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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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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62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8 10:22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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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리허설

DUMMY

어젯밤의 아픔이 아침 햇살에 녹아들었나 보다. 깨어나니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운이 없을 뿐, 돌아다닐 만했다.


“지아 정령님, 일어났어요?”

유연한이 기다렸다는 듯 죽 한 그릇을 내밀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야채죽이었다.


“어제 마감하고, 저도 이틀 휴가예요. 하하하!”

그는 탁자에 쌓인 종이를 팔꿈치로 치우고 아침상을 차렸다.


죽과 봉지 김치, 식빵과 우유뿐인 조촐한 식사이지만, 나를 위해 식탁이 차려지니 기분 좋았다.


“너무 바빠서 생각도 못 했어요. 그 뭐냐, 제사처럼 지내면 되는 건가요?”

플라스틱 수저를 놓으면서 그는 호기심에 차서 나를 바라보았다. 숟가락이 어떻게 움직이나 궁금하겠지.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큰 눈과 긴 얼굴형 때문에 착하게도 보이고, 꺼벙하게도 보이는데, 보이는 그대로의 성격이라 웃음이 나왔다.


‘결이 다른 사람이 여기도 있잖아. 유연한 말고도 많이 있겠지?’

실증계 사람 중에 결이 다른 사람은 음악가나 요리사가 많다고 했다.


유연한은 그림을 그리니, 그들은 예술을 좋아하나? 왜 문학이 아니냐고. 어떻게 보면 그것도 예술일 수 있잖아?


“정령님이 사는 세계는 어떤지 궁금해요.”

유연한은 식빵을 뜯어 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고 싶어요. 정령님에 대해서.”

몽롱한 눈빛으로 말하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는 황망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 그, 그게 아니고, 제가 스토리가 약해서···. 어, 캐릭터도 약하지만요.”


그는 우유잔을 내려놓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누가 스토리 써주면 좋겠어요. 그림은 자신 있거든요. 초등학생 때부터 그렸으니까요. 몰래 숨어서.”

너털웃음이 말끝을 따라 흘러나왔다.


“집안에서는 아직도 반대해요. 형이랑 누나는 잘나가거든요. 저만 모자라요. 원래는 미술 전공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엄청 반대했어요. 형은 법대고, 누나는 의대니까 나도 그래야 한다고.”

그가 한숨을 쉬기에 잠자코 기다렸다.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어 하는 소망이 보였다.

어디든 하소연하고 싶은데 꾹꾹 눌러 담기만 해서 멍이 들었나. 가슴에 검푸른 기운도 함께 보였다.


“지방대 법학과 들어가긴 했는데, 1학년 마치고 그만뒀어요.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제대하고는 집에도 안 갔죠.”

그는 탁자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이런 얘기하려던 건 아니고요.”

그가 손사래를 치기에 나는 가만히 웃어주었다.


달빛사원의 주술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다. 그것이 상대를 움직이는 기본이니까.


“재미없죠? 이런 얘기.”

“아니에요. 그때부터 그림을 그렸나요?”

“에이, 그럴 리가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것저것 알바도 하고, 작가님 밑에서 어시도 하고 그랬죠.”


“원래 스토리는 다른 사람이 쓰나요?”

“작화랑 스토리, 모두 하면 제일 좋죠. 전 그 수준은 안 되더라고요.”


스토리라···. 어제 통화한 작가가 생각났다.

원고료, 계약금, 착수금 이런 단어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연한이 찾는 스토리 작가도 비슷한 말을 하겠지.


“협업할 작가를 찾고 있지만, 저 같은 무명에게 원고가 들어올 리 없죠.”

그는 우유 한 잔을 깨끗이 비웠다.


“그래도 아직은 일러스트 일이 들어오니까, 틈틈이 준비해야죠. 일감이 적어도, 굶지는 않으니까요.”


“유연한씨 그림은 맑고 평온해서 알아줄 사람이 꼭 나올 거예요. 재능도 있으니.”

“우와, 정령님이 그렇게 말해주시니 힘이 나요. 아차!”

그는 벌떡 일어나 책상 위를 뒤적거렸다.


그가 콘서트 티켓을 내밀었다.

“이거 내일 같이 가요. 대함이 형이 줬어요. 안타노안타가 나온대요. 그분 노래 참 좋던데, 알고 보니 형 선배라잖아요? 우와···.”


콘서트를 유령과 같이 간다고? 난 티켓 없어도 들어가는데?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티켓에 적힌 출연자 이름을 보느라 내 신호를 받지 않았다.


그 순간, 그를 좇던 애틋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함께 가고 싶을 텐데.

“안가유씨랑 가시죠? 뽀글 미용실.”

“예에? 아휴, 세탁소 형한테 맞아 죽어요.”

그는 놀라며 양손을 흔들었다.


“그 형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지극정성으로 쫓아다니는데, 이상하게 가유씨는 그 형한테 쌀쌀맞더라고요.”

유연한은 순진하게 눈을 빛냈다.


그 표정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지만, 설명은 안 하는 걸로···.


“둘 다 참 좋은 사람이에요, 보기에도 잘 어울리고.”

