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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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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73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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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그리고 3 - 기다려, 차오름

DUMMY

오랜만에 놀이터 미끄럼틀 꼭대기에 앉았다. 그동안 일정이 빠듯해서 여간해서 여기까지 오기가 힘들었다.


날이 맑아도 달빛사원과 연락할 수 없지만, 꼭대기에 앉아 달을 바라보면 고향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념체였을 때와는 달리 몸이 있으니 불편한 것도 많았다.

항상 문으로 다녀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미끄럼틀에 앉아있으면 어느새 방범대원들이 나타나 위험하다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경고한다.


그사이 놀이터와 버스정류장의 이귀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의 어린 이귀들은 천옥에서 찾는 순서대로 돌아갔고, 아직 부름을 받지 못한 다른 이귀들이 들어왔다.

새로 생겨난 이귀들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장난꾸러기고, 심심하다며 놀이를 찾는데 열심이었다.


어린 이귀들도 얘기를 들었는지 내가 미끄럼틀에 앉으면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달은 둥근 접시처럼 아랫부분만 가늘게 빛났다. 구름은 지평선 근처에 머물며 달빛을 가리지 않았다.


달빛에 편지를 그렸다. 차오름에게 닿을 거라 소망하면서 달이 보이면 언제 어디서나 소식을 전한다.

나는 제약에 걸려 우리 세계를 못 보아도, 그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그날 이후로 그의 편지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난 믿는다.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기다릴 거라고. 내가 그때와 같은 마음이니까.


‘차오름, 지금은 열린 연합의 수비대장이겠지? 연합에 경호대가 있기는 하지만, 너라면 그 사람들과도 벌써 친해졌을 거야.


지새늬로서의 나도, 심지아로서의 나도 잘 지내고 있어. 심지아의 이름으로 쓰는 소설도 벌써 삼십 회를 넘겼어.

너도 보면 좋을 텐데. 거기 네 이야기도 넣었거든. 이름은 차오름이 아니지만.


언제 돌아갈지 모르지만,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잖아. 여기서 지새늬로 사는 시간도 다시 오지 않을 삶이니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갈게.’


물끄러미 달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달빛사원에서는 꽃놀이가 한창이겠지.

호숫가를 따라 펼쳐진 들판이 꽃으로 덮일 테고, 하람언덕의 약초밭에도 향기가 진동할 것이다.


지새늬로 지내는 것이 힘들어서 일까. 미늘 호수가 보고 싶었다. 너무나도 절실히.


*


“리플렛의 그림?”

“응. 일러스트를 넣자고 해서 내가 연한이를 추천했지.”

원대함이 진열대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딸기우유를 내밀었다.


오후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시간이 나면 가끔 초고리 편의점에 들렀다.

원대함과 주로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도 배우고, 뉴스에서 이해 못 하는 일에 관해 설명도 듣는다.


실증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살인, 강도에 횡령이라니 정말 모를 일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단어도 모르는 것이 많아 설명을 들어야 했다. 인터넷으로 찾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모르는 단어가 꼬리에 꼬리를 무니까.

화면의 글자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을 들으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지새늬가 그쪽으로는 무지한 캐릭터여서 내가 모른다고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딸기우유를 마시며 유연한의 그림을 떠올렸다.

‘오두막···. 보고 싶다. 거기 머물면 기운이 날 텐데.’


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연한은 남과 다른 눈을 갖고 있으니까.


“너도 가볼래? 그동안 몇 번 봤잖아?”

편의점에서 자주 보기는 했지. 밥을 같이 먹은 적도 있다. 편의점 도시락이긴 해도.


*


어쨌든 그 덕분에 호숫가 오두막 앞에 서게 되었다.

유연한과 인사하고 두 사람이 일러스트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벽을 마주하고 섰다.


그림은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반년 만에 다시 보는구나.

사파이어 빛 호수와 푸른 숲, 맑은 하늘. 아름드리나무에 숨은 오두막의 지붕이 보였다.


나는 호수 표면을 쓰다듬었다. 맑고 차가웠다. 시원한 물소리가 그동안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여기 정령님이 살았어요.”

유연한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서둘러 그림에서 물러섰다.

