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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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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75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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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지새늬와 구하라

DUMMY

방안으로 햇살이 들어왔지만, 온몸이 찌뿌둥하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몸이 바윗덩어리가 된 듯 무거웠다. 호숫가 오두막이 아니니 어쩔 수 없구나.


‘맞아, 오늘은 할 일이 있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침대 밑에서 기어나왔다. 최소희의 다락방에서 노트를 정리해야지.


나주연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토스트를 먹고 있었다.


‘오늘은 예약이 일찍 잡혔나?’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녀 역시 우리 세계를 위해 할 일이 있다. 스프링 책을 원대함에게 갖다주는 일.


며칠 전 은서가 스프링 책의 출처를 물었으니, 지금 암시를 주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 책을 생각하며 어디에 두었는지도 기억해 냈을 테니까.


커피를 마시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스프링 책이 어디 있지? 주인에게 갖다줘야지. 아무래도 원대함이 쓴 것 같아.’


책을 찾으러 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한쪽 입술을 비틀며 코웃음을 쳤다.

응? 내가 건 암시를 거부하는 건가? 편의점으로 이끌 때는 잘 되었는데.


그녀는 탕 소리 나게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바닥에 조금 남은 커피가 출렁거렸다.

“하! 그 녀석이 왜 이 동네 사는 거야? 언제부터?”


이를 갈지는 않아도, 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작가가 소설을 써야 한다고요. 그것도 빨리!’


암시가 안 먹히니 당황스러웠다. 주술을 어떻게 바꿔야 하나···.


나주연은 남은 커피를 한입에 다 마시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침대 아래 잠든 스프링 책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


다락방에서 노트 상자를 정리하는 건 간단했다.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바닥에 내려놓은 뒤 금은비를 찾아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최소희도 집에 없으니 외출하는 길에 따라 나갔나?

그동안 어떤 단서를 찾았는지 알고 싶었는데···.


주방에서 일하는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응. 사모님은 샵에 가셨어.”


샵? 샵이 뭐야? 삽은 아닐 테고.

나는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끌려 주방으로 떠내려갔다.


며칠 전 왔을 때도 여기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최소희 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무슨···, 몇 년 전까지 국밥집에서 일했대. 아들 하나 키우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조그맣게 키득거렸다.


“팔자 바뀌는 거 진짜 한순간이야. 그 아들?”

도우미는 전화를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몰라. 백수일걸? 알바하면서 글 쓴다던데?”

그녀가 냉장고를 향해 돌아서는데 이 층에서 요란하게 문이 닫혔다.


“나중에 얘기하자. 막내가 나가나 보다. 성질 엄청 더러워.”

도우미는 전화를 끊고 아무 일 없는 듯 행주를 빨기 시작했다.


이 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화사한 차림의 지새늬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왔다.


바깥은 가을인데 그녀 혼자 봄인 듯 연분홍 투피스를 입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액세서리도 색을 맞추고, 핸드백도 빨강색이었다.


“아줌마,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왜 반찬이 그렇게 맛없어요?”

“아, 그러니?”

“청소할 때 제 물건 좀 건드리지 마세요. 혼란스러워요.”

지새늬는 어깨를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지새늬가 나가고 현관문이 닫히자 도우미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아이고, 네 방은 너무 지저분해서 정리하려야 할 수가 없어. 그게 사람 방이냐?”


그녀는 들고 있던 행주를 휙 집어 던졌다.


*


나는 당연히 지새늬를 따라갔다.

혹시 원대함을 설득하는 비밀병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그녀가 택시에서 내려 오디션장으로 들어가는 것도 지켜보았다.

‘영화 [고마워, 날 잊어줘서] 주요 배역 공개 오디션.’


뭘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꽤 넓은 공간이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종이를 들고 웅얼거렸다.


지새늬도 신청자 명단을 확인하고는 로비 구석으로 들어갔다.

대본을 들고 입술을 달싹이는데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사이 나는 옆에 앉아 그녀의 수첩을 보았다. 읽으려던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달력에는 일정이 빼곡한데, 오디션 아니면 연기학원, 댄스 강습이었다.


‘지새늬도 정말 열심히 사는구나.’

영양실조에 탈진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괜찮은가. 혹시나 그녀가 또 쓰러지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맞은편 복도 끝에서 소곤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에게는 안 들리겠지만, 내게는 두 여자의 목소리가 크고 정확하게 들렸다. 지새늬에 관해 하는 이야기였으니까.


“뭐야? 쟤 또 왔어?”

“오디션만 보러 다닌다는 그 애?”

“주연 아니면 안 한다고, 학원 강사와도 사이가 안 좋대.”

“왜 그런다니? 이 바닥을 모르나.”

“저것도 병이야.”


“이번 작품도 다 내정되었다며?”

“쉿, 말조심해.”

한 여자가 검지로 자기 입을 가리고는 다른 사람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대화가 몹시 거슬렀지만, 연기하는 지새늬를 보자 왜 그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학원 강사마저 불쌍하게 느껴졌다.


