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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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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61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2 10:18
조회
28
추천
1
글자
9쪽

빙의

DUMMY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오디션이란 이런 거구나, 조바심 내며 긴장하다가 허탈해지는 거.’


울음이 사그라들며 지새늬가 고개를 들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려다가 문득 멈추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티슈와 거울을 꺼냈다.

“어휴, 이게 뭐람!”


서둘러 얼룩진 화장을 고치고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지 지켜보니 ‘아빠’로 저장된 번호였다.


신호음은 가지만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가 툭 끊어지더니 ‘회의중’이라는 메시지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어!”

그녀는 빽 소리를 지르고는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빠르게 목록을 넘기다가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두 번째 상대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 받네? 아, 남미로 여행 간다고 했지.”


그녀는 다시 목록을 넘겼다.

“음, 얘는 나한테 화내고 사과도 안 했지? 저는 안 그랬나? 왜 나한테만 그래?”


화면의 이름을 하나씩 넘기며 그녀의 투정은 계속되었다.

“흥, 한 입으로 두말한다고? 내가 어디 그럴 사람이야? 아, 얘는 벌써 데뷔했지. 치이, 나보다 잘난 것도 없는데. 외모로 보나 연기로 보나 내가 낫잖아?”


어떤 이름에서는 잠시 멈추었다.

“얘는 잘 모르겠네. 어디서 만난 사람이지?”


지새늬는 에잇! 소리를 내며 폰을 무릎 위에 얹었다. 전화할 사람이 없는 걸까?


그녀는 넋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잎에 가려 하늘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저 너머에 있는 하늘에 꽂혔다.


지새늬는 친구가 없구나.

그녀의 인생도 소설이라면, 그 작가에게 말하고 싶다. 한 명 정도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차오름도 친구들이 모두 고향에 남아있었지.

달빛사원에는 시동으로 일하는 동생들과 일꾼들뿐이었다. 그도 여기 있는 지새늬처럼 외로웠을 테지.


앞으로 만나게 될 동료와 친구가 될 거라 기대했는데···.

첫 번째 동료를 찾아 오두막으로 가다가 장면이 멈췄다. 그곳에 분명 친구가 있겠지?


작가가 차오름에게 좋은 친구를 만들어주면 좋겠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힘들 때 위로가 되고, 기쁨도 나눌 수 있는 그런. 농담도 나누고, 장난을 쳐도 서로 받아주는 좋은 친구들.


처음 최소희의 집에서 보았던 지새늬의 일기가 생각났다.

‘나더러 할 줄 아는 게 없대. 이 세계에서 난 외톨이, 왕따, 투명인간이라고.’


그녀도 불쌍하구나.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데 슬플 때 전화할 사람이 없다니.


내 말에 반박하듯, 그녀는 다시 스마트폰을 열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매니저님, 왜 전 오디션 보면 떨어지죠?”


“너 또 갔냐? 단역도 어려운데 왜 멋대로 가? 학원 체면도 생각해야지!”

전화 저편의 남자는 몹시 화가 나는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 학원비 냈잖아요? 기부금도 내고요. 데뷔까지 책임진다면서요?”

“실력이 먼저라니까! 그리고, 난 강좌 매니저야, 개인 매니저 아니다. 내 소속은 학원이라고.”

남자는 툭 전화를 끊었다.


지새늬는 폰을 흔들며 빽빽 소리쳤다.

“뭐야! 나더러 단역이나 하라고?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지새늬라고! 지새늬!”


그녀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디션장에서 그녀의 연기를 보지 않았더라면 위로해줄 텐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거 말고 다른 일을 하지 그래? 하고 싶은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

몸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씩씩거리던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새 오빠나 괴롭혀볼까?”


허걱! 저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눈만 껌뻑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오늘도 공연 있겠지? 어리버리 원대함이 뭘 하나 봐야지.”


그녀는 발걸음도 가볍게 돌아섰다.


*


택시 기사는 골목으로 핸들을 돌리려고 했다. 두 블록 들어간 곳에 소극장 간판이 보였다.


지새늬는 손거울을 핸드백에 넣고 카드를 꺼냈다.

“아저씨, 여기서 세워주세요.”


택시가 도로변에 멈춰 서자 그녀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며 내렸다. 구겨진 치마를 털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차도 없이 다니다니, 너무 민망하잖아? 차라리 걷는 게 낫지.”

그녀는 도도한 걸음으로 또각거리며 소극장을 향해 걸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자주 쓰러진다면서? 운전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내 말이 들릴 리 없었다.


곧장 소극장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옆 골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골목에는 천막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트마켓’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골목 위 하늘에 걸려있었다.

작은 천막마다 여러 가지 공예품과 액세서리를 팔았다. 어떤 천막에는 옛날 물건이 바닥에 쌓여있었다. 천막 사이로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구경하고 있었다.


“어머, 이런 걸 다 하네?”

조금 전까지 풀 죽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지새늬는 아기자기한 물건에 눈을 빛내며 콧소리를 냈다.


원대함에게 간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었나?

‘구경하다가 날 새겠네.’


지새늬는 도로에 가까운 천막까지 다가갔다. 물건을 구경하느라 다른 건 보지 않았다.

나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지. 내 일이 먼저니까. 원작가가 소설을 쓰는 일이 더 급하다.


소극장을 향해 막 돌아서는데, 찌릿한 느낌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지새늬?’

불안한 느낌에 나는 그녀에게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사진을 찍느라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그녀는 경적도 듣지 못하고 뒷걸음치며 도로로 발을 뻗었다.


“안 돼!”

급한 마음에 팔을 잡아당겼는데, 그만 그녀의 몸속으로 빨려들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인도로 뛰어올랐다. 가볍게 발돋움해서 가로수 안쪽에 멈춰 섰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욕설을 내뿜으며 지나갔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지새늬의 눈으로 골목과 거리를 둘러보았다.

‘빙의가 이런 거구나.’


달빛사원에서 이론을 배우기는 했지만, 실습은 하지 못했다. 다른 영역에서 연수할 때도 빙의할 일이 없었다.


실증계 사람의 눈은 시야가 좁아서 답답했다. 한눈에 들어오던 세상이 양쪽 끝이 잘린 느낌.

‘사람의 눈은 이렇구나.’


만풍산에서 은서가 해준 말이 이런 뜻이었어.

‘사람의 몸은 감각을 가리는 갑옷과 같아. 그 몸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만 보고 듣거든.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것만 찾고.’


‘그럼 자신이 이해하는 방향으로만 계속 비틀어지겠군요?’

‘지금도 그러고 있어. 그것이 전부인 줄 믿고.’


나는 지새늬의 손과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에 들어와 보니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바람 빠진 풍선, 아니 속 빈 강정이라고 하던가? 겉은 화려하게 꾸며도, 자꾸 쓰러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다이어트는 그만해야 할 텐데.’

아무리 권위 있는 전문의가 얘기해도 그녀가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를 위해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곧 정신이 돌아올 테니까.

의식이 돌아오는 신호가 느껴졌다. 무언가 쿨렁거리며 일어서는 느낌. 서둘러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잠든 듯 앉아있던 지새늬가 고개를 들었다.

“뭐야? 나 왜 이러고 있어?”


자신의 손과 다리를 둘러보더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녀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치맛단이 뜯어졌잖아!”


역시 지새늬구나.

내가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은 조금도 모르겠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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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일곱 밤이 지나고 22.10.21 32 1 8쪽
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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