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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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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96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05 15:00
조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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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기억 되살리기

DUMMY

오늘 아침에는 한가하게 호수를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원작가를 만나야 하니까.


집주인 유연한은 새벽까지 작업했는지 잠에 빠져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 나무토막처럼 누워있었다.

그의 그림에 깃들어 밤을 보냈으니 아무리 바빠도 감사 인사는 해야지. 축복의 인사를 마치고 나는 천장으로 솟아올랐다.


원대함은 아침 일찍부터 오후 2시 정도까지 일한다.

오후에는 다른 사람이 맡는데, 처음 편의점에 왔을 때 있던 여자가 늦은 저녁까지 자리를 지킨다.


조용한 편의점에서 원대함은 종이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시나리오나 희곡과 관련된 것이겠지?


‘허밍을 만든 프로젝트?’

단 한 줄을 쓰고 손이 멈추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이기에 재빨리 암시를 걸었다.

‘전설의 근원.’


반응이 없었다. 암시를 거는 즉시 그 단어가 생각날 텐데?

주술사가 암시를 보내면 사람들은 그 단어를 생각한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뜬금없이 지나가는 단어가 된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너무 진부해.”


‘진부하다고? 소설을 생각해내야죠. 당신이 쓴 소설이에요.’

애타게 소리쳤지만, 그는 멀뚱멀뚱 빈 종이만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다른 단어를 내보냈다.

‘이중인.’


“이중인이라···. 사람 이름 같잖아?”

그는 한숨을 내쉬며 ‘프로젝트 No.375’라고 썼다. 다음 순간, 그 위에 죽죽 선을 그었다.

“뭐 좋은 거 없을까?”


이중인을 기억 못 한다니. 자신이 만든 이름인데···. 그렇다면 또 다른 단어를 꺼내야지.

‘내가 거기 있다.’


“내가 거기 있다?”

원대함이 으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미스터리야? 납량특집으로 어울리겠네.”

그는 주머니에서 다른 수첩을 꺼내 그 문구를 적어넣었다.


편의점으로 손님이 들어오자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암시를 걸어도 먹히지 않았다.


주변을 맴돌며 허공에서 몸을 굴리고, 뛰어오르고, 소리쳤지만 그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세계를 생각해낼까?’


이토록 깨끗하게 잊을 줄은 생각 못 했다. 분명 작가가 맞는데.


‘최면을 걸 수도 없고···.’

최면을 걸거나 그의 몸을 조종해서 글을 쓸 수는 없었다.


그것은 파견의 주술을 거역하는 술법이므로, 그 순간 우리 세계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나와 함께 나온 고충만과 금은비까지.

쓰는 이의 자유의지가 있어야 했다. 작가가 바뀌는 한이 있어도.


물끄러미 원대함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그를 보니 그저 암담했다.

몸이 있으면 애원하고 매달릴 텐데. 이대로는 말을 건넬 수도 없으니.


‘무슨 방법이 없을까?’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막막했다.


은서가 보여준 문장이 떠올랐다.

‘소설을 꼼꼼히 읽을 것. 작가에 대한 힌트가 있을 거야.’


소설을 처음부터 자세히 읽어야겠어.

상상계에 태어날 정도로 애환과 갈망이 녹아들었다면 작가의 마음을 움직일 무언가가 있겠지. 단어라든가, 문장이나 아니면 이름이라도.


*


나주연은 일하러 나갔는지 집에 없었다.


스프링 책은 침대 밑에 그대로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상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기억을 되살릴 단서를 찾아야 해. 행간의 숨은 뜻이라고 했던가?’


이중인의 소설은 차원침입군의 공격에서 시작한다.


살랑 대장이 이끄는 차원침입군은 경계를 넘어 우리 차원을 공격했다. 차원관리자들이 목숨을 잃자 대기가 흔들리고 땅이 흐물거렸다.


그 뒤틀린 흐름이 열린 연합의 모든 구역에 미쳤다.

연합 대표 기루다가 차원침입군에 대항할 용사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 명령은 곧 달빛사원으로 들어갔다.


달빛사원의 원장 이단주와 바람의 사원 원장 육미호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상대의 사원을 빼앗아 유일한 제사장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했다.


기루다는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단주 원장에게 먼저 연락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람의 사원까지 가려면 나말뫼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보다는 미늘 호수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달빛사원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손을 쓰기 쉬울 것이니.


기루다는 자신의 군대를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용사를 찾으라고 했고, 차원관리자를 대신할 주술사도 함께 보내라고 했다. 눈엣가시인 구하라를 멀리 보내려는 속셈이었다.


