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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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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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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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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길 잃은 영혼

DUMMY

초고리 편의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고 조용했다. 가끔 손님들이 드나들지만, 나의 상념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계산대 뒤 선반에 앉아 원대함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노트에 뭔가를 쓰다가 지웠다가 볼펜으로 톡톡 두드렸다가 문밖을 내다보았다.


지새늬의 몸으로 그린 약도는 그날 바로 구겨졌다. 휴지통을 비웠기에 지금은 그 처참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된다.

스프링 책과 신발 상자는 여전히 옷장 서랍에서 나오지 않았다.


‘보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어. 살릴 수 있어.’

새로이 다짐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작가가 행복해야 상상계의 영역도 안정을 얻는다고?’

원대함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작가를 도와야겠어.

‘시나리오를 다 쓰면 소설에 마음을 주려나?’


계산대로 내려가 그의 노트를 읽는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이라 더욱 크게 들렸다.

나는 귀를 쫑긋거리며 소리에 집중했다.


“안타형? 형이 웬일이야? 이 시간에 깨어있다니?”

“지금 와이프가 그러는데, 연이가 소개팅 나간대.”

노안타의 목소리는 소곤소곤 기어들어 가면서도 울림이 컸다. 어딘가 좁은 곳에 숨어서 전화하는 것 같았다.


“왜? 아니, 언제? 누구와? 어디서?”

원대함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런데, 얘기 들어보니 너보다 훨씬 낫더라. 연이한테는 그 사람이 더 어울릴지도···.”

“아는 사람이야?”

“난 모르지. 집주인하고 와이프의 합작이랄까. 201호 아가씨 남친 만들어주기?”


잠시 끊어졌던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와이프 일 년 후배래. 사람이 아주 괜찮다는데? 직장도 좋고. 얼굴도 평범하다니까.”


“아우, 그런 말이 나와?”

“야야, 나 목숨 걸고 알려주는 거야. 와이프는 내가 연이 아는 것도 모르고, 연이를 짝사랑하는 백수건달이 있는 것도 몰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언제, 어디서?”

“왜? 가서 깽판 치게?”

“어···?”

원대함이 대답하지 못하고 소리를 삼켰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노안타의 너털웃음이 웅웅 울렸다.

“하, 결정 장애 또 나왔네. 여하튼, 연이한테는 꼼짝 못 한다니까.”


그가 대답을 찾을 때까지 노안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헉, 와이프가 찾는다. 내일이라고 했으니 장소 알아볼게.”

“고마워, 형.”

“그동안의 실수, 반복하지 마라.”

전화는 뚝 끊어졌다.


원대함은 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염없이 들고 있었다.

“주연이한테는 그 사람이 더 나을지도···.”


그의 혼잣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이 작가 정말 안 되겠네. 그러니, 소설도 쓰다 말았지.


극단 식구들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연기하는 사람들인데, 그 정도 못 해줄까.

그도 마침 같은 생각인지 노트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었다.


“조아용 선배에게 부탁하면···.”

원대함은 자신이 쓴 이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편의점 일이 끝나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다. 계속 편의점에만 머물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원대함 곁을 맴돈다고 그가 마음을 돌릴 것도 아니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늘 가던 버스정류장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정류장에 가서 앉았다.

외각 네거리 버스정류장은 이귀들도 많고, 수니홀이 지키고 있어서 혼자 생각에 잠기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바람이 선선하거나, 햇빛이 따사롭거나, 꽃향기가 만발할 때면, 한마디로 날씨가 좋으면 이귀들이 더 많이 나왔다.

비가 올 때도, 비를 피해서.

‘우리도 기분 좋은 날을 좋아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놀이터에는 야문과 가디록이 있으니 그 길도 피했다. 지금은 고요하게 생각에 집중하고 싶었다.


정류장 지붕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뭐가 그리 급한지 앞만 보고 분주하게 걸었다. 선선한 가을하늘도, 알록달록한 단풍잎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쫓기듯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졌다.

‘이렇게 늑장 부릴 수 없지. 뭐라도 해야겠어.’


정류장 지붕에서 내려오는데 나무 밑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의 모습을 한 혼령이었다.


‘이 기운은 아이가 아닌데?’

내가 다가가니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실증계에서 살던 노인의 혼이었다. 그런데 왜 아이 모습을 하고 있지?

‘이때가 가장 행복했어. 이 모습으로 떠나고 싶어. 나 좀 보내줘.’


“난 천사가 아니야. 다른 세계에서 와서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러니까 저승사자잖아. 제발, 보내줘. 아프지 않게. 아픈 거 싫어. 이제 그만 앓을래. 이십 년이면 충분히 누워있었어.’


혼령회복술은 영혼을 천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혼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천사가 올 때까지 평안한 상태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문을 외우자 노인의 혼이 스르르 잠에 취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갔기에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이제부턴 우리가 하지.”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주문은 끊어졌지만, 다행히 노인의 혼은 다른 천사의 품에 안겨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날개도, 너울 같은 날개옷도 없지만, 그들이 천사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팔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니 그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심지아,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마라.”

