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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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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74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20 10:12
조회
31
추천
1
글자
10쪽

집필

DUMMY

호숫가 옆 오두막이 작은 집필실이 되었다.

바람도 살살 불었고, 햇빛도 따사로웠다. 그림 속 세상은 글쓰기에 딱 알맞은 날씨였다.


그림 바깥의 유연한은 그림에 열중했다. 그의 터치펜이 태블릿 위에서 춤추듯 움직였다. 왼손은 키보드 위에서 쉴 새 없이 단축키를 눌렀다.


어젯밤에는 그림 아래 방바닥에서 글을 썼지만, 집주인에게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장면을 생각하고, 인물을 움직이면 생각이 그대로 글자가 된다. 종이는 순식간에 빽빽하게 채워졌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보다 몇 배의 속도로 글자가 채워지니 유연한은 눈을 떼지 못했다.


‘우와! 이게 뭔가요? 정령님, 마법사였나요?’

그는 꼼짝하지 않고 종이만 들여다보았다.


원작가가 뼈대를 세워놓으니 살만 붙이는 일이다. 괴물도, 인물도 메모를 따라가며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생각이 글자로 바뀌는 거예요. 간단한 주술이지요.’

‘우와, 저도 이런 능력 있으면 좋겠네요. 상상이 그림으로 옮겨지는 거죠. 눈 깜짝할 사이에.’

유연한은 마감해야 할 그림도 잊고 소설에 빠져들었다.


마감을 앞둔 집주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종이 뭉치를 들고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퇴고하고 다듬어서 온라인에 공유할 텐데. 사람들이 읽으면 우리 세계는 그만큼 더 많은 에너지를 갖게 된다.


빠르게 채워지던 생각이 서서히 느려졌다.


‘호야를 만난 다음에 흙의 곤봉을 찾는데, 그게 얼음섬에 있다고?’

얼음섬이면 빙산인가? 북극에 있나? 그럼 옷은 털옷으로 갈아입어?


구하라가 물의 방패를 얻은 곳은 인어의 탑. 여기는 바다이고.

그다음에 별의 심장에서 정상인과 불의 화살을 찾았지. 그건 험한 산속이었어. 용암이 들끓는 높은 산.

여기서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할까?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더니 급기야 펑하고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어? 이, 이거 뭐야?’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깨끗해졌다. 빠르게 채워지던 글자도 멈추었다.


머릿속만큼이나 텅 빈 눈으로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오두막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응? 여기는 그림 속 오두막인데?’


야문과 가디록, 푸르니가 이 층으로 날아 올라왔다. 어차피 날아올 거면서 문은 왜 두드렸대?


“오, 여기 좋다. 심지아가 어디서 지내나 했더니, 이런 곳이 있었네?”

가디록이 두리번거렸다.


푸르니도 어깨를 활짝 펴고 크게 숨을 쉬었다.

“좋다. 물빛도 좋고, 하늘빛도 좋아.”


“왠지 낯익어. 내가 수학하던 서원에 이런 정자가 있었는데.”

야문이 오두막 기둥과 천장을 둘러보았다.


“구경하러 온 거야? 방해하러 온 거야?”

그들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빨리 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음이 다급하여 종이 뭉치를 정리하는 손이 떨렸다.


“도와주러 왔어. 막히는 부분 있으면 같이 고민하려고.”

“응? 막히는 부분?”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데?


“아이디어에 살붙이는 게 쉬운 일이야? 수도 없이 빈틈이 있다고. 그거 메우려면 전혀 다른 시각과 상상이 필요하지.”

야문이 내 앞에 정좌하고 앉았다.


“어때? 잘 돼가?”

“마침 도움이 필요해. 이거 말이야. 흙의 곤봉.”


“얼음섬? 히야, 이거 우리 세계에도 있었는데···.”

푸르니가 바짝 붙어 앉아 아이디어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하얀 바위산을 그렇게 불렀어. 끝도 없는 황무지 한가운데 솟은 뾰족한 바위인데, 온통 하얀색이거든. 그 황무지는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어.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푸르니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눈앞의 황무지를 보고 있겠지.


“억울하게 죽은 사신들이 잠든 곳이라 늘 촉촉하게 젖어있어. 눈물바다 같지. 그래서 섬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어.”


“슬픈 이야기구나. 그 세계에서는 천사들이 빌런인가 보네?”

가디록도 맞은편에 앉아 글자를 훑어보았다.


“완전한 진선미를 이루려면 이 세계에 천사만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무리였어.”

푸르니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솔직히 난 싫었어. 닥치는 대로 죽이거든. 천사도, 사신도.”


‘파이널 헌터’를 쓴 작가의 사정을 듣지 않았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푸르니가 돌아앉아 호수를 바라보는데 그의 등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그보다···. 황무지 한가운데의 얼음섬? 괜찮은데?


