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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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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52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2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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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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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7쪽

소멸 위기

DUMMY

‘전설의 근원’ 막바지에 이르렀다. 나는 원대함의 노트를 보고 또 보았다.

그의 노트에서 마지막 장면은 다른 장면과는 다르게 정성스럽게 채워져 있었다.


‘차오름과 구하라는 전투에서 승리한다. 살아남은 차원침입군은 그들의 차원으로 돌아간다.

차원의 틈이 닫히자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눈 부신 빛이 구하라의 몸을 감싼다. 그녀는 새로운 차원관리자가 된다.

차오름이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한다. 영원히 함께 할 거라고. 구하라는 기뻐하며 그에게 입 맞춘다.’


원작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구하라의 모델이 누구인지 몰랐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무척 마음 아팠을 것이다.

역시 나의 차오름이 아니구나. 결국 주인공들이 맺어지는구나. 나 같은 엑스트라는 마음 둘 곳이 없어. 그렇게 쓸쓸했을 것이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원대함과 나주연이 떠올랐다.

‘나주연을 상상하며 이 메모를 썼겠지?’


두 사람이 사귄 적이 없다지만, 서로 이어진 뭔가는 있을 것이다.

‘나주연의 아버지 회사에서 알바도 했고, 사장님이 사윗감이라고 칭찬했다고 했던가?’


과거야 어찌 되었든 두 사람 다 서로를 신경 쓰는 것 같은데···.

실증계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솔직하지도 않고, 뭔가를 계속 숨기려 한다.

우리 세계에서도 밀당은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닌데.


어쨌든, 나도 원작가를 위해 마지막 장면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메모대로 상상하는 것은 어려웠다. 구하라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자꾸만 내 모습이 그려져서 여러 차례 고개를 흔들었다.


‘아! 맞아. 두 사람 말고도 다른 동료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려줘야지.’

정상인은 달빛사원의 음악가가 되고, 호야는 떠돌이 무사이니 세상을 유람하는 것으로 해야겠다.


나는 오빠에 대한 단서도 살짝 집어넣었다. 오빠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소설에 없는 우리만의 세계니까.

그러니까 어떤 단서든 효과가 있다.


---


호야는 흙의 곤봉을 어깨에 둘러멨다.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내자 뽀얀 피부가 드러났다.

“그 좁은 사원에 묶이고 싶지 않아. 난 자유로운 영혼이거든.”

“어디로 가려고?”

가디록이 바람의 창을 닦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바다를 떠다니는 방랑자들이 있어. 그중에는 보예강을 따라 내려온 사람도 있고, 나말뫼산에서 내려온 사람도 있지. 세상에 숨겨진 비경을 찾아 내 눈으로 직접 볼 거야.”

“너라면 어디서나 잘 지낼 거다.”

가디록이 일어나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보예강이면 미늘 호수에서 시작되는 강이잖아?”

구하라가 반가워했다.


“호야, 우리 고향 사람을 만나면 전해줘. 달빛사원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알았어.”

호야가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


자, 이번에는 가디록을 어떻게 할까.


원작가는 다른 동료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정상인에게만 미래를 준 것은, 그의 모델이 노안타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원에서 음악가로 활동하도록 하고 싶어서.


그렇다면, 차오름에게 친구를 만들어줘야지.

가디록과 함께 연합의 수비대가 되는 걸로 해야지. 차오름도 용사가 되었으니 더는 기념품 가게의 점원일 수 없잖아.


‘그래, 이렇게 된 거 차오름이 대장하고, 가디록이 부대장 해.’

나는 혼자 싱글거리며 소설을 써 내려갔다.


기운이 급격히 빠져나가는데도 상상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마지막이 가까워지자 잠이 쏟아졌다. 정신이 몽롱했다.


‘여기서 잠들면 그대로 사라지는 거야.’

파견의 주술을 어긴 대가라지만 정말 무서운 형벌이구나.


초고라도 모양을 드러냈니 우리 세계는 살아날 것이다.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믿고 싶었다.

나는 서둘러 종이를 갈무리했다. 끈으로 잘 묶어 그림 밖으로 나왔다.


“정령님, 다 썼어요?”

유연한의 표정은 기쁨과 놀람에서 서서히 슬픔과 서운함으로 바뀌었다.

“이제 가는 거예요?”


“이걸 원대함님께 전해주세요. 그분의 소설이거든요. 그 이상은 비밀로 해주세요.”

“대함이형에게 뭐라고 얘기하죠?”

“지나가는 사람이 주고 갔다고 하세요. 누군지 모른다고.”


유연한은 말없이 종이 꾸러미를 쓰다듬었다. 나는 서 있을 힘도 없어 의자에 주저앉았다.


원대함이 소설을 보고 뭐라고 할까. 읽기는 할까?

인연이 닿아 소설을 읽고, 고쳐 쓰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읽도록 발표하면 더 좋고.


머리가 찡하더니 깨질 듯 아팠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머리를 감싸 쥐고 눈을 감았다.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으니, 멀리 지새늬가 보였다.

그녀는 구급차에 실려 가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또 쓰러진 거야? 그런데, 왜 지새늬가 보이지?’


의식이 희미해졌다. 감각도 무뎌졌다.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정령님! 안 돼요! 정령님!”

유연한이 울먹이는 소리가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몸이 붕 떠올랐다. 한때는 바윗덩어리처럼 무거웠는데···.

날카로운 빛이 번쩍하더니 세상이 온통 하얗게 바뀌었다.


그 빛 속에서 파라다이스 빌라의 그믐밤이 펼쳐졌다. 미늘호수와 하람언덕이 보이던 자리. 멀리 보예강이 시작되는 물줄기도 보였다.


그날은 정말 행복했는데···.

다시 달빛사원을 볼 수 있다면···. 차오름과 함께 호숫가를 걸을 수 있다면.


미루안의 문지기가 물었다.

‘심지아님, 소원이 있어요?’

‘소설이 완성되는 거요. ‘끝’이라고 쓰여야 우리 세계가 영원하거든요.‘


어디선가 다른 목소리가 물었다.

‘심지아, 소원이 무엇이냐.’


‘나는···.’

차오름이 보고 싶어요. 그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어요.


그때 소품샵의 달숲 천사가 문지기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믐밤 그 순간에는 들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또렷이 들렸다.


‘심지아가 없는 세상에서 차오름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달숲 천사와 미루안의 문지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라다이스 빌라는 사라지고 하얀 병실이 보였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지새늬가 보였다. 그 위로 호숫가에서 활짝 웃는 내 모습이 겹쳐졌다.


‘널 데리러 오게 하지 마라.’

거리에서 혼을 데려가던 천사의 경고가 들렸다.


‘꼭 돌아와야 해요. 나한테 누나는 하나면 충분해요.’

차오름의 목소리도 아련하게 들렸다.


이윽고 눈앞의 모든 환영이 사라졌다.

또다시 한 줄기 빛이 번쩍하며 세상을 삼켜버렸다.


순간, 나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빛처럼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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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그리고 1 - 장미의 계절 22.10.22 28 1 11쪽
43 다시 만난 친구들 22.10.21 51 1 12쪽
42 일곱 밤이 지나고 22.10.21 31 1 8쪽
»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1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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