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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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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63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2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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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그리고 1 - 장미의 계절

DUMMY

5월이 되자 여린 초록 사이 숨어있던 꽃들이 노랗고 붉게 거리를 물들였다. 화려하고 향기로웠다. 생명은 사람의 눈이든, 사념체의 눈이든 어떤 눈으로 보나 아름답구나.


지새늬의 몸으로 보는 세상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벌써 5월이니 이 몸을 쓰는 것도 육 개월이 지났구나.


그동안 오디션에는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의 기억과 지식이 남아있다고 해도 자유로이 쓰려면 나도 배워야 했다. 연기학원의 수업에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보조출연 알바를 하다 보니. 학원의 모회사인 ‘드라마브릿지’에서 스터디그룹도 만들어주었다.


무엇보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일, 소설 ‘전설의 근원’을 손 보고 다듬어서 플랫폼에 올렸다. 유명하지 않은 사이트라서 조회수가 낮지만, 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마지막 회를 올렸을 때 밀려들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존재를 걸고 해낸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필요한 정보는 웹에서 찾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정보검색사 지새늬라고 해도 될 만큼.


사무실 창문 너머 장미 넝쿨이 흐드러진 담장과 ‘드라마브릿지’라는 간판이 보였다.

‘매니저가 왜 보자고 했을까?’


드라마브릿지는 기획사나 소속사와는 달리 단역이나 엑스트라를 관리했다.

여기서 매니저는 배우를 동원하고, 일정과 장소를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다른 일도 많겠지만, 나와 관련된 것은 그 정도였다.


교육과정을 상담하고, 출석을 관리하는 헬퍼도 있고, 연기와 노래, 춤을 가르치는 트레이너도 있다. 실장이나 과장은 멘토라고 불렀다.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회사였다. 사무실도 이 정도면 넓고 깨끗하니.


“새늬, 왔어?”

내 매니저는 사십 대의 여자였다.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에 커다랗고 둥근 귀걸이가 시선을 끌었다.


“이번에 단역 하나 맡았어. 세자빈을 따르는 궁녀 역할인데, 대사는 없지만 자주 나갈 거야.”

그녀는 늘 그렇듯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예. 언제부터 나가나요?”

“일정 나오면 알려줄게.”

매니저는 다른 때와는 달리 내게 앉으라고 의자를 권했다.


“너, 소문과는 다르구나.”

“예?”

“학원에서 장매니저가 진저리쳤다고 해서···, 솔직히 받고 싶지 않았거든. 걱정했는데, 겪어보니 그렇지도 않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새늬가 어땠는지도 나도 잘 아니까.

그녀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꾸준히 연락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연히 만나도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소문을 들으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혼수상태로 사흘이나 못 깨어났대. 죽었다 살아나서는 확 달라졌대.’

그 말은 무슨 주문처럼 모든 사람을 설득시켰다.


죽었다가 살아나면 대부분 태도가 바뀌나 보지? 정말로 기질이 바뀌는지, 아니면 다른 것이 바뀌는지 모르는 게 나을 것이다.


“갑자기 보조를 한다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의심했거든. 아니더라고. 하여튼, 지금까지 오해한 건 미안하고.”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소문만 믿고 남을 평가했으니 찝찝하잖아? 앞으론 잘해보자고.”


매니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기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


회사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도 담장을 따라 덩굴장미가 가득 피었다.

꽃이 피니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붉은 장미를 들여다보았다.


“먼지가 많다고?”

장미꽃이 쫑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어. 도시라서 매연이 가득해. 그래도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니 기특하구나.”

나는 하늘거리는 꽃잎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지 꽃과 이파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끗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아, 생각으로 말해야 하는데···.’

가끔 그 중요한 규칙을 잊어버린다. 조심해야지.


띠릭 단톡방에 문자가 떴다.

‘언니! 축하해요! 드라마 출연! 앞으로 꽃길만 걸어요.’

‘새늬, 드디어 입성인가?’


함께 스터디하는 회원들이었다. 벌써 소식을 들었나?

나는 문자를 들여다보며 싱글거렸다.


스터디그룹에는 언니도 있고, 동생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달둥지에서 함께 수련하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선명해라고 이름을 받은 아이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겠지. 이름이 마음에 들었으려나···.


나도 답장을 썼다.

‘숨은그림찾기 하느라 눈이 빠질걸?’


*


소극장의 연습실은 퇴근 후에 열기가 더 뜨거웠다. 직장인반 ‘바람길’의 공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직장인반 이름이 ‘바람길’이 된 것은 단장의 뜻이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바람이 이루어지는 길이기도 했다. 단장의 소망이 그대로 남긴 이름이었다.


‘누구에게나 무대를 열어주자. 꿈을 펼칠 기회를 주자.’

그런 때 보면 정말 스승님과 비슷하다니까. 내가 이름 하나는 잘 이어줬어.


소극장 입구에 ‘내가 거기 있다’ 포스터도 붙어있다.

‘5월 25일 토요일 오후 4시, 7시, 소극장 마중.’


처음 제목을 보고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전설의 근원에서는 부제목이었는데, 드디어 제목이 되었구나.

‘원작가가 전설의 근원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겠지?’


처음에는 나와 상관없는 연극이었다. 그날 연극을 보려고 일정을 잡아두었을 뿐이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대본이 바뀌면서 역할 하나가 추가되었다. 덕분에 나도 끌려 들어갔다.


