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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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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54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9 10:51
조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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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0쪽

그믐밤의 손님

DUMMY

구원자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없이 밤이 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믐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타게 기다려본들 메시지가 다시 들릴 리 없었다.


‘그믐밤? 그믐···. 은서님이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달빛사원에서는 거의 모든 의례를 보름에 했다. 여기서는 그믐에도 뭔가를 하는구나 의아해했는데···. 그게 뭐였더라?


놀이터 한쪽에서는 야문과 가디록이 그네를 타고 푸르니가 뒤에 서서 그네를 밀어주었다. 이귀들도 정글짐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혹시 저들 중에 구원자가 있나?’

설마 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혹시나로 생각이 바뀌어 갔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놀이터 입구에서 커다란 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삽살개를 알아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사람보다 큰 삽살개?’


삽살개의 등에는 거대한 참새가 앉아있었다. 이거 뭐야? 꿈이야?

개는 가만히 서 있는데, 컹컹 소리가 귀에 울렸다.


나는 미끄럼틀 위에서 내려와 가까이 있는 이귀에게 물었다.

“삽살개가 있어. 여긴 웬일이지?”


어린 이귀가 두리번거렸다.

“개요? 무슨 개? 아무것도 없는데?”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며 삐죽거렸다.

“심지아님, 그런 장난하지 마세요. 무서워요.”


저렇게 커다란 개가 안 보인단 말이야?

‘아! 나한테만 보이는구나.’


서둘러 삽살개에게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가니 삽살개는 꼬리를 흔들며 뒤돌아섰다.

사뿐히 걸음을 내디디며 나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라는 거구나.’

나는 휘적휘적 바람을 타고 삽살개와 거대한 참새를 따라갔다.


*


파라다이스 빌라 옥상으로 올라선 순간, 눈앞의 세상이 달라졌다.


그곳은 하람언덕이었다. 우울할 때마다 찾아가던 곳, 미늘호수가 내려다보이고 멀리 보예강이 보이는 자리였다.

언덕 아래로 달빛사원의 지붕이 내려다보였다.


“여긴···.”

“왔어? 그믐밤의 손님이 된 걸 환영해.”

은서가 내 팔을 붙잡았다. 팔에 닿는 손의 느낌이 평소와 달랐다.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진짜 내 몸이었다. 사념체나 유령이 아닌 진짜 몸.

‘내 몸이 돌아왔어!’


우리 세계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였다.

달둥지 수련원의 주술사 옷이었다. 나래 단계가 되어야 입을 수 있는 연노랑 예복과 망토.


겨우 열다섯째 날인데 까마득히 오래전 일 같았다.

나는 망토 자락을 붙잡고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왔어요? 심지아 주술사님?”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탱탱한 피부가 뽀얗게 빛나는 여인이었다.


파라다이스 빌라 1층의 소품샵에서 본 기억이 났다. ‘달숲의 작은 천사’라는 소품샵인데, 간판이 특이해서 기억한다.

‘길 잃은 물건이 새 주인을 찾습니다. 진짜 주인이 되어주세요.’


돌아보니 언덕배기 넓적한 바위 위에 식탁이 차려졌다. 은서와 소품샵 주인이 접시를 내려놓고 내게 손짓했다.

“어서 와요. 일생에 한 번뿐인 그믐의 밤을 즐겨야죠.”


언덕 위로 바우가 올라왔다. 갤럭시 공연을 두 번이나 봤으니 금방 알아보았다. 그 뒤를 따라 한 남자가 올라왔는데, 어딘지 신비로웠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반듯한 편이나 분위기가 남달랐다. 한눈에 다른 세계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바우보다 훨씬 더 먼 세계의 기운이었다.


“이쪽은 달숲 천사, 이쪽은 미루안 문지기.”

은서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름을 말하지 않고 별명으로 얘기하는 자리인가보다. 그것도 재미있지.


미루안은 파라다이스 빌라 1층에 있는 카페 이름이었다. 여기 온 첫날 싱그러운 숲의 기운에 끌려 신기하게 바라보던 바로 그 카페.

지나갈 때마다 초록 숲을 느끼며 잠깐씩 멈췄는데, 주인에게서 나오는 기운이었구나.


