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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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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76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4 09:5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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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의외의 변수

DUMMY

초고리 편의점이 보이는 골목에서 유연한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신발 상자를 소중히 안고 있었다. 이제 원대함에게 전달하면 된다.


최소희의 집에서 신발 상자를 받아오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원대함은 다락방에 있는 신발 상자가 필요하다. 심부름센터에서 올 것이다.’


단 한 번의 암시로 그녀는 심부름센터 직원을 기다렸다.


그녀는 쓰레기를 치울 수 있다며 좋아했다.

“대함이가 시간을 잘 맞췄네. 그렇지 않아도 다락을 정리하려던 참인데. 그런데 이 쓰레기를 어디에 쓰려고?”


쓰레기···. 작가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우리 세계의 뿌리가 쓰레기가 되다니.

그들의 말에 슬퍼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녀는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신발 상자를 현관 앞에 꺼내놓았다.


유연한은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몇 마디 건넬 사이도 없이 상자는 그의 손으로 넘어왔다.


*


유리벽 너머 원대함이 보였다. 시나리오 때문인지 이마를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걸 형에게 건네주면 되죠?”

“예. 상자를 알아볼 거예요.”


유연한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 정말 이런 스릴 넘치는 일 하고 싶었어요.”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모험을 앞둔 용사의 눈빛이랄까.


“정령님도 만나고, 변장도 하고. 속임수도 쓰고요.”

그는 훅훅 숨을 뱉더니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이번에야말로 원대함이 마음을 돌리겠지.

상자를 정리하며 메모도 써넣었으니 그것을 보면 깨달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이어서 써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나의 간절한 마음이 작가에게 전해져야 할 텐데.


유연한은 미리 연습한 대로 태연하게 상자를 내밀었다. 원대함은 낡은 신발 상자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뭐야, 이건?”

“지나가던 사람이 형한테 주라던데요?”

“누가?”

“모르겠어요. 주면 알 거라면서 가버렸어요.”

“허,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


“그럼, 전 심부름 끝났으니 가볼게요.”

유연한은 부리나케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갔다. 나가면서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에게는 유령으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사념체이므로, 원대함은 나를 보지 못했다.


잠시 후, 원대함의 표정이 달라졌다. 상자를 알아본 것이다.

“이거···. 옛날에 버린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고 내가 써놓은 메모지를 들어 올렸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야? 누가 스토킹하나?”


그는 메모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떫은 감을 씹은 듯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이 유리문 밖 거리로 향했다.


“수상해. 갑자기 연이가 나타난 것도. 그걸 갖다준 것도. 너무 이상해.”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엄마 짐에 딸려갔다 해도 그렇지. 이게 지금 나타나다니···, 귀신 소행인가?”

그는 진저리치며 상자 속 노트와 메모를 꺼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연이 친구는 어떻게 알았지? 내가 썼다는 걸?”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뭐라고 둘러대지?

이유를 찾아내야 해. 빨리! 급한 대로 막 떠오른 생각을 던졌다.


‘원룸에서 청소 알바하다가 전에 살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친구의 친구를 통해.’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연이가 청소 알바도 했었지? 사장님이 돌아가시다니···. 얼음공주가 고생 많았구나.”


원대함은 자신이 쓴 노트와 메모를 정리해 상자에 다시 넣었다.

“거기서 연이가 청소를? 히야. 이런 우연이.”


‘우연이 겹쳐 운명이 되었으니 부디 소설을 써주세요.’

나는 그의 옆에 서서 간절히 외쳤다.


하지만, 그는 상자만 바라보았다.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여남은이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벌써 교대할 시간인가.

“원형! 오늘은 그 사람 왔어요?”

“아니.”


“그러지 말고, 전화하지 그래요?”

“번호를 몰라. 바꿨더라고.”

“에구, 답답하네. 그냥 밀어붙여요!”

그녀가 한쪽 손으로 주먹을 쥐자 원대함은 멋쩍어하며 웃었다.


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는데 대체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난 실증계 사람에 대해 너무 모르는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다행히 그는 신발 상자를 챙겨 들었다.


*


원대함이 결심하는 순간을 보고 싶었다. 우리 세계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책상 위의 신발 상자와 스프링 책은 주인이 보살펴주기를 바라며 가지런히 기다렸다. 나는 책을 쓰다듬었다.


작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내게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우리 세계의 근원이니까. 애틋하고 애달팠다.


방구석에서 서성였지만, 그는 외출준비 하느라 신발 상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누구 짓이야? 왜 소설 쓰라고 난리냐고!”

거울 앞에 선 원대함이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갑자기? 허! 이렇게 뜬금없이? 저런 흑역사를 누가 좋아한다고!”


그는 스프링 책을 펼쳐보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휴, 볼수록 유치하네. 이건 쓰레기야, 쓰레기.”


휴지통에 집어넣으려다 멈칫했다.

“버리자니 아깝고. 놔두자니 거슬리고.”


그는 상자와 책을 옷장 가장 아래 서랍에 밀어 넣었다.

“그래도 연이가 갖고 있던 건데 버릴 수야 없지.”


