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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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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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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7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22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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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그리고 2 - '나'라는 무대

DUMMY

공연이 사흘 앞으로 다가오니 몹시 긴장되었다. 다들 같은 마음인지 일찌감치 소극장 로비에 모였다.


저녁 도시락을 기다리며 화초들을 살펴보았다. 그사이 화분과 화초가 많이 늘어났다. 크고 작은 화분에서도 봄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오래전 목이 마르다고 했던 아이도 싱그러운 잎을 내밀고 있었다.


‘선명해가 잘 돌보고 있구나.’

어쩌면 그녀에게 타고난 재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극중에서 인도자를 맡은 직장인반 남자가 원대함에게 말을 걸었다.

“대함씨 시나리오, 우수상 받았다면서요? 그럼 바로 시나리오 의뢰가 들어오나요?”

“아직요. 대상이 아니라서 그런가···. 전혀 연락이 없네요. 무슨 상 받으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별거 없더라고요.”


원대함이 허허 웃음을 지었다.

“이틀 정도는 들떠있었는데, 그 기분도 며칠 안 가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어요.”


원대함이 어깨를 늘어뜨리는데 전화가 부르르 울렸다.

“예. 제가 원대함인데요?”


상대의 말이 잘 안 들리는지 그는 일어나 조용한 구석으로 갔다.

“이중인요? 아, 전설의 근원. 예. 그거 제 필명 맞아요. 예전에 쓰다 말았는 데요?”


이런. 어디서 온 전화인지는 몰라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플랫폼에 올리려면 메일주소와 전화번호가 있어야 해서 원대함의 것을 넣었는데, 진짜 전화가 올 줄이야.


“메일 확인 안했다고요? 아, 그 메일은 안 쓴지 오래 되서···. 전자책요? 그걸 왜?”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눈썹 사이에 힘을 주었다. 깊은 주름이 잡혔다.

“예. 일단 알았습니다. 예.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폰을 끄더니 사무실로 뛰어갔다. 나주연이 그의 팔을 잡았다.

“무슨 일인데?”

“내가 쓰던 소설. 전자책으로 만든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건 이런 때 쓰는 속담이겠지.

‘일부러 방문자가 적은 사이트에 올렸는데···.’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원대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가 범인을 알아차릴 리는 없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원대함은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글로삶 사이트에 들어가 ‘전설의 근원’을 입력했다.


“내가 쓰던 것 맞는데? 결말도 내가 생각한 그대로고···. 그런데 이건 나 아닌데?”

“무슨 말이야? 이중인 너 맞잖아?”

나주연이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이트야?”

“응. 처음 보는 페이지야.”

그래도 원대함은 로그인 창에 자신이 늘 사용하는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넣었다.


내가 이쪽 세계에 와서 며칠 만에 알아낸 바로 그 아이디. [email protected].

패스워드는 njy1023#.


그의 어깨너머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되고 있었다.

10월 23일은 나주연의 생일, 5월 7일은 원대함의 생일이다. 사념체였을 때 그것을 알아내고 얼마나 웃었던가.


나는 숨을 죽이고 화면만 지켜보았다.


“봐. 로그인되잖아. 네가 아니면 누가 올렸겠어?”

“이상하다. 메일 주소도 맞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조아용이 뛰어 들어왔다. 그는 원대함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

“그치? 너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야, 왜 내 이름은 안 넣었냐고.”


눈만 껌뻑이며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는 원대함을 뒤로 하고 나는 뒷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소설을 썼고, 누가 올렸는지.


*


은서를 만나기에는 아침의 만화방이 제격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하면서도 좋은 향기로 가득한.


오늘은 야문과 푸르니도 따라왔다. 책을 읽고 교양을 쌓겠다나.

그들은 책 사이를 헤매라고 내버려두고 은서와 나는 허브티를 한 잔씩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지새늬는 천옥에서 잘 지내고 있겠죠? 일찍 알았더라면 친구가 되어주는 건데···.”

