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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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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67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8 10:22
조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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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0쪽

플랜 B

DUMMY

연극이 시작되면 소극장 마중의 사무실은 조용해진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사무실, 원대함이 켜놓고 나간 노트북만이 빛을 밝혔다. 벽을 향해 희미한 빛을 쏘아대니, 마치 초를 켜놓은 것 같았다.


그룹 갤럭시의 연주는 여운이 오래 남았다.

‘분명 구원자가 있다고 했어.’


커서가 깜빡이는 노트북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일 다시 콘서트에 갈 거니까, 내일은 확실히 들어야지.’


왼손 엄지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창밖을 노려보았다. 하늘은 어두워졌지만, 건물에서 나오는 빛이 밝아 별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구원자를 찾으면 돼. 보름까지는 충분할 거야.”

소파에 기대앉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할 수 있어. 심지아. 할 수 있어.”


구원자를 어떻게 찾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아무런 힌트도 없고.

내일 연주를 다시 들으면 생김새가 떠오를까. 그것만으로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데.


“대리 작가는 안 되겠고. 데뷔한 작가 말고 글을 쓸만한 사람이 없을까?”

작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작가를 만들면 되지.


글재주가 조금만 있어도 가능할 것 같아. 어쩌면, 작가가 아니기에 원고료보다 작품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어.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그래, 누구든 소설을 쓰게 하는 거야.’


이쪽 세계로 넘어와 내가 만난 사람을 하나씩 떠올렸다.

은서님은 안 된다고 했고. 나주연?

아니야. 오래 앉아있지 못 한다고 했잖아. 연기는 어울리겠구나. 직장인반에도 관심 있어 보이던데.


현재안?

아니다. 연애편지를 친구에게 부탁할 정도이니.

유연한?

스스로가 스토리에 재주가 없다고 고백했잖아?

노안타?

음. 그 사람은 작곡하고 연주하고 노래는 하는데 작사는 다른 사람이 하지.


“아우, 뭐야. 글 쓰는 사람이 이렇게 없어?”

가슴을 치다가 문득 책장을 바라보았다. 책 사이 대본도 끼어있었다.


혹시, 단원들중에서?

대본과 스크랩북에는 메모지도 있고, 자기소개서도 있었다. 단원들이 남긴 낙서장도 있었다.


나는 책장을 훑으며 단원들이 썼을 만한 글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연기자이지, 극작가가 아니었다.


‘없어, 없어. 아무래도 여기는 없어.’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단서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공연장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웃음이니 1막 중간쯤이다.


멀티를 맡은 간결희가 사기꾼 도망자로 나오는 장면. 칠순 잔치를 준비하는 감사유와 어진리를 속이려다가 오히려 빈털터리가 되는 대목이다.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마우스를 건드리자 꺼졌던 화면이 다시 환해졌다. 여전히 커서는 무심히 깜빡였다.


원대함의 시나리오 제목은 알고 있다.

‘나의 끝이 너의 시작이다.’

그를 따라다니며 계속 습작 노트와 낙서를 봤으니 내용도 알고 있다.


‘열심히는 하는데, 확 와 닿는 것이 없단 말이야.’

소재도 괜찮고, 캐릭터 설정도 좋은데, 2퍼센트가 부족하달까.


나는 읽어달라고 호소하는 커서를 따라 파일을 살펴보았다.

‘이게 당선되면 작가가 행복해지려나?’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질 테고, 나주연 앞에서도 당당해질 것이다. 작가라는 타이틀이 생겼으니 고백도 하겠지.


내가 다른 구원자를 찾으면 소설이 이어질 테고, 두루두루 잘 되는 거야. 우리 세계는 더 안전해질 테고.


나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몇 군데 대사를 살짝 고쳤다.

‘허밍은 판을 짠 장본인이야. 삼백 년이 넘도록 자신의 최후를 설계했으니 여기서는 후련하겠지.’


‘다시세움에 대한 얘기가 여기서도 나오면 좋겠는데···.’

소리 내어 말하면서 대사를 고치다 보니, 장면의 순서가 바뀌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리본이 주인공을 키워낸 조직이잖아? 리본에서 수지를 헬퍼로 파견한 것도 허밍의 계획이었다면 뭔가 힌트가 있어야지. 복선인 줄 모르는 단서.”


문이 언제 열릴지 신경 쓰면서 살짝살짝 손을 보느라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갑자기 우르르 소리와 함께 허공이 울렸다.


“우왁!”

나는 깜짝 놀라 마우스를 떨어뜨렸다.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연극이 끝난 것이다. 손뼉 치는 소리에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모르게 시나리오에 푹 빠져있었다. 머릿속에서 시나리오의 주인공들이 오락가락했다.


대이변이 지나간 지구, 소수의 상층민은 유전자 변이로 삼백 년 가까이 산다.

그들만 사람답게 살고, 대부분은 사막지역에서 청정에너지를 생산한다. 그들은 편하게 먹고 놀지만, 자신의 생명력이 에너지원이 되는 것은 모른다.


