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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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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55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21 10:26
조회
31
추천
1
글자
8쪽

일곱 밤이 지나고

DUMMY

오픈 시간의 짱짱 만화방은 여전히 한산했다. 은은하게 퍼지던 방향제 향기도 그대로였고, 종이 냄새도 똑같았다.


은서는 소파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거추장스러운 몸만큼 목소리도 어색하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내 것이 아닌 몸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직 서툴렀다.

거울을 볼 때마다 흠칫흠칫 놀란다. 이 새로운 몸과 환경에 언제쯤 적응하려나.


은서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손님을 대할 때와 똑같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어서 오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습이 바뀌어도 나를 알아볼까?


은서는 의아해하며 나를 보았다. 그녀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며 눈이 커졌다.

“너···, 너, 심지아?”


“쉿, 이제는 지새늬예요.”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사라져서 소멸한 줄 알았는데?”

“사라지다가 지새늬의 혼에 붙잡혔어요.”

“지새늬?”


“원대함 작가의 새 동생이요. 몇 번 빙의한 적 있거든요.”

“빙의가 가능한 몸이었구나.”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빙의하려면 그 혼과도 결이 맞아야지. 원래 주인은 떠났어?”

“예. 사흘 동안 함께 있었어요.”

“사흘이나 혼수상태였겠구나. 가족들이 걱정 많이 하셨겠네.”

은서가 쯧쯧 혀를 찼다.


*


빛 속으로 끌려가던 나는 누군가의 품에 던져졌다.

둥근 자루 같은 공간에서 한 영혼이 나를 끌어안았다. 어디선가 닿았던 혼이었다. 내가 빙의했던 지새늬의 혼.


“넌 누구야? 우리 전에도 만났지?”

“지새늬? 어떻게 된 거야?”

“너한테 물려주라는 뜻이구나. 그 말이.”

“무슨 말?”


“소리가 들렸어. 난 이제 떠나야 하니 쓰던 둥지를 빌려주라고.”

“몸이 약한 건 알았지만, 죽는 거야?”

“네가 쓸 거니까 몸은 안 죽지. 네 혼을 보니 이 몸도 괜찮아질 것 같네. 그래도 그냥 줄 수는 없고,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


지새늬의 혼이 뭉클거렸다.

“사흘만 같이 있어 줘. 친구가 필요해.”


그녀가 연락처를 뒤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원대함에게 소리치던 것도, 가면을 바꿔쓰는 것처럼 말과 행동이 달라지던 때도.

“네가 마음을 열었으면 좋았을 텐데···.”


“됐어. 어릴 때만 귀여워하지, 다 자라면 관심도 없어. 자기 이익만 챙기고, 자기 욕심대로 하려고 안달이고.”

“사람이 원래 그렇긴 해.”


“몸이 안 좋은 건 알고 있었어.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른다고 했거든.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 버틴 거야.”

“알면서도 그렇게 다이어트를 해?”


“그게 뭐? 난 배우가 되고 싶어. 전혀 다른 내가 될 수 있잖아? 사람들의 시선, 박수와 환호, 무대 위의 조명. 그런 게 좋아.”


상상 속의 자신을 꿈꾸는지 혼이 밝아지며 영롱한 빛을 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오디션에서 본 그녀의 연기력으로는 실현하기 힘든 꿈이었다.


“너도 이 몸으로 살다 보면 외로울 거야. 엄마는 사진으로만 얼굴을 봤어. 아빠는 늘 바쁘고. 늦둥이라서 오빠와 언니도 서먹하고”

지새늬의 혼이 늘어지면서 바닥에 달라붙었다.


“친구들은 내 돈에만 관심 있었어. 남자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빠 재산 때문에 접근한 거였어. 그런데! 그놈의 전 여친 때문에 나 완전 쓰레기가 됐었잖아. 허!”

지새늬는 불끈 일어서더니 몸의 생김새대로 모양을 잡았다.


