한 질문을 골랐다.

“몰라.”

앨런이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어깨 상처에 약초를 바르고 천을 감고 있었다.

“모른다니?”

“몰라. 난 그냥 여기 있었어.”

앨런은 천을 잘 감고 나서 팽팽하게 매듭지었다. 그녀는 일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댄은 몸을 돌려서 그녀를 보고 앉았다.

“일일이 놀라지마. 봐, 난 아무 것도 안하잖아.”

앨런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뒤로 슬슬 움직였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앨런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곁눈질했다. 뭔가를 가늠하는듯한 모습이었다.

“너는 왜 여기로 온 거야?”

한참을 조용히 있던 앨런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쩌다보니까 오게 된 거야. 별 이유 같은 건 없어.”

앨런은 그 말을 듣고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이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기, 탑 밖은 어때?”

“내가 들어올 때 어땠냐고?”

앨런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약간 오고 있었어. 아마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전이었던 것 같아.”

“음, 그런 거 말고. 사람들 사는 마을 이야기 같은 건 몰라?”

“알기야 알지. 내가 살던 마을은 시골이었어. 다들 농사를 지었고 뭐, 별 다른 일은 없었지.”

댄은 오랜만에 고향을 생각하려니 잘 떠오르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궁전이나 커다란 성 같은 건 없었어?”

“없었지 아마도? 글쎄 떠나온 지가 오래 되서 잘 모르겠네.”

“그럼 그런 걸 본적도 없어?”

“궁전은 모르겠는데 성들은 많이 봤지.”

“엄청 크다던데. 막 거인을 보는 거 같고, 그렇다던데.”

앨런은 이제 제법 활기차게 떠들고 있었다.

“전에 왔던 그 사람이 그래?”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이름은 뭐야? 뭐하는 사람이고?”

“이름은 몰라. 음, 하는 일은....... 나를 도와주는 게 일인 거 같아.”

“이상한 사람이네.”

“좋은 사람이야.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책도 가져다 줘. 여기 있는 건 전부 그 사람이 가져다 준거야.”

앨런이 주변의 것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밖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줬어.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햇빛이 온갖 곳을 다 비추고, 사람들은 싸우지 않는 곳이라 그랬어.”

앨런은 이제 붕대를 감아줄 때처럼 생기 있는 얼굴을 하고 밝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렇게까지 좋은 곳은 아니야.”

댄이 말하자 앨런은 옆으로 기어가 책 한권을 찾아 들어 보였다.

“이 책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

얇은 책의 표지에는 ‘행복한 미트비’라고 적혀있고 과장되게 웃는 사람이 조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건 지어낸 이야기야. 실제로는 그렇게 좋지 않아.”

“이 책에도.”

앨런은 책을 한권 더 내밀었다. 표지에 ‘엠브리오 왕국 동부의 문화와 생활에 대한 보고 - 마법협회’라고 적힌 두꺼운 책이었다. 앨런은 책을 펼쳐서 원하는 구절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동부에는 활기차고 건강한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은 모여 왁자하게 떠들며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한다.”

“음, 그래 내가 잘못 생각한 거 같아. 네 말이 맞아.”

“그래?”

앨런은 만족하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침묵이 이어지자 앨런은 너무 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시선을 떨어뜨리고 어색하게 바닥을 보았다. 댄은 그녀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럼 너는 여기서 나가본 적이 없는 거야?”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무슨 소리야?”

“그냥, 잘 모르겠어. 아저씨는 내가 여기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거래. 그러면 밖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던 거 아닐까?”

“기억 안나?”

“어렸을 때 일은 기억이 나질 않아. 내가 기억하는 건 이 탑에서의 일 뿐이야.”

앨런은 말하면서 쓸쓸한 얼굴로 계단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댄은 동정심을 느꼈다. 어쩌면 그녀를 올려 보내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자신도 올라가야 하지 않나. 그때 데려가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댄의 마음속의 회의적인 부분은 그리 낙천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동정심을 느꼈을 때 어떻게 되었던가? 그런 일을 겪고도 네가 감히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믿는가? 바깥에 대한 환상만을 위안으로 살고 있는 이 가엾은 소녀, 언젠가는 저곳으로 가리라는 희망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소녀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굴어야 하는가? 그녀가 가진 유일한 것마저 빼앗아야 하는가? 본인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가장 행복한 것일 지도 모른다.

“앨런, 만약 네가 저 위로 나가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아마 좋겠지.”

“그런 애매한 대답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봐.”

“진지하게?”

앨런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거스러미를 잡아 뜯었다.

“조금 무섭기는 해. 가본 적 없는 곳이니까. 그래도.......”

앨런의 말은 계단 쪽에서 난 큰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쇠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 화살이 쏘아지는 소리 뭔가 거대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도 차례로 들려왔다.

한동안 계단 쪽을 쳐다보다가 앨런을 돌아봤다. 앨런은 댄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계단에서 멀리 떨어진 모서리에 붙어서 겁에 질려 떨면서도 계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

앨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긴장해서 못들은 것 같기도 했다. 긴장은 댄에게도 전염되어 그 또한 아픈 몸을 일으켜 서서 계단을 노려봤다. 그는 셔츠를 다시 입고, 앨런의 눈치를 보면서 슬며시 자신의 검 쪽으로 다가가 주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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