실체가 없으면서 신처럼 숭배되는 허밍, 상층민이면서도 유전자 변이가 불가능해 버림받은 유가현, 그녀를 돕는 두 명의 남자와 세상을 뒤집으려는 리본과 다시세움 사람들.


결말까지 골격은 갖추었지만, 원대함이 어떻게 수정할지 몹시 궁금했다. 그동안 수없이 고쳤지만, 앞으로 수없이 고칠 것이다.


노트북 앞에서 머뭇거리는데, 단장과 원대함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화면이 켜있는 것을 보고 원대함이 서둘러 파일을 저장했다.

“이게 켜있었네. 큰일 날 뻔했어.”


그가 부리나케 노트북을 가방에 밀어 넣자 단장이 피식 웃었다.

“아직도 안 끝났냐?”

“곧 끝나요. 며칠 뒤면 마감이니까, 나흘 안에 끝내야죠.”

“건투를 빈다. 아니, 행운을 빌어야 하나?”


“이번에는 꼭 돼야 해요. 보여줄 사람이 있거든요.”

“아, 그 연?”

단장이 큰소리로 웃었다. 눈가에 주름이 새겨지면서 수염도 따라 웃었다.


“어? 어떻게 아세요?”

“나만 빼놓고 회식한 것도 들었지.”

“그건···.”

원대함이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직장인반에 들어왔거든. 조아용의 추천으로.”

“예? 진짜요?”

원대함은 펄쩍 뛰어오르며 단장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직장인반 입회원서를 펼쳐보며 그가 실실 웃음을 흘렸다.

“드디어 번호를 땄다.”

“그것도 몰랐어?”

“예전 것은 바꿨더라고요. 번호 물어볼 정신도 없었어요. 어찌나 칼바람인지.”


원대함은 자신의 폰을 꺼내 나주연의 번호를 저장했다.

그는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

‘직장인반 등록했네?’


그는 문자를 보내고도 폰만 들여다보았다. 답장이 올 때까지 저러고 있으려나.

그사이 다른 단원들이 들어왔지만, 그는 고개만 까딱거렸다.


나도 꼼짝하지 않고 원대함의 이마 근처에 머물렀다.

‘나주연이 정말 답장할까?’

단원들이 웃고 떠들며 인사하는 데 그도 나도 꼼짝하지 않았다.


띠링, 문자가 왔다.

‘신경 꺼.’

단 세 글자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읽씹할 줄 알았더니. 헤헤.”

싱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한 대 쳐주고 싶었다. 이 문자에 웃음이 나오냐고!


조아용이 흘끗 문자를 보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게 그렇게 좋냐?”

“헤헤, 선배 덕분이죠.”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그 얼음공주가···.”

조아용은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섰다.


사비야가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단장을 불렀다.

“직장인반으로 돈이 될까요? 오히려 짐이 되는 건 아닐까요?”

나는 그녀가 왜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가 직장인반을 맡았으니까.


“걱정 마세요. 비야 선배. 내년에는 재단 지원도 받을 거고. 올해 실적 괜찮아요.”

하루도가 근육질의 어깨를 활짝 폈다.

“설마 내년에도 심사위원 매수가 통하겠어요?”


“우리는 정직하게 가자고요. 편법 쓰면 꼭 끝이 안 좋더라.”

간결희가 가방을 둘러멨다.


사람들이 나가는데도 원대함은 창문 밖을 내다보며 싱글거렸다.

“날씨 참 좋다.”


*


원대함은 집에는 가지 않고 맛집 식당 앞을 어슬렁거렸다.


나주연이 초록색 가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왜?”

“고마워서. 직장인반.”


“오해하지 마. 아용선배 부탁이었으니까.”

“나도 공과 사는 구분한다고.”

그러면서도 원대함은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는 없는 것 같았다.


“아버님 돌아가셨다는 얘기 들었어. 참 잘 해주셨는데. 나 알바할 때.”

“너 또 사윗감으로 찜 받았다는 얘기하려고?”

“아니.”

“됐어. 언젯적 얘기를.”


“그래도 기억하는 거 보니 너도···.”

“꿈 깨.”


나주연이 걸음을 멈추었다.

“너 오늘은 오래 말한다? 도망도 안 가고?”

“저기, 연아.”

“뭐?”

“우리 한번 만나볼래?”


나주연이 집을 향해 돌아섰다. 가까운 공터까지 갈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뭘 믿고?”

“나, 열심히 할 거야.”

“누구나 열심히 해. 매일 죽어가면서도 죽지 않으려고.”

나주연은 가디건 앞을 여미며 원대함을 돌아보았다.


“여하튼 잘해봐. 네가 너 자신을 믿게 되면 그때 보자.”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원대함은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더 답답해서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대충 이 대목에서는 뛰어가서 붙잡는 거 아냐?’


그러나 그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결심을 하는 듯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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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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