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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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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69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6 10:56
조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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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8쪽

서글픈 빈 손

DUMMY

오전 10시의 짱짱 만화방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붙박이 현재안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만화방에서 은서 혼자 그릇을 달그락거렸다.

그녀는 커튼 뒤 주방에서 오늘치 양념을 준비하고 있었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려면 밑간을 잘해야 한다나.


“늘 오던 덩치 분은 안 오네요?”

“응. 안 나온 지 며칠 됐어. 친구가 생겼다나? 그쪽이 더 재미있대.”

“원대함 말고도 친구가 있었군요.”

“넌? 일은 잘돼가?”


나는 원작가의 태도와 어젯밤 푸르니와 상의한 일을 들려주었다. 만일을 대비해 예비 작가 목록을 만드는 일.

“그래서, 다른 작가를 찾으려고요.”


“여기서? 다른 작가를? 글쎄···.”

은서는 물 묻은 손을 수건에 닦고 커튼 밖으로 나갔다.


“유명한 작가는 네 얘기 들으려고도 안 할 거야. 잘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 원고 채우기도 바쁘거든. 그렇다고 작품을 제대로 끝낸 적 없는 사람도 곤란하지.”

계산대 아래 가방을 뒤적이고는 명함 몇 개를 내놓았다.


다른 영역에서 연수할 때도, 나주연의 방에서도 명함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괴상한 것은 처음이었다.

색깔도 검은색에서 짙푸른 색까지 다양하고, 글자 모양도 기괴했다. 손 글씨로 쓴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아예 작가 이름이 없이 소설 제목만 적힌 것도 있었다.


신기해서 명함을 뒤적거리니 은서가 피식 웃었다.

“판타지 모임에서 받은 거야. 언뜻 보면 개성 있는 것 같지만, 전화번호와 이메일 있는 것은 다 똑같아. 그게 명함의 역할이니까.”


명함을 건네면서도,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소설을 안 쓴다는 원대함만큼 다루기 어려울 거야. 대리 작가가 내용을 어떻게 바꿀지도 모르고. 그럼, 캐릭터가 완전히 바뀌는 건데···.”

은서가 볼펜으로 수첩을 톡톡 두드렸다.


“소설의 장르도, 결말도 전혀 달라지겠지.”

“최대한 원작가의 줄거리를 살릴 수 있는 작가는 없을까요?”


“후후, 네가 아직 작가를 몰라서 그래. 자기 세계에 빠져서 자신의 것이 최선이라고 믿어. 허긴, 그래야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지. 그들에겐 실수조차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이야.”


“그래도 뭐든 해봐야죠.”

“그것도 나쁘지 않네. 부딪혀봐야 다른 길도 보일 테니까.”


나는 망설이다 마음속에 묻어놓은 말을 꺼냈다. 푸르니의 말을 듣자마자 생각한 것이다.

“혹시 은서님이 써주시면 안 되나요?”

“내가?”

은서는 고개를 젖히고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차라리 네가 쓰는 게 낫겠다.”

은서는 찔끔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손을 휘둘렀다.


“또 모르지. 만약 전설의 근원이 괴기와 공포 장르로 바뀌기를 바란다면.”

“에?”

그건 절대 아니다. 사파이어 빛 아름다운 미늘호수를 검붉은 피로 물들인다니!


하람언덕과 오미재 시장에서 살인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고, 천옥으로 인도되지 못한 영혼이 떠돌며 사람을 괴롭히는 그런 내용이라면!


나는 두 손을 내저었다.

“아우,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게다가, 난 판타지 소설을 이어서 쓸 만한 능력이 안 돼. 보고 들은 것에 살을 붙이는 것뿐이니까. 실증계에서 진짜 일어나는 일인 줄 모르니까 사람들은 소설이라 부르는 거고.”


