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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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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65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3 10:31
조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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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그의 것은 그에게로

DUMMY

게슴츠레 눈을 뜨고 나주연의 방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흐린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도 나른했다.


그녀는 토스트와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태블릿에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미늘호수와 보예강의 물소리처럼 맑고 부드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힘을 모았다. 나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 이번에는 암시가 성공하기를.

‘책은 원대함의 것. 가져다줘야지.’


나주연이 빈 그릇을 개수대에 내려놓았다. 손을 털고 침대로 몸을 틀었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그녀는 침대 아래 상자를 하나씩 꺼냈다. 마침내 스프링 책을 찾아냈다.



“이거 혹시 중소함이 쓴 거 아냐? 어쩐지 주인공이 구하라인 것부터 수상했어.”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책을 말아 쥐고 침대 모서리를 두드렸다.

“이런 소설을 쓸 사람이 그 녀석밖에 더 있어?”


그녀는 책을 탁자에 올려놓고 팔짱을 꼈다. 물끄러미 책을 내려다보았다.

“차오름이 어딘지 익숙하더라니···. 소설에서라도 제대로 살고 싶었나 보지?”


나주연은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글자를 훑었다.

“신기하네. 이게 어떻게 거기 있었지?”


이상한 것 없는데. 우리 세계가 살아있으니 여기서도 뿌리가 살아남으려는 거지.

나의 정성이 통했는지, 귀찮아진 것인지, 무엇이든 괜찮다. 그녀가 결심해주어서 고마웠다.


*


가방에 스프링 책을 넣었다는 건,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른다는 뜻이다. 그럼 당연히 따라가야지.

그녀를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빌라 출입문을 나섰다.


맛집 식당의 안주인이 주차장 한쪽에서 배추를 다듬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고 체격이 조그마한 할머니였다.

이른 시각이라 주차장은 비어있었다. 승용차 세 대를 세우기에는 빠듯하지만, 혼자 배추를 다듬기에는 드넓은 공간이었다.


그녀는 나주연을 보더니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겉저리 만드시게요?”

나주연이 다가가자 할머니는 무릎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주연씨 만나려고 했는데.”

“저를요?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은. 아는 사람이 부탁해서 말이야. 그 집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여태 여자가 없다네. 아주 속을 태우더라고.”


나주연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이, 그런 거 안 해요. 사람 만날 생각 없어요.”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자 할머니가 한 걸음 따라왔다.

“그러지 말고. 아주 참한 총각이야. 그 뭐냐? 요즘은 동네 친구 만든다며? 그런 거로 시작하면 되지.”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글쎄, 삼 층 새댁도 아는 사람이래. 후배라던가? 하여간, 세상 참 좁아. 내가 아는 사람을 새댁도 안다니.”


할머니가 쉽게 놔줄 것 같지 않았다.

그동안 두 사람은 꽤 친해 보였다. 따로 반찬도 챙겨주고, 마치 진짜 이모처럼 보였다.


나주연은 맛집식당 단골이었다. 저녁을 먹고 무슨 수첩에 쓰기에 이상했는데, 어제 알아냈다. 단골이라서 장부를 만들어 한 번에 계산한단다.


“남편이 음악해서 그런가, 참 고와. 새댁도 그 총각 칭찬하더라고. 아주 괜찮다고.”

할머니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 나주연은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발을 까딱이며 시선을 거리로 돌렸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입안으로 달싹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왜 아직 혼자래?’

입속의 말은 다행히 내게만 들렸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요. 지금은 제가 좀 바빠서. 여하튼, 인연이 있으면 만나지겠죠.”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성큼성큼 거리로 나섰다.


*


예상한 대로 원대함은 나주연을 보자 몹시 반가워했다.

“연아!”


나주연은 감정이라고는 들어있지 않은 딱딱하고 냉정한 태도로 계산대로 다가갔다.

“볼일이 있어서.”


“지난번에는 모른 척하더니?”

원대함은 바보처럼 싱글벙글 웃었다.


나주연이 말없이 가방에서 스프링 책을 꺼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책을 든 손도 떨렸다.

“이거···, 이거 네가 갖고 있었어?”


“입주 청소하다가 주웠어. 같이 청소하던 친구가 네 것이라고 해서.”

“내 거 맞아.”

책을 쓰다듬는 그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그 정도로 감동했다면 소설을 이어서 쓰겠지?

지금 당장 쓰라고 조르고 싶지만,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는 주어야지.


“그 친구는 어떻게 알았대?”

“그건 모르겠고. 그 말을 들으니까 갖고 있기 껄끄러워서.”

“왜? 지금까지 갖고 있었잖아?”


“몰랐을 때는 그랬지. 알면서도 방에 두기 싫어. 버리자니 찝찝해서 갖고 왔어.”

나주연이 말할 때마다 겨울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럼 안 되는데. 우리 세계를 살릴 작가님이라. 무엇보다 소설을 이어 쓰겠다는 결심이 필요한 이런 중대한 순간에.


나주연은 문을 향해 돌아섰다가 다시 발끝을 돌렸다.

“소설 완성해보지. 재미있던데.”


“그래? 좋았어?”

“좋다고는 안 했어.”

나주연의 말에 원대함은 한숨을 내쉬며 쓸쓸하게 웃었다.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야. 십 년 전 내가 아니거든.”

“또 도망가려고?”

“어?”

원대함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거 아니야. 나한테는 시나리오가 더 맞아. 소설은 묘사를 잘해야 하는데, 난 못하거든.”

“그래서 시나리오는 잘 쓰고?”