“전 그냥 위로하려고···.”


“경계의 틀을 건드리면 네가 소멸한다. 파라다이스 빌라에서 부탁하지 않았다면, 넌 벌써 사라졌을 거다. 조심해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천사는 사라졌다.


경계의 틀을 건드린다니? 노인의 혼을 위로한 것이 틀을 건드린 거라고?

파라다이스 빌라? 어디서 들어봤는데···.


은서가 사는 집! 그믐밤에 모임이 있으니 오라고 했었지. 곧 그믐이구나.

그런데 파라다이스 빌라에서 나를 부탁했다고? 은서는 이귀만이 아니라 천사와도 아는 사이였어?


*


극단 사무실로 조아용을 부른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원대함이 그의 이름을 노트에 적었으니까.


그런데, 왜 선명해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부탁을 하냐고.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원대함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꼭 잡으려고요.”

“어···, 그렇구나. 대함이에게 그런 순애보가 있는 줄 몰랐네.”

조아용은 탁자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난감해했다.


선명해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조아용은 알아차렸는데, 원대함은 끝까지 알지 못했다.


‘아니, 저걸 못 읽는다고? 정말 눈치가 없네.’

내가 더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이번엔 잘해보려고요. 마지막 기회예요. 나도 한다는 걸 보여줘야죠.”

“그 기백은 높이 산다. 그런데, 계획은?”

조아용은 질문을 하면서도 선명해를 흘끗거렸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제가 현남친, 선배가 구남친 역할이죠.”

“뭐, 희곡 쓰는 애가 만들었으면 시나리오야 믿고 가는 거지.”

“안타형이 장소를 알려주기로 했으니 문자 오면 바로 연락할게요.”

“그래. 뭐, 다행히 내일은 공연도 없고.”

조아용이 허리를 폈다.


“그 계획, 꼭 성공하면 좋겠네.”

선명해도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지며 거친 숨이 섞여 나왔다.


*


“그거 하나 눈치 못 채? 어!”

나는 미끄럼틀 위에 앉아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 우리 세계가 생긴 것도, 자기 때문에 위기를 맞은 거도 모르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졌다.


여기 실증계는 날씨도 도와주지 않고, 달빛도 시원찮고, 작가마저 답답했다.

달빛사원과도 연결 못 하는데, 금은비와 고충만은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뭐하자는 거냐고!”

나는 마지막으로 소리 지르고 일어섰다.


“다 끝났어?”

미끄럼틀 아래에서 가디록이 싱글싱글 웃으며 손짓했다.


“내려와 봐. 누가 왔는지 보라고.”

가디록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데? 대체 누구이기에?

나는 서둘러 미끄럼틀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옆에는 푸르니가 서 있었다.

흑치였을 때의 어둠침침하고 해묵은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내가 지은 이름처럼 싱그러운 초록빛이었다.


“여어, 심지아, 화가 단단히 나셨네?”

“언제 나왔어? 벌써 씻김이 끝났어?”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되더라고. 새로운 삶이 있는데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있어야 뭐 하겠어?”


“역시 천사님이 만든 인형은 다르구나.”

야문이 껄껄 웃었다.


“천사?”

낮에 만난 천사가 생각났다. 경계의 틀을 건드리면 내가 소멸할 거라고 경고했었지.


야문과 가디록이 푸르니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작가를 찾았지만, 소설을 안 쓴다고 해서 고민이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도 덧붙였다.


푸르니가 턱을 쓰다듬으며 으흠 소리를 냈다.

“그렇게 쓰기 싫어하면. 다른 작가를 찾아. 싫다는 사람 잡고 있어야 시간 낭비야. 기대하지 마.”


“다른 작가라니?”

“여기 처음 왔을 때 나도 날 살려줄 작가를 찾았어. 그러다 알게 되었지. 여기는 대필 작가도 있고, 유령작가도 있어. 작가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거야.”


“그렇게 해도 우리 영역이 살아남을까?”

“줄거리는 끝까지 써놨다며? 살만 붙이면 되니까 그 작가의 작품이야. 그 사람의 아이디어니까.”

그의 말을 들으며 아이디어 노트를 생각했다.


원대함은 설정집과 아이디어노트에 결말까지 적어놓았다.

도중에 만나는 동료가 어떤지, 그들의 필살기가 무엇인지. 괴물은 어떤 종류인지, 다섯 개의 무기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대충 적어놓았다.


‘그대로 따라가면 돼. 원대함의 설정을 그대로 쓰는 거야.’

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방법도 있단 말이지.


“그런 소설 꽤 있어. 공장처럼 알바 고용해서 부분부분 나눠 쓰는 거지. 작가는 아이디어만 내고. 그래도 그 사람 작품이야.”

푸르니가 설명을 덧붙였다.


“푸르니! 너 정말 대단하구나!”

나는 푸르니를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안을 수 있는 몸집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손이 그의 등에는 닿았다.


원래의 작가가 행복해야 하는 것도 맞고, 다른 작가를 찾는 것도 맞아.

그래, 다른 작가를 찾아보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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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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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1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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