“작가를 찾을 때 그것도 봐야겠어요. 그 사람의 작품요.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사이트 알려줄게. 요즘은 전자책으로 많이 나오니까. 내 아이디로 로그인하면 볼 수 있어.”


은서가 계산대에 놓인 보조용 컴퓨터를 켰다.

“대리 작가라···.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그녀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나를 불렀다.

“그런데 원고료 줄 돈은 있어?”

“원고료요?”

“글을 부탁하려면 돈을 줘야지. 꽤 많이 필요할 텐데?”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돈 없으면 꿈도 꾸지 마. 글을 쓰게 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돈이니까.”

“그런···.”


은서가 걸레를 들고 일어섰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지금은 없지만, 나중에 주면 어떨까요?”

“판매 이익을 나눈다고? 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힘없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저작권과 수익을 모두 넘기는 조건이면 되려나?”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가능하다는 말이겠지.

“아무튼 해봐야죠. 지금은 우리 세계를 살리는 게 먼저예요.”


“어떻게 연락하려고?”

“유령이 되니까 전화로는 말할 수 있어요.”

“그래?”


은서는 손을 허리에 얹으며 나를 향해 삐딱하게 돌아섰다.

“괜찮겠어? 그렇게 또 다른 인연을 쌓는 거.”


가슴이 먹먹해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사의 경고가 떠올랐다. 이것도 경계를 건드리는 일인 걸까.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파견의 주술에 어떤 제약이 있는지 알아봤어?”

“아직···. 계속 날이 흐려서 연결이 안 돼요. 그래도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요.”


은서가 다시 걸레질을 시작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너야, 심지아. 만난 지 며칠 안 되지만, 네가 소멸할까 봐 안타까워.”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실증계에서 헤맬 때 내게 길을 알려준 사람,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아무 조건 없이 도와준 사람. 그녀가 너무나 고마웠다.


*


은서가 보여준 명함의 작가와 전화번호, 이메일은 모두 기억한다. 기억재생술로 무엇이든 한 번에 외울 수 있으니까.

‘우리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일이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어.’


작가는 몇 명 되지만, 대부분 실망이었다.

‘이건 안 돼. 싸움에서 시작해서 싸움으로 끝나잖아? 무슨 전투 장면 하나가 열 페이지를 넘어가?’


다른 작가의 소설로 들어갔다. 몇 회차 넘어가기도 전에 쓰읍 숨을 삼켰다.

‘뭐야? 욕구불만인가? 애정 행위 묘사가 이렇게 자극적이야?’

차오름과 구하라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는 없지. 무조건 패스.


황당하게 사건만 이어지고, 개연성도 없고, 흐지부지 끝나는 작품은 빼야지.

이건 뭐야? 빌런이었는데, 왜 갑자기 착해져?

등장인물이 왜 다 죽어? 그렇게 안 해도 재미있을 텐데.

복수를 다짐하던 조연 어디 갔어? 떡밥만 던지고 낚시는 안 해?


‘이 사람은 여기에 화를 푸나? 왜 이렇게 욕설이 많아? 아무리 악당을 묘사한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페이지를 훑느라 급격히 지쳐갔다. 책 읽는 일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문이 되다니.

이러다간 절대 못 찾겠어. 어느 정도 타협을 봐야 했다.


열어봤던 소설을 다시 둘러보며 두 사람을 추렸다.

“작가는 골랐으니···. 연락만 하면 되겠어.”


은서가 폰을 빌려주기로 했으니, 문자를 먼저 보내놓고 통화하면 된다.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다니까.


기분이 좋아지니 몸도 가뿐했다. 컴퓨터를 끄고 만화방을 둘러보다가 언뜻 벽시계가 보였다.


시계바늘이 5시를 지나고 있었다.

‘다섯 시 반···?’

오늘 이 시간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우왓! 나주연이 소개팅할 시간이잖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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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그리고 1 - 장미의 계절 22.10.22 2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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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일곱 밤이 지나고 22.10.21 32 1 8쪽
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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