“하하.”

원대함의 얼굴이 붉어졌다.


“열심···, 열심히 하고 있어. 어차피 떨어지겠지만.”

“넌 늘 그랬어. 쓸데없는 자기 비하에···.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나주연이 눈을 흘기자 원대함은 움찔하며 몸이 굳었다.


나주연이 돌아서자 그는 계산대 바깥으로 나왔다. 문 앞에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연아, 나 극단에서도 일해. 이번에 직장인반 생겼거든.”


그는 손을 떨며 주머니에서 쪽지를 집어 들었다.

“너 연극 동아리 했잖아? 관심 있으면 와.”

“거기서 넌 뭐 하는데?”

“그, 그냥. 별거 없어.”


그의 말에 나주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을 따라 원대함의 어깨도 축축 처졌다.

그녀는 가로채듯 쪽지를 받아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원대함은 이내 싱글거리며 책을 쓰다듬었다.

“이걸 연이가 갖고 있었단 말이지?”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가슴에 책을 얹었다. 책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요!’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게 들리지 않겠지만,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 중요한 건 소설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뭐? 소설을 안 쓴다고?


*


계속 암시를 주어도 그는 듣지 않았다.

소극장까지 따라다니며 차오름과 구하라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는 헤벌쭉 웃기만 하고 암시를 받지 않았다.


‘지친다, 지쳐.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 이 고집불통!’

하루치 마법력을 다 써버리고 축 늘어져서 소극장 안을 떠다녔다.


호숫가 오두막에서 자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호수와 언덕의 정기를 받아 회복이 빨랐다. 다음날까지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이제는 기력이 완전히 빠져나가 손을 들어 올리기도 힘들었다.


그렇지만 선명해에게 암시는 걸 수 있었다.

로비에 있는 화초를 살피고 제때 물을 주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내 부탁을 잘 받아들였다.

그렇지, 암시를 걸면 저렇게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


선명해를 따라 떠다니다 어느새 사무실까지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원대함이 머리를 싸매고 앉아있었다.

또 글 쓰다가 막혔군. 얼마나 쫓아다녔는지 그의 버릇이 눈에 익을 정도였다.


그를 보자 선명해는 싱글거리며 문을 닫았다.

“원작가, 커피 마실래? 내가 타 줄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녀는 주전자가 있는 구석이 아니라 원대함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대함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커피 떨어졌는데?”

“아, 그렇지. 그래도 녹차는 있어.”

선명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은 어떻게 해결해? 챙겨 먹기 힘들지?”

“편의점에서 일하니까 그런 걱정 없어.”

“맞다, 편의점에서 일한다고 했지? 혹시 거기 사람 안 뽑아? 나도 알바 찾고 있거든.”


원대함이 눈을 껌뻑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카페 문 닫았다고 했지? 사장님한테 물어볼게. 알바 하나가 빠져서 너무 힘들다고 하셨는데, 어떤지 모르겠네.”

“꼭 알아봐 줘.”


선명해는 눈웃음을 지으며 머그잔에 녹차 티백을 담아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쪽 세계로 들어오고 셋째 날이었나. 놀이터에서 극단 사람들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원대함의 시나리오가 당선되면, 그 덕에 선명해가 뜰지도 모른다고.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뜻이겠지?


‘뭐야? 원대함은 나주연을 좋아하는 거야, 선명해를 좋아하는 거야?’

나는 벽에 붙어서 원대함과 선명해를 내려다보았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한 명은 삼십 대 초반으로 짧은 파마머리에 통통한 체격의 여자였다. 눈도 크고, 입이 커서 시원시원해 보였다.


다른 한 명은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인데, 긴 생머리에 마른 체형이었다.

우리 세계의 차원침입군 살랑 대장과 머리카락 색깔과 성별만 다를 뿐 분위기가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어디서 봤는데?

어디였는지 금방 생각났다. 연극 ‘황혼의 이중창’ 리플렛에서 보았다.


짧은 파마머리의 여자는 종횡무진 나왔던 멀티로 이름이 간결희였다.

사기꾼, 옆집 여자, 구멍가게 주인, 그리고 뭔가 많이 나왔는데, 나올 때마다 머리모양도, 옷도 달랐다.

말투와 표정도 달랐다. 마지막에는 그게 조금씩 섞여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웃었지만.


호리호리한 여자는 오자유역을 맡은 사비야였다.


극중에서 오자유는 오래 살려면 젊은 사람 흉내를 내야 한다고 엉거주춤 힙합댄스를 배우다 다리를 다친다.


중매로 시집와 한 번도 연애를 못 했으니 지금이라도 자유연애를 하겠다고 남편 속을 썩이는 캐릭터였다. 극중의 어진리 할머니에게 첫사랑이 찾아오는데, 그걸 무척 부러워하는 역할이었다.


리플렛의 사진도, 실제 모습도 할머니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분장의 힘이 대단하구나.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다니. 재미있겠는데?


“이럴 줄 알았다. 대함이 있는 곳에 명해가 따라가지.”

간결희가 놀리듯 선명해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우, 언니. 아니에요.”

“나한테 그래봐라. 내가 예쁘게 봐줄게.”


“얘도 예쁜 나이는 지났지.”

긴 생머리의 여자가 원대함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았다.


“결희야, 나 지금 오자유스럽지 않아?”

“언니가 오자유스러우면, 전 어진리다워야겠네요.”

선명해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들의 농담을 들으며 원대함은 손을 멈추었다. 말없이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밤하늘이 흐리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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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유령 22.10.14 33 1 11쪽
»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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