나는 그의 멱살이라도 흔들고 싶었지만, 옷깃도 스칠 수 없으니 발만 동동 굴렀다.


“당신이 작가면 다야? 쓰기 싫다면 그렇게 끝나는 거냐고!”

꽥꽥 소리 질렀지만,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 끝나는 건가. 서서히 멸망하는 길밖에 없는 걸까.


그래···. 원대함에게는 그 소설을 끝낼 의무가 없어. 명분도 없고.

자신의 소설 때문에 우리가 생겨난 것도 모르지, 말해도 믿지 못할 거야.


그는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강요할 수도, 협박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파견의 주술이 가진 한계였다.


*


울면서 흐느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짱짱 만화방에 들어와 있었다. 손님이 몇 명 있었지만, 붙박이 현재안은 보이지 않았다.


은서는 나를 보더니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너 언제부터 유령이 된 거야?’

“어젯밤부터요.”


은서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신호를 보내왔다.

‘알아본 사람이 있어?’

“그 오두막을 그린 사람이요. 유연한이라고.”


‘심지아, 파견의 주술에 제약사항이 있는지 알아봐. 이건 큰일이야.’

“유령이 되면 안 되는 건가요?”


은서가 만화방을 둘러보며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네가 여기에서 쌓는 인연이 상상계에 영향을 미칠 거야. 인연을 쌓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상상계와의 연결점이 희미해져. 결국 끊어진다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조그맣게 기어들어 갔다.


그녀는 수첩에 뭔가를 적는 척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파견의 주술에 다른 제약은 없지?”

‘그것까지는 못 들었어요.’

“알아봐. 네가 먼저 소멸할 수도 있어.”


유령으로 보인다 해도 유연한과 은서에게만 보이는데.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까.

인연을 쌓은 상대라면···.

벌써 야문과 푸르니도 나와 인연이 닿은 존재들인데.


나도 이곳에서 길잃은 사념체가 된다는 말인가. 그럼, 우리의 세계는?


*


구름이 걷히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달은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제법 맑았는데 저녁이 되면서 구름이 몰려오더니 하늘을 가리며 얇게 깔렸다.


비를 품지 않았으나 내 마음에는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리쳤다.

‘제발, 제발. 빨리 연결해야 해!’


미끄럼틀 위에 앉아 간절히 빌었으나, 구름은 내 소원을 듣지 않았다.


“심지아가 유령이 되다니, 대단한 거 아냐? 모습을 가졌잖아?”

가디록이 휘파람을 불었지만, 수니홀은 혀를 쯧쯧 찼다.


“심상치 않아. 무엇이든 갑자기 변하는 거, 전혀 좋지 않아.”

“어쩌다 유령이 된 거야? 보는 사람도 있다며?”

야문이 위로하듯 내 어깨를 토닥였다.


“고향 생각을 하다가···.”

달빛사원을 생각하고, 차오름을 생각하느라 형상이 드러나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간절한 마음이 왜 작가에게 통하지 않고 엉뚱한 쪽으로만 번지는 걸까.


“고충만과 금은비는 안 왔어?”

“한동안 안 올 거야.”

수니홀이 미끄럼틀 기둥에 기대어 섰다.


“실증계를 즐긴다며 잠적했어. 포기하겠대. 여기에는 자신을 살릴 작가가 없다면서.”

가디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사라질 것, 화끈하게 살다 간다나? 짠하더라고.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고.”


“상상계의 영역이 사라져도 일단 이곳으로 넘어오면 사념체라도 살아남잖아? 자네와 야문처럼.”

수니홀이 야문과 가디록을 돌아보았다.


“가디록은 작가가 소설을 이어서 썼고, 야문은 파견의 주술로 넘어온 게 아니니까.”

나는 주저앉은 채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 뒤로 구름이 느긋하게 흘러갔다.


“금은비는 빙의하겠다고 애썼는데···.”

수니홀이 안타까워하며 혀를 끌끌 찼다.


“빙의? 그것도 괜찮은데 왜?”

“아무나 못 해. 들어가는 혼과 받는 몸이 결이 맞아야 해. 그런 혼과 몸이 만나기는 정말 어려워. 나도 포기했거든.”

수니홀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긴 한숨을 뱉었다.


“죽다가 살아나니 철들었다는 둥, 두 번째 삶이니 하지만, 대부분 원래의 혼이 아니거든.”

그의 말에 야문과 가디록도 신기해했다.


“죽었다 깨어나면 사람이 달라지고, 생각이 바뀐 이유가 뭐겠어?”

“오! 그런 비밀이 숨어있었군.”

야문과 가디록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빙의를 해서라도 여기 남으려는 금은비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 실증계의 삶을 부러워하는 마음도.


‘빙의.’

단어를 읊조리는 순간 지새늬가 떠올랐다. 작고 허약한, 바람 빠진 풍선 같던 몸.


가만, 나는 빙의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녀를 통해 원대함에게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직접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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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집필 22.10.20 32 1 10쪽
38 결심 22.10.20 30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2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8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30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 의외의 변수 22.10.14 30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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