‘대명천’이라는 하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승에 태어나기 위해 잠시 대기하는 곳이 ‘마고의 게스트하우스’인데, 영혼들은 서로 좋은 자리에 태어나려고 티켓을 바꿔치기하거나, 속임수를 쓰거나 또는 태어나기를 거부한다.


지금의 마고는 살아있을 때 무희였고, 슬픈 사연으로 마고가 되었다. 마고의 힘이 약해지고, 다른 마고로 교체될 시기라서 게스트하우스는 빈틈이 많았다.

이 마고 역할을 나주연이 맡았다.


천옥과 이승을 오가는 인도자가 있는데, 이 인도자는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에 싫증을 느끼고 불만이 가득하다.

처음 대본에는 사업가, 철학자, 발명가의 혼만 있었다. 그렇게 다른 회원 네 명이 각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단장과 장터 단원들이 뭔가 미진하다는 의견을 내면서 점술사가 추가되었다.

원래는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가 기복신앙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풍자하여 목사를 넣으려 했는데, 미신에 맞추어 점술사로 확정되었다.


여기서 내가 맡은 역할이 전생을 기억하고 미래를 보는 점술사였다. 정확히 말하면 점술사로 태어날 영혼이다.


연습실에는 나주연과 다른 회원들이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가방을 내려놓고 대본을 집어 들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아무래도 직장이 먼저이니 시간을 맞추기도 힘들고, 연습에 꾸준히 나오기도 힘들겠지.


직장인반을 담당하는 사비야의 뒤를 따라 원대함과 조아용이 나란히 들어왔다.


조아용이 나주연 옆에 나란히 앉자 원대함이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진짜 둘이 썸 탔어?”

“그게 왜 궁금한데? 사귀었을 수도 있고.”

나주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씰룩거렸다.


그녀의 말에 조아용이 껄껄 웃었다.

“주연아, 여기서 이러면 곤란해. 그때는 해프닝이었지만, 왜? 다시 생각해 보려고?”


“두 사람이?”

원대함이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켰다.

“아용 선배도 취향이 아주 독특하네요.”


나주연의 주먹이 그의 등으로 날아갔다.

“뭐? 너 말이면 다인 줄 알아?”

“아니, 난 나만 독특한 줄 알았지.”


나는 구석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재미있는 커플이었다.

진전이 너무 없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까.


사비야는 연기가 부족한 인도자와 발명가의 장면부터 시작했다.

볼 때마다 살랑 대장이 생각나는 그녀였다. 긴 생머리에 호리호리한 몸집, 얼굴형이며 이목구비가 살랑과 아주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 극단 장터가 좋았다. 살랑 대장과 닮은 사비야가 있고, 스승님과 목소리가 비슷한 단장이 있으니.


사비야가 원대함을 부르자 그도 일어나 인도자와 발명가 사이에 섰다. 대본에 대해 상의할 일이 있나 보다.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조아용이 뭔가 생각난 듯 나주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요즘 어떤 소설 읽는데 말이야. 누가 재밌다고 추천했거든. 글쎄, 우리 단원들 이름이 나오더라고.”


그의 말을 듣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걸 읽는 사람이 진짜 있었어?


“선명해랑 한다발, 공사중. 세 사람 이름이 그대로 나왔어. 한두 번 나오고 지나갔지만, 신기하지? 우리를 아는 사람인가?”


조아용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을 마구 움직이더니 나주연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작가 이름이 이중인이야. 제목은 전설의 근원.”


나는 침을 잘못 삼켜 사래에 걸렸다. 켁켁거리며 기침하는데, 나주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중인?”

그녀의 시선이 원대함에게로 옮겨갔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들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리플렛을 봤겠죠. 출연자 이름도 나오니까 그거 본 거 아닐까요?”


“오! 그래. 우리 무대를 본 사람이 틀림없어. 그런데 왜 내 이름은 안 넣었을까? 이왕 리플렛 가진 거, 내 이름도 넣어주지.”

조아용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명해랑 단장님한테도 알려줘야지.”

조아용이 연습실을 나가자 나주연이 팔짱을 끼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 책이 원대함 거라고 했는데? 그사이 소설도 썼어?”

그녀가 실눈으로 원대함을 노려보는 사이, 나는 입맛만 다시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


공연이 끝난 무대는 쓸쓸하고, 적막하면서도 행복한 꿈을 꾸는 듯 평안해 보였다.


지새늬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갈채를 받고 싶어 했지만, 나는 연극이 끝나고 꿈에 취해있는 빈 무대가 좋았다. 어두운 객석에 앉아 빈 무대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선명해, 공사중, 한다발.

나는 그들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 아이와 스승님과 아저씨에게 준 이름.


‘스승님은 잘 계시겠지?’

이름이 제대로 박혔을까. 알고 싶다.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스승님도, 아이도, 아저씨도. 달빛사원 식구들 모두.


한 번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로 이 세계까지 흘러온 내가 어두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 무대에서 곧 마고가 말할 것이다.

‘어떻게 살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이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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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그리고 2 - '나'라는 무대 22.10.22 29 1 12쪽
» 그리고 1 - 장미의 계절 22.10.22 29 1 11쪽
43 다시 만난 친구들 22.10.21 52 1 12쪽
42 일곱 밤이 지나고 22.10.21 32 1 8쪽
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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