그는 빈 그릇을 치우며 싱글거렸다.

“둘이 잘 되면 좋을 텐데.”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안가유가 못 들어서 다행이었다.

사람이 착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지. 실증계 사람들의 마음은 정말 알기 어려웠다.


*


대리 작가를 찾는 꿈은 물거품이 되었어도 내게는 원작가를 도울 의무와 책임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원작가가 안전해야 우리 세계에 희망이 생긴다니.


오늘 원대함은 극단이 아닌 문화회관으로 들어섰다.

아침에 유연한이 보여준 티켓, 바로 그 콘서트장이었다.


무대는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고, 사람들은 분주히 다니며 의상과 소품을 준비했다.

조종실에서 조명과 음향을 점검하느라 수많은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


‘아, 이게 리허설이구나.’

소극장만 보다가 대여섯 배 넓은 공연장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원대함을 놓치지 않고 쫓아갔다. 대기실에서 노안타와 이야기하기에 다시 무대로 나왔다.


무대와 객석 주변을 날아다녔다.

내일 유연한과 함께 오기로 했지만, 공연을 보는 것과 리허설을 보는 재미는 다르니까.


객석 한구석에 눈에 익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날아갔다.

“은서님! 오늘 쉬나요?”

“응. 내일은 근무라서 콘서트 못 보거든. 미리 보려고.”


“관계자가 아닌 데도 들어올 수 있어요?”

“나 관계자인데?”

“예에?”

은서는 대체 정체가 뭘까? 이런 콘서트에 관계자라니?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였는데, 얼굴빛이 하얗다 못해 파리했다. 무엇보다 머리카락에 눈길이 갔다.


짙푸른 바다색, 깊은 바다에서 옅은 바다까지, 반짝이는 하얀 물비늘까지 한데 모아놓은 듯한 신비한 색이었다.

사람에게는 염색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아니다. 저건 진짜야. 그리고 이 사람은···.

‘응? 사람이 맞나?’


넋 놓고 머리카락을 바라보니 은서가 나를 보며 웃었다.

“이쪽은 바우. 내 영원한 친구이자 영혼의 반쪽.”

무슨 말인지 모르나 일단 고개를 숙였다.


“네가 심지아구나.”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였다.


“예. 제가···.”

인사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뭐야? 이 사람에게도 내가 보여?


“원대함을 따라왔구나. 그럼, 내일도 오겠네? 잘 들어줘.”

“바우, 난 끝나고 먼저 파라다이스로 갈게.”

“응. 이따 봐.”

바우는 은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내게는 손을 흔들었다.


그가 무대 뒤로 돌아가자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 저분은 누구예요?”

“파라다이스 빌라 식구? 하하. 그룹 갤럭시에서 드러머를 맡고 있어. 이따 나올 거야.”


“저를 알아보던데···.”

“음. 우리 빌라에는 나보다 뛰어난 능력자가 많으니까.”

은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의자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두 분이 결혼하나요?”

“그런 건 의미 없어. 그냥 함께 하는 거야. 바우는 여기 사람도 아니고,”

“실증계 사람이 아니라고요?”

“보이는 것만 믿으면 안 돼. 실증계도 한 가지 세상이 아니거든. 다른 많은 세계가 겹쳐있어.”


은서는 웃다가 정색을 하고 내 손을 잡았다.

“연주 들을 거지?”

“예. 당연하죠.”

“조심해. 그룹 갤럭시의 연주는 근원을 건드리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존재마다 근원이 다르니, 너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너한테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사람들은 괜찮나요? 그러니까 실증계의 사람들.”


“사람은 못 들어. 소리를 담을 귀가 없으니까,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능력 밖의 것은 버리지.”

“그 정도예요?”


아니, 갤럭시의 연주는 그 정도 이상이었다.


콘서트에 여러 명의 가수와 연주자가 나왔지만, 그룹 갤럭시의 연주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선율, 감미로운 가락, 조화로운 비트, 이런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연주를 듣고 있으니 눈앞에 우주가 펼쳐졌다. 별이 빛나고, 행성들이 떠다녔다.

우주는 곧 깊은 바닷속이면서 내 안의 모든 세포이기도 했다.


사람의 몸으로 넘어왔으면 나도 못 들었다는 거잖아?

이런 음악을 사람은 못 듣는다니···. 사람들이 불쌍할 정도였다.


그러나, 두 번째 곡이 시작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모르기에 평온할 수 있었다.

조심하라던 은서의 당부가 생각났다.


그들의 음악은 애써 감춘 불안과 두려움을 모두 꺼냈다. 어젯밤의 꿈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던 우리의 세계. ‘전설의 근원’ 아름다운 땅이 지워지는 무서운 꿈.


식은땀이 흘렀다. 가위에 눌린 듯 몸이 무거웠고,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음악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구원자를 찾아. 전설의 근원을 구할 구원자.’


뭐라고?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 어디? 그게 누구지?

‘너희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서둘러라.’


‘그게 누구냐고!’

그러나 답을 듣기 전에 그들의 연주는 끝이 났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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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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