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60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9 10:51
조회
36
추천
1
글자
10쪽

내가 거기 있다

DUMMY

이틀 동안 원대함과 시나리오를 지켜보면서, 확신을 가졌다.

‘그동안 워낙 많이 고쳐서 바뀐 것을 깨닫지 못한다.’


대사 한 줄이 달라진 정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피소드의 순서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다. 결말까지 무리없이 이어지기만 하면 된다.


너무 많은 생각과 정성을 쏟아부은 탓이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우리 세계가 생겨났을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순수했을 테니.”


시나리오만 계속 들여다보려니 지루해졌다. 원대함의 방을 둘러보았다.


편의점에서 일할 시간이니 그는 오전 내내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내가 여유 있게 시나리오를 읽으며 손볼 수 있다는 말이지.


책상 위에 그의 어머니, 최소희와 찍은 사진이 보였다. 그 옆에 현재안과 찍은 사진,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나주연의 사진도 있었다.

물론, 그녀의 사진은 맨 뒤에 숨어있지만.


“흐음. 그래서 차오름이 어머니에게 버림받았구나.”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느라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지.


원대함이 소설을 쓴 것은 십 년 전. 그때도 최소희 여사는 재혼을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지금의 지남철은 아닐 거다. 그들이 만나서 결혼한 건 몇 년 안 되었으니까.


사진에 바짝 다가가 그녀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차오름의 어머니가 어딘가 살고 있다면 이 모습과 비슷하겠지.


현재안의 사진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도달이 아저씨와 이렇게 똑같은데 못 알아보았다니.


전설의 근원을 생각하니 울컥 뜨거운 것이 가슴으로 치밀었다. 다행히 원작가의 방에는 그리움을 달랠 방법이 있다.


나는 옷장 서랍에서 스프링 책과 노트 상자를 꺼냈다. 내가 아는 이야기가 책에 있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노트 상자에 담겨 있었다.


주인공은 수많은 시련을 겪고, 마지막 전투를 치르며 승리에 이른다. 차원침입군과 맞서 세상을 구해낸다.

뻔한 결말이지만, 그곳에 다다르기까지 거쳐야 할 단계가 많았다. 어떤 시련을 어떻게 이기느냐는 작가가 고민할 몫이겠지.


나는 여러 장의 메모를 뒤적이며 차오름이 만날 동료를 찾았다.

‘소설은 오두막이 보이는 길에서 멈췄어. 그 오두막에 동료가 있을 거야. 그와 만나는 장면에서 다시 시작하겠지?’


첫 번째 동료의 이름은 ‘정상인’이었다. 현무족, 23세.

떠돌이 악사인데, 소리와 운율로 대화도 하고, 적과 싸울 수 있었다. 마른 체형에 각진 얼굴, 좁은 어깨라서 언뜻 보면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정상인에 대한 설명을 읽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건 딱 노안타잖아? 이때도 아는 사이였구나.’


정상인은 오두막에서 유유자적 기타를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뒤 사원의 제사 음악을 담당한다는 설정이었다.

‘달빛사원의 의식을 함께 한단 말이지?’


달빛사원의 제단이 떠올랐다. 정갈하고 엄숙한 예식에 맞춰 노안타의 감미로운 연주가 흐른다면···. 더없이 경건할 것이다.


주술사들이 둘러서서 다 함께 주문을 외우고, 노래하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거기 나도 같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 번째 만나는 동료는 ‘호야’라는 여자였다. 백호족 19세.

“호야? 호야가 누구야?”


내 궁금증에 노트 뒷면에 붙은 사진이 답해주었다. 빛바랜 사진은 열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눈이 크고 예뻤다. 그 당시 좋아하던 연예인인가? 이름을 그대로 썼구나. 지금은 이 사람도 서른이 넘었을 것이다.


호야는 무술을 잘한다. 성격이 호탕하고, 노래를 잘한다고 되어 있다. 정상인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고.

‘아. 호야가 가수였구나.’


세 번째 동료는 이름이 없었다. 그냥 ‘동료3’이었다. 마땅한 이름이 없어 고민하다 말았구나.

이름만 없을 뿐, 간단한 설정은 있었다.

‘날렵하고, 까칠하며, 말이 별로 없다. 의리파. 청룡족, 22세.’


동료3에 딱 어울리는 존재를 알고 있다. 나는 메모에 이름 하나를 써넣었다.

‘가디록.’

“작가를 찾으면 이 이름으로 해달라고 해야지. 가디록이 엄청 좋아하겠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어제 콘서트 리허설에서 메시지가 들리지 않았던가. 전설의 근원을 구할 구원자가 있다고.

분명 그를 찾을 테니, 이름 하나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차오름도 마법을 조금 배웠다. 아지트 동굴에서 내가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불을 피우는 것, 식물에게 길을 묻는 것, 바람을 보는 방법 같은 것.