무슨 막대기를 흉내 내는 줄 알았다. 나무토막이 서서 책을 읽는다고나 할까.

로비에서 혼자 연습할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아픈 연기를 잘하더니···.’


그런데도 주인공이 아니면 안 하겠다고? 달빛사원의 구하라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


마법 수련이 끝나고 달빛사원 정원에 앉아 미늘호수를 바라볼 때였다.

내가 앉아있는 의자로 구하라가 다가왔다.


“심지아, 너 비조족이라면서?”

“응. 왜?”


구하라는 뺨을 긁적이며 내 옆에 앉았다.

“나 춤 가르쳐줘.”

“춤을?”

“비조족은 춤과 노래가 뛰어나잖아. 나도 춤추고 싶어.”


그녀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꿈꾸듯 호수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예식 때 춤을 배웠는데, 너무 좋았어. 느낌이 딱 왔어. 이게 내 길이구나.”


선뜻 대답하기 곤란했다. 비조족이라고 모두 춤과 노래가 뛰어난 건 아니니까.

“비조족에도 예외는 있어. 나는 다른 비조족에 비하면 몸치인데.”

“그래도 기초단계 수업은 가능하잖아?”


그녀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뭔가 하고 싶은 건 처음이야. 너도 알잖아? 태어날 때부터 주술사로 선택받은 거. 그거 다 설정인데도 아버지는 진짜라고 믿어.”


그것이 그녀와 나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필사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타고난 능력에 모든 것을 가졌으니 노력할 이유도 없었다.


“태어나보니 주인공이래.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돼. 힘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여태껏 꿈이나 야망, 이런 거 가져본 적 없거든···.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이건 진짜 하고 싶어.”


구하라가 간절하게 부탁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수업을 시작했는데, 순간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춤추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몸이 너무 뻣뻣해서 부지깽이가 또각거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다른 꿈을 가지면 어떨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래도 구하라는 아주 즐거워했다.

식당 일을 끝내고 늦은 시각에만 잠깐씩 만나는 데도 그때마다 기대에 찬 얼굴로 땀을 뻘뻘 흘렸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면 그녀는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비조족이야! 정말 잘한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비조족 중에는 나비처럼, 바람처럼, 비눗방울처럼 춤추는 사람도 많아.”


구하라가 혀를 빼꼼 내밀었다.

“나 정말 못하지?”

“이제 배우기 시작했으니까 서툰 게 당연하지.”

“아니야. 나도 알아. 못한다는 거. 그래도, 못하면 어때?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지.”


“응. 넌 열심히 연습하니까 나아질 거야.”

“나도 춤추며 여행하고 싶어. 단기 연수 말고, 이 넓은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


그녀는 꿈꾸는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을 보고 싶다며 떠난 오빠의 눈빛과 비슷했다.


하지만, 구하라는 춤 연습을 오래 하지 못했다.

그녀의 부모에게는 딸이 최고의 주술사인 것이 가문의 영광이었다. 절대로 주술사를 포기하면 안 된다고 했다.


감시자가 붙을 정도로 엄격했는데, 그즈음 차원침입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구하라는 주인공이므로, 소설에 맞춰 차원관리자로 나가야 했다. 신탁의 주인공이니 운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


소설 속 구하라가 나주연과 비슷하다면, 우리 세계의 구하라는 지새늬와 비슷했다.

소설에서는 카리스마 있고, 강단 있고, 말 대신 행동이 먼저지만, 실제의 구하라는 여리고 순수하고 어설펐다.


다른 점이라면, 지새늬가 애정결핍이라는 정도?

그녀의 일기에서 보지 않았던가. 아빠는 바쁘다며 용돈만 주고, 엄마는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원망을 가득 늘어놓았다.


나이 많은 오빠와 언니는 어릴 때는 귀염둥이 막내로 대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못 한다며 짜증 낸다고.


지금 생각하니 그때 난 구하라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녀 역시 주인공이라는 위치가 무거웠을 텐데.


구하라도 차오름을 좋아했다. 소설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가 차오름에게 다가가지 못할 만큼은 되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경계했는지도 모른다.


‘여기 갇혀 있는 건 싫어.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춤추며 세상을 떠돌고 싶은 그녀의 꿈 역시 소설이 끝나야 얻을 수 있다.

차오름의 꿈도, 구하라의 꿈도, 어쩌면 우리 세계에 남아있는 모든 사람의 꿈도 그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빨리 소설이 이어져야 할 텐데···.’

원대함에게 모습을 보일 방법을 찾아야겠어. 설득할 다른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당장 찾아야 해.


원작가를 향해 날아가려는 마음은 지새늬 때문에 미뤄졌다.

그녀는 오디션이 끝나자 건물 뒤편 나무 그늘로 들어갔는데,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또 쓰러진 거야?


가까이 가 보니,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울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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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집필 22.10.20 32 1 10쪽
38 결심 22.10.20 30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2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8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30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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