머릿속에 장면이 다시 그려지기 시작했다.

하얀 바위라도 딱딱할 이유는 없잖아? 바위 안으로 스며 들어가면 되지.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


상상을 이어가자 종이에 글자가 채워졌다. 빠르게 장면이 떠오르자 글자가 채워지는 속도도 빨라졌다.


야문과 푸르니, 가디록은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사람과 달랐다. 눈을 빛내는 것으로 놀라움을 대신했다.


“좋았어. 이제 세 번째 동료 가디록을 만날 차례야.”

“드디어 내 차례인가?”


“가디록은 청룡족이니까 물 근처에 살겠지? 무기는 바람의 창을 줄 거야. 바람의 창은 한튀사막에 있다고 쓰여있어.”

나는 아이디어 노트를 뒤적였다.

바람의 창이 가진 능력은 쓰여 있지만, 한튀사막이 어떤 곳인지는 설명이 없었다.


“용이 물 근처에 산다는 고정관념을 버려. 난 바람 속에 살고 있다고 해줘. 걸릴 것 없이 지나다니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가디록이 크큭 소리 내어 웃었다.


“한튀라···.”

가디록이 입술을 내밀고 턱을 쓰다듬었다.

“검은 사막이야? 거무튀튀?”


“알았어. 바람 속에 사는 청룡족 무사, 검은 사막, 검은 바람. 바람 속에 사니 바람의 창을 알아보는 유일한 눈이 되는 거야.”


“잠깐, 작별 인사는 하고.”

가디록이 차례대로 야문과 푸르니를 끌어안았다.

“그동안 고마웠어. 심지아를 잘 부탁해.”


세 사람이 둥그렇게 모여 어깨를 토닥이는데 여간해서는 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기다리다 지쳐 다음 상상을 시작했다.


가디록의 이름을 넣자 그의 모습이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야문과 푸르니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오름이 가디록과 만나고, 바람의 창을 찾는 장면까지 끝났다. 다섯 명의 동료가 완성되었으니 차원침입군의 기지를 찾아가는 일이 남았다.


이제부터는 중간중간 열린 연합에서의 사건도 넣어야 한다.

노트에 적힌 대로라면 차오름과 구하라가 모험을 떠난 사이 연합에 괴물이 나타나고, 호수가 마르는 등 재해가 일어난다.


기루다와 해묵은이 마른 호수에 물을 대고, 이단주와 육미호가 산과 언덕을 뒤덮는 불을 진정시킨다.

주방장 도달이도 주술사들을 도와 괴물을 물리친다.


나는 도달이라는 이름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건 완전···. 현재안이 활약하게 하려는 거잖아?’


분명, 이 메모를 쓸 때 현재안이 옆에 있었을 것이다. 작은 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은 스무 살의 원대함과 현재안이 그려졌다.


잠시 숨을 돌리고 종이를 정리하자 푸르니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불렀다.

“심지아, 나도 하고 싶은 거 있어.”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


푸르니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파이널 헌터를 쓰던 작가, 죽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뭔가 이상해.”


푸르니가 아직 흑치였을 때, 만풍산에서 은서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는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어. 그것 때문에 협박을 받았겠지. 마당의 커다란 감나무가 혼잣말하는 걸 들었대.’


“복수하려고?”

야문이 하얗고 긴 소맷자락을 가다듬었다.


“진실을 밝히고 싶어. 작가를 위해서. 나를 만든 사람이잖아? 억울하게 죽었다면 한을 풀어주고 싶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사념체라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어.”

야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푸르니가 나를 보았다.


“그래서 진실을 찾아 소설로 쓰는 거야. 누구라도 진실을 알게 하고 싶어.”

그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푸르니. 나도 돕고 싶어. 하지만 난 곧 소멸할 거야. 소멸하기 전에 소설을 끝내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야.”

“아···, 소멸한다고 했지···.”


푸르니가 한숨을 쉬며 물러나 앉았다.

“괜찮아. 그냥 소망이니까.”


“난 심지아가 떠나지 않으면 좋겠어. 그동안 이귀와 사념체를 많이 봤지만, 심지아 정도의 능력자는 없었거든.”

야문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자, 자. 인제 그만 가시죠. 방해되니까 내일 보자고.”

나는 그들을 일으켜 오두막 바깥으로 밀어냈다.


그림 바깥으로 휘적휘적 떠가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이 유연한의 어깨 위를 지나 창밖으로 나간 뒤에도 가만히 서 있었다. 소설을 써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나도··· 살고 싶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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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 집필 22.10.20 32 1 10쪽
38 결심 22.10.20 30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2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8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30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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