‘차오름이 마법을 쓰는 장면도 넣어달라고 해야지.’


나는 메모를 읽으며 괴물의 설정에도 몇 글자를 덧붙였다.

괴물의 특징만 쓰여 있고, 처리 방법은 허술했다. 그냥 물리친다, 죽인다. 없애 버린다가 전부였다.


전설의 무기를 지키는 괴물이니까, 좀 더 강력한 힘을 가졌을 것이다. 괴물을 처리하는 방법도 덧붙였다.

차오름이 힘들겠지만, 소설은 소설이니까.


결말까지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또렷하고, 깔끔하게.

이것은 원대함이 써놓은 이야기이면서 우리 세계의 이야기였다.


나는 아이디어 노트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구원자만 찾으면 돼.”


*


유연한은 기대에 부풀어 좌석에 앉았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콘서트라니···.”

그는 쉬는 날도 거의 없고, 외출도 오랜만이라고 들떠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리허설을 봤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빈자리로 보일 것이다.


“안타노안타 노래 굉장히 좋아요. 발라드인데, 감성적이고, 맑아요. 깨끗한 산속 샘물을 마시는 것 같죠.”

“그룹 갤럭시는 어때요?”

“갤럭시요? 그냥 그래요. 잘하기는 하는데, 중상 정도랄까?”

유연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프로그램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사람은 못 듣는구나.’

그들의 음악을 못 듣는다니, 몹시 안타까웠다. 한 소절만 들어도 눈이 다시 뜨일 텐데.


그래도 은서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사람이 못 들으니까 그들도 안전한 거야. 갤럭시 멤버들 모두 다른 세계에서 왔거든.’


그래서 나도 안전하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이쪽 세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고.


나는 오로지 갤럭시의 연주를 기다렸다. 그 메시지가 다시 들릴 것이다.

‘이번에는 구원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내야지.’


갤럭시가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눈을 감고 그들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서인지 환영이 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는 두 번째 곡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는데.


미늘 호수와 달빛사원이 보였다.

원장실에 모여 앉은 다섯 명의 원로가 보였다. 파견의 주술을 위해 불려갔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단주 원장과 살랑 대장은 말없이 앉아있고, 해묵은 예언자는 카드를 매만졌다. 그는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카드를 만지지 않으면, 주사위나 호두열매라도 만지작거렸다.


기루다 대표와 육미호 원장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음악이 보여주는 환영 속에서도 그 둘은 소곤거리며 둘만의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꿈을 꾸듯 나는 오미재 시장과 어울림 광장 위를 날아갔다. 나말뫼산을 넘어 바람의 사원도 보였다.


차오름이 용사가 되어 넘어간 알벗계곡을 지나 황무지로 향했다. 곧 차오름이 보이겠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음 환영을 기다렸다.


그러나 황무지 위에서 음악이 끊어졌다. 첫 번째 곡이 끝난 것이다.

그들의 연주는 단 두 곡. 두 번째는 첫 곡에 비해 짧은 곡이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번째 곡은 미늘호수와 보예강을 보여주었다. 보예강을 따라 이어진 작은 마을이 보였다.

‘보예강은 황무지와 반대 방향인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환영은 보예강과 바다가 맞닿는 곳으로 달려갔다. 분명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허만 남았다.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집이 무너질 정도면 엄청난 재난이 일어난 건데,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바닷가 마을이 펼쳐졌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증발하고 있었다.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집도 무너졌다. 잠시 후에는 무너진 집조차 흔적이 남지 않았다.


‘안 돼! 우리 세계가 사라지고 있잖아! 멈춰!’

소리 질렀지만, 목이 콱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빨리 구원자를! 구원자를 찾아야 해. 그 사람이 누구야? 대체 어디 있어?’

발을 동동 굴렀다.


음악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는 알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


‘내가 알고 있다고?’

내 주변에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스쳐 간 사람 중의 누군가?


‘전설의 근원, 내가 거기 있다.’

그건 소설 제목이랑 부제목이고.

스프링 책 표지에 큼지막하게 쓰인 문구. 그것이 뭐?


내가 다시 물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환영도 나타나지 않았다.

두 번째 곡마저 끝나 버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그래서 현실입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심지아는 상상계로 잘 돌아갔어요 23.08.21 26 0 -
공지 파라다이스 빌라가 기다립니다 22.10.22 49 0 -
47 그리고 4 -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22.10.22 34 1 11쪽
46 그리고 3 - 기다려, 차오름 22.10.22 28 1 10쪽
45 그리고 2 - '나'라는 무대 22.10.22 29 1 12쪽
44 그리고 1 - 장미의 계절 22.10.22 28 1 11쪽
43 다시 만난 친구들 22.10.21 52 1 12쪽
42 일곱 밤이 지나고 22.10.21 32 1 8쪽
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