“사흘 동안 친구가 되었다면서? 그 정도도 귀한 거야.”

“즐거워하기는 했죠.”

그래도 이 몸에 남은 기억과 감정은 지독한 외로움과 쓸쓸함이었다.


야문과 푸르니가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날아다니던 사념체가 걷는 흉내를 내니 신기해서 바라보았다.


은서가 그들을 불렀다.

“심지아가 떠나면 야문과 푸르니는 어떻게 할 거야? 여기 계속 남을 거야?”

“아직도 까마득한 먼일이라고요.”

푸르니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지새늬는 몸이 좋지 않아. 언제 쓰러질지 모르잖아?”

은서가 그들의 대답이 몹시 궁금한지 싱글거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이제는 쉽게 쓰러지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내가 들어간 후로 몸이 서서히 바뀌었다. 바람 빠진 풍선이 아니라 찰진 인절미라고나 할까.


“난 심지아를 따라 전설의 근원으로 가고 싶어요. 거기서 일자리도 얻고.”

야문이 심의의 긴 소매를 가지런히 무릎 위에 얹었다.


“나도. 아이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스승이 될 거야.”

“맞네. 난 서당을 차릴 거야.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푸르니가 야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동업하자고. 한쪽에서는 글공부, 한쪽에서는 무예.”

“그 옆에서 심지아가 주술과 마법을 가르치고.”

“그럼, 차오름은?”


“아, 용사님? 가게를 하나 내드리지. 기념품 가게는 그렇고, 잡화점? 만물상? 어때?”

“그거 좋지. 신세계 만물상! 하하하.”

야문과 푸르니는 자기들이 한 말이 웃긴지 배를 잡고 허리를 구부렸다.


“하하,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수비대장 출신의 만물상 주인!”

야문이 눈물을 찔끔거렸다.

사념체도 눈물을 흘리다니. 대기 중의 수분이 열일하는구나.


나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찻잔만 바라보았다.

“전설의 근원에는 어떻게 들어가고?”


은서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허리를 폈다.

“그때는 파라다이스 빌라로 와. 그믐의 손님이 되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니까. 심지아는 이미 소원을 썼기 때문에 할 수 없지만.”


야문이 손뼉을 쳤다.

“맞아요, 천사님과 선사님! 아니, 달숲 천사와 미루안 문지기라고 불러야죠.”

“그래요. 그런 방법이 있었죠. 그렇단 말이죠?”


푸르니는 턱을 긁으며 눈꼬리를 올렸다.

“일단 할 일을 마저 하고.”


푸르니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실험대상을 관찰하듯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물어도 대답도 안 하면서.


*


지새늬의 새어머니, 최소희 여사는 요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달빛사원 식당에서 일한 내 입맛이 까다로울 수도 있지만, 아마도 어린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일하느라 요리다운 요리를 해본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래도 나와 함께 요리할 때면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네가 이렇게 요리 잘하는 줄 몰랐어. 어쩜, 이렇게 솜씨가 좋니?”

최소희는 국물을 맛보며 활짝 웃었다.


“전에 만든 매운탕도 진짜 맛있던데, 어디서 배웠니?”

“그냥···, 맛을 상상하며 만드니까 되던데요.”


“아우, 갑자기 배 고프다.”

최소희는 대접에 국물과 약간의 건더기를 넣어서 맛을 보았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나갔다.


오랜만의 가족 식사여서 요리도 풍성하게 준비했다. 원대함과 지남철이 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그녀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렇게 둘이 마주앉을 때면 나는 그녀의 주름진 손을 잡고 마사지를 해 주었다. 손을 잡고 있으면 실감이 났다.

‘나도 어머니가 있어. 아버지도, 오빠도 있고. 이런 삶을 누려보다니···.’

이건 달빛사원으로 돌아가서도 얻을 수 없는 삶이었다.