“다른 건 괜찮은데, 진짜 무대에 못 오른 건 아쉽다. 학예회나 발표회 말고. 진짜 무대. 정말 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양팔로 어깨를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


“예전에는 코코아였으면, 지금은 녹차가 어울린다. 머리카락이 아주 녹색이네.”

은서가 녹차라떼를 건네주었다.


“가족들이 많이 놀랐겠다.”

“지금은 기뻐하시죠. 사람이 달라졌다고 말하기에 알아보는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나는 씁쓸한 녹차 맛을 음미하며 미소 지었다.


“원작가는···. 아니, 오빠는 눈치가 있는 것 같아요.”

“뭐라는데?”

“너무 이상하다고, 사람이 바뀌어도 정도가 있지. 중얼거리더라고요.”


“조금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죽을 고비를 넘기더니 철들었다, 그러겠지.”

“지새늬한테는 미안하지만, 가족이 생겨서 좋아요. 전 부모님 얼굴도 모르거든요.”


은서가 안타까워하며 내 손을 토닥였다.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편지! 천사님이 주신 편지가 있어!”


은서는 부리나케 가방을 뒤적이더니 편지 한 장을 꺼냈다.

“달숲 천사님이 주신 거야. 심지아가 오면 주라고.”

“예? 제가 올 줄 알았다고요?”


“나도 못 믿었는데, 진짜였네. 하긴, 실증계에서도 가끔 놀랄 일이 일어나. 전혀 예상 못 한 기적이. 그러니까 현실이지.”


그녀가 건네준 것은 ‘루월관’이라는 이름과 문양이 찍힌 종이였다.

누구의 편지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차오름의 필체를 몰라볼 리 없다. 힘 있고, 수려한 글씨체.

하지만, 마음이 급한지 뒤로 갈수록 글자 모양이 흐트러졌다.


‘지아 누나, 이 편지는 보낼 수 없겠지만, 말하고 싶어요.

가디록에게 들었어요. 우리를 위해 소설을 썼기에 누나는 소멸할 거라고.

난 믿지 않아요. 누나는 살아날 거예요.


돌아올 방법을 찾을 테니까, 살아만 있어 주세요. 반드시 데리러 갈게요. 언제가 되든, 다시 만날 거예요.


누나는 나의 전부예요. 내 모든 삶에 함께하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에요.

더 일찍 말하지 못한 게 후회돼요.


다시 만나면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놓지 않을 거예요.’


마지막 줄은 몹시 흔들렸다. 손이 떨렸나 보다. 글자만 보아도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눈동자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맺혔다.


루월관이면···.

차원침입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머물렀던 여관이다. 그래, 내가 그 이름을 붙였지.


차오름···.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를 기다리고 있어. 날 부르고 있어.’


용사로 떠나기 전날, 그가 하람 언덕에서 해준 말이 기억났다.

‘난 차오름이고, 내 삶이 있어요. 소설이 끝나면 내 꿈을 이룰 거예요. 고백할 거예요.’


그의 마음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야.’


깊은 한숨으로 눈물을 삼켰다.

‘너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주술의 제약을 어겼으니 이제는 누군가 나를 불러도 돌아갈 수 없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내가 손을 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바늘구멍만 한 통로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달숲 소품샵으로 날아들었대. 거긴 길 잃은 물건이 찾아오거든. 마음 둘 곳 없는 사람이 오기도 하고.”

“어떻게 실증계로 넘어왔을까요?”


“차오름이 간절하게 바라니까. 심지아가 알아주기를. 그 마음을 좇아 주인을 찾아온 거야. 말했잖아? 가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게 현실이라고.”


소중한 편지를 끌어안았다.

‘기다려, 차오름. 반드시 네 곁으로 갈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새늬와 많이 다를 수는 없겠죠. 그 친구의 소원도 들어주고 싶어요.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이 소원이었으니, 꼭 주인공일 필요는 없죠.”

나는 눈물을 닦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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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그리고 1 - 장미의 계절 22.10.22 28 1 11쪽
43 다시 만난 친구들 22.10.21 51 1 12쪽
» 일곱 밤이 지나고 22.10.21 32 1 8쪽
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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