“이름은 금방 잊어도 별명은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달숲 천사가 방긋거리며 웃었다.


“천사님, 문지기님. 반갑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여기서는 저도 몸을 가질 수 있네요.”

“파라다이스 빌라니까.”

은서가 과일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파라다이스 빌리니까?’

그녀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빌라에는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자가 많다고.

이 사람들이 능력자인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분위기가 신비롭긴 하지만.


접시에서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빵이 들어 올려졌다.

너무 신기해서 빵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과일도 집어 들었다. 여기서는 나도 사람처럼 움직이는구나.


우리 세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감격스러웠다. 미늘호수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울컥 목이 메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황해서 손등으로 닦으려는데 달숲 천사가 냅킨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죠?”

그녀의 말에 가둬놓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저, 저는···.”

참지 못하고 흑흑 소리 내며 울었다. 민망하면서도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물도 마르고 울렁이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네 사람은 호수를 내려다보며 나를 기다려주었다.


“하람언덕이 참 아름다운 곳이네요.”

미루안 문지기가 호수와 언덕을 둘러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울림이 컸다. 멀리 나가는 물결 같았다.


“심지아의 기억이 아름다워서일 거예요. 가장 좋아하는 장소니까.”

은서가 대답하면서 내게 음료를 건넸다.

붉은빛이 연하게 도는 음료에서는 꽃향기 같기도, 차향 같기도 한 풋풋한 향기가 올라왔다.


“참, 파견의 주술에 제약이 걸려있죠?”

달숲 천사가 묻자 이번에도 은서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쪽 세계에서 인연을 쌓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소설 완성되면 심지아가 어떻게 돌아가죠?”

바우가 문지기를 바라보았다.


“파견의 주술로 나온 사람이 돌아가려면···. 작가가 소설에 다시 넣어줘야죠.”

미루안 문지기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 나는 눈을 껌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파견의 주술은 성공하지 못했어요. 이쪽 세계에서는 사념체가 되니 작가를 찾을 수도, 설득할 수도 없으니까요.”

문지기가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그 주술을 믿는 건, 그즈음 작가가 소설을 이어 쓰는 경우가 많아서예요. 그런 영역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영역은 소멸했으니 증언할 사람도 없죠.”


“마치 기우제 같네요.”

달숲 천사가 내게 쿠키를 건네며 대꾸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면서 기우제 덕분에 비가 내렸다고 믿는 거요.”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달숲 천사와 미루안 문지기가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들의 눈빛에서도 꿀이 뚝뚝 떨어졌다.

저들도 바우와 은서 못지않은 사랑꾼들이구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자 미루안 문지기가 나를 향해 똑바로 앉았다.

“심지아님, 소원이 있어요?”

“예? 소원이요?”

다른 세 사람의 눈이 모두 내게로 쏠렸다.


소원. 내가 지금 가진 유일한 소원.

‘소설이 완성되어 우리 세계가 살아남는 것. 그래서 차오름이 자유로워지는 것.’


“소원 하나를 이룰 수 있어. 여기는 파라다이스 빌라이고, 너는 그믐밤의 손님이니까.”

은서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실증계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상상계의 어느 영역보다도 신기한 곳이었다.


“소설이 완성되는 거요.”

나는 어렵게 결단을 내렸다.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이미 제약을 어겨서 못 돌아갈 텐데.”

문지기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어떤 협박보다도 무서웠다.


“그것도 제 운명이겠죠. 파견의 주술에 응했을 때 이미 알고 있었어요.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나는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차오름을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달숲 천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 사람은 어떻게 차오름을 알지?


그제야 깨달았다. 이들은 실증계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구나.

천사와 문지기.


“잊을 수 없어요. 잊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차오름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내 소원은 소설이 완성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차오름이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진짜 소원이었다.


내 대답을 듣더니 달숲 천사가 문지기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지만, 문지기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소원이 뭐라고 했죠?”

“소설이 완성되어 차오름이 행복해지는 거요,”


“차오름이 행복해지는 것.”

미루안 문지기가 내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는 다른 소소한 일상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빌라 옥상에서 내려올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미늘호수를 바라보았다. 물결 하나까지 마음에 새기려 애쓰면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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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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