“네가 약도 챙겨주고, 마사지도 해 주니까 참 좋구나.”

“엄마는 혈액순환이 잘 안 되니까, 몸을 따뜻하게 하면 좋아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저도 엄마가 생겨서 좋아요.”

내 말에 최소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동안 엄마가 생겨서 좋다는 말을 스무 번도 더 한 것 같은데, 그때마다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앞으로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 무뎌질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최소희와는 달리 지새늬의 아버지, 지남철과 대화를 트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강렬한 눈빛만큼이나 자아가 강한 사람이어서 웬만해서는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구나 막내딸을 어린아이로만 보기 때문에 아이 앞에서는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대체 진짜 지새늬와는 몇 마디나 말했을까.


그러나 달빛사원 주술사의 대화술에 당할 사람은 없다. 시간이 더 걸린다 뿐이지 인내와 끈기 앞에서 그도 약해지리라.


“라인 하나를 중단하면 많이 힘드시겠어요. 아빠는 돈보다 직원들 해고하는 게 마음 아프시죠?”

“그러게 말이다. 그 사업 시작할 때부터 일한 사람들인데···.”

“조금만 견디면 차차 나아질 거예요. 저는 아빠를 믿어요.”

나는 지남철에게 파이팅 소곤거리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녀석. 어린애가 아빠를 놀리다니.”

지남철이 껄껄 웃었다.


원대함은 무슨 일인지 심각한 얼굴로 꾸역꾸역 음식만 입에 넣었다. 맛있는 음식을 정말 맛없게도 먹는구나.

나와 눈이 마주쳤으나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이건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 신호인데.


과연 식사가 끝나고 지새늬의 방으로 원대함이 찾아왔다. 들어와서도 뜸을 들이며 여간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비밀 있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똥? 허!”

그제야 원대함은 의자에 앉았다.


“그 소설 다 읽었어. 전설의 근원 말이야. 너도 읽었지?”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가 아니야. 나보다 훨씬 잘 썼던데···. 어떻게 된 일일까?”

그게 궁금해서 왔구나.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으니, 그동안 시나리오와 희곡을 읽어준 내게 털어놓는 거겠지.


나는 간단한 암시를 걸었다.

“이중인은 오빠야. 다른 누가 아니라.”


그런데 원대함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너, 너 혹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똑바로 보았다.

“너 정말 지새늬 맞아?”


내가 멀뚱멀뚱 바라보자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캐묻지 않을게. 난 지금의 네가 좋거든. 진짜 동생 같아. 어떨 때는 누나 같기도 하고. 허 참! 귀신이 씌였나.”

그는 일어나서 방안을 어슬렁거렸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무슨 본론? 본론이 또 있어?


“이번에 시나리오 의뢰가 들어왔거든.”

“와, 진짜?”

나는 요란하게 손뼉을 쳤다.

이번에는 과장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기뻤다. 작가가 행복하면 우리 세계의 사람들도 행복해지니까.


“지금까지 생각한 건 이런 거야. 들어봐.”

원대함은 차근차근 아이디어를 풀어놓았다.


눈을 빛내며 스토리를 설명하는 그를 바라보니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는 우리 세계를 만들어낸 작가니까.


하지만, 글이 안 풀릴 때마다 찾아오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나도 심지아의 이름으로 소설을 써야 하는데, 원대함의 고민도 들어줘야 하니.


언젠가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희곡은 소설과 달라. 내 것인데, 나만의 것이 아니야. 여러 사람이 여러 상황에 맞춰 고치니까. 그게 싫다는 사람도 많지만, 난 좋아. 사람들의 숨이 깃들어 더 좋은 작품이 되어가는 것.’


‘합평하면서 퇴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독자는 좋은 작품을 읽을 권리가 있어. 작가가 넋두리나 자기 복제를 하지 않으려면 다른 눈이 필요하거든.’


원대함, 당신이 우리 세계를 만든 작가라서 다행이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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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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