구하라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의 별이 지켜준 아이로 오미재 시장 단주의 딸이면서 타고난 주술사였다. 미모와 성격, 능력까지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루다 대표의 자리를 빼앗으리라.


차오름은 달빛사원의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는 열아홉의 청년이었다.

조용하고 성실한 청년으로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열 살 무렵 병으로 죽었다. 열네 살 때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재혼하면서 친척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친척도 그다지 풍족한 집안이 아니었다. 그들은 먹고 자는 조건으로 차오름을 사원에 맡겼다. 다행히 사원에서는 약간의 품삯도 챙겨주었다.


차오름과 구하라는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가게 일꾼과 주술사이기에 쉽게 가까워지지 못했다. 더구나 구하라는 단주의 딸이며 예언의 아이가 아닌가.


이단주 원장은 기도하는 중에 용사의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에 딱 들어맞는 차오름을 추천했다.


그가 받은 신탁은 차오름이 다섯 개의 전설의 무기를 찾아내고, 그와 함께 할 동료 세 명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섯 명이 함께 하면 차원침입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빛의 검이 차오름의 것, 물의 방패가 구하라의 것이고, 나머지 흙의 곤봉, 바람의 창, 불의 화살은 무기와 주인을 함께 찾아야 했다.


소설의 한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


마른 협곡으로 들어서자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흙이 뒤섞이며 시야를 가렸다.


차오름은 구하라의 앞에 서서 먼지바람을 가려주었다.

“빛의 검이 여기 있는 것 맞지?”

“응. 여기서 신호가 나와.”


“빛의 검은 우리의 첫 번째 무기가 될 거야.”

“다른 전설의 무기도, 동료도 모두 찾을 수 있어. 너와 내가 함께 있으니까.”

구하라는 햇빛에 그은 차오름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쿠궁!

어디선가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협곡을 따라 천둥처럼 메아리쳤다.


“조심해!”

구하라가 소리쳤다.

그녀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흙먼지가 엷어지며 눈앞이 잠시 밝아졌다.


절벽의 바위가 투두둑 떨어지며 거인이 되었다. 하나둘 나타난 바위 인간은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차오름은 그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


‘차오름이 이렇게 힘들게 전설의 무기를 얻었구나.’

구르고, 떨어지고, 찔리고, 베이고, 끝없이 상처를 입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눈물이 솟아나왔다.


그 당시 달빛사원에서 내가 받은 소식은 하나였다.

‘용사가 첫 번째 무기를 찾았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냥 찾은 줄 알았다. 땅에 떨어진 돌멩이를 줍듯, 서가 사이에 꽂힌 책을 꺼내듯.


밖에서 보니 알 수 있었다.

우리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해할 수 없던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차오름은 어머니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오히려 혼자 남겨진 나를 걱정해주었다. 언제나 씩씩하게 웃던 그의 모습이 더욱 안쓰러웠다.


주인공 두 명은 험난한 싸움 끝에 빛의 검과 물의 방패를 찾았다. 들판을 지나 오두막을 향해 가는 장면이 지금까지 쓰인 내용이었다.


‘기다려. 차오름. 작가가 소설을 이어가게 할게. 반드시.’

끝내야 새로 시작할 수 있어. 적어도 차오름이 진짜 자기 삶을 살도록 해줘야 해.


눈물을 많이 흘려서인지 어지러웠다. 가슴이 너무 아파 얼얼했다.

나는 스프링 책을 덮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상자 속에 짙푸른 표지의 두툼한 책이 보였다.

‘숨은고등학교 졸업 기념?’


두꺼운 표지의 책은 온통 사진이었다. 어린 학생들의 얼굴이 빼곡히 채워졌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구경하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겼다.

‘응? 이건···.’


한쪽 면에는 원대함의 이름이, 바로 옆면에는 나주연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앳된 모습이어서 얼굴은 바로 알아볼 수 없지만 이름은 똑똑히 보였다.


두 사람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지금의 모습도 어느 정도 녹아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거···, 완전히 차오름과 구하라잖아?’


숨이 턱 막혔다. 뒤통수가 얼얼하더니 손이 떨렸다.

‘그러니까···, 원대함과 나주연이 같은 반이었어?’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고?

가까운 동네에 살긴 해도 연락하지 않던데? 만난 적도 없고.

그보다···, 그는 왜 나주연을 구하라의 모델로 삼았을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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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작별 인사 22.10.20 29 1 12쪽
39 집필 22.10.20 33 1 10쪽
38 결심 22.10.20 31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1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2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5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8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30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30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30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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