돌아보니 원대함은 포트폴리오를 펼쳐보느라 등을 돌리고 있었다.


“아, 이상한가요? 믿기 어려운 얘기죠.”

“재미있네요. 이 그림 저한테 파실래요?”

“아뇨. 이건 절대 안 팔아요. 제 보물이거든요.”


그는 아련한 눈으로 그림을 둘러보았다.

“그림이 여기 있으면 정령님이 보러 올 거예요. 꼭.”


나는 할 말을 찾다가 포기했다.

이 그림을 보러 온 것은 맞으니까. 내게 그림이 필요한 것도 맞고.


몸을 입고 있어 그림 속으로 못 들어가는 건 안타까웠다. 이런 건 사념체일 때가 좋았어.


“유연한씨 그림은 맑고 평온해요. 영혼이 맑다는 거죠.”

그림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니.


“이거 찍어가야겠다.”

원대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손짓하자 유연한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재빨리 호수의 물결을 쓰다듬었다. 순간, 햇빛에 물비늘이 반짝거렸다.

‘그동안 고마웠어. 네 덕분에 기운을 얻었어.’


원대함이 다가와 문 앞에 섰다.

“단장님과 얘기하고 바로 연락해줄게.”


나도 따라 나가는데, 유연한이 내 팔을 붙잡았다.

“저기, 저기요. 혹시···.”


내가 돌아보니 그는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아니오, 그럴 리가 없죠.”


그는 얼굴을 붉히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


한낮이라 만풍산 아래 공공도서관은 조용했다. 어찌나 조용한지 사뿐히 걷는 데도 발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나는 궁정 생활에 대해 조사하고, 궁녀에 대해 연구하려고 왔지만, 야문과 푸르니는 왜 따라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서가 사이에 서 있으니 야문의 심의와 복건이 정말 잘 어울렸다. 그에 비해 이세계의 무사복을 입은 푸르니는 물과 기름 같았다. 그는 호위무사에 걸맞았다.


교양을 쌓겠다며 야문과 푸르니는 정신없이 서가를 누비고 다녔다. 사람들이 본다면 정신 사납다고 화를 냈을 것이다.


궁녀로 겨우 하루 촬영했는데, 끝나고 허리와 목이 시큰거려 온통 파스를 붙여야 했다.

대체 왜 그런 자세로 서 있었대? 자세가 너무 나빠서 시름시름 앓다가 일찍 생을 마감했을 거야.


카메라에 안 잡히는 데다 고개까지 숙이고 있으니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마음 편한 일인가.

그러니까 다른 일도 할 수 있지. 예를 들어, 극단 장터의 객원 배우라든가.


직장인반 연극이 끝나고 극단에서 객원 배우를 모집했다. 공사중이 나가고, 사비야가 교외에 카페를 창업하느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사비야는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도 키가 크고 날씬하여 스타일이 좋았다. 거기에 회색빛이 도는 긴 생머리가 매력적이었다.

살랑 대장이랑 비슷한 분위기여서 그녀를 좋아했는데, 떠난다니 몹시 서운했다. 그래도 그녀가 꿈꾸는 미래를 위해서라면야.


소설도 쓰고, 객원 배우도 하려면 역시 카메라에 안 나오는 역할이 좋아.


도서관 마당에 나와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푸르니가 둥둥 떠서 내 머리 위로 날아왔다.

“대장, 이제 그 몸에도 완전히 적응했을 테니 일해야지.”

“무슨 일?”

“진실을 밝히는 일.”


푸르니가 원하는 일은 하나였다. 파이널 헌터의 작가가 왜 죽었는지 진실을 밝히는 것.


“사념체일 때는 못 했지만, 사람의 몸을 가졌잖아?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대개 능력을 잃는데, 대장은 주술사의 능력이 그대로 남았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푸르니가 생각하는 답은 뻔하지. 내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

“여기에서 그 능력으로 일하라는 거야.”


나는 푸르니를 올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푸르니, 만약 네 의심이 진짜라면? 가만히 있을 수 있어?”


야문도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건 나도 걱정된다. 네 성질에 용서할 수 있을까? 작가를 대신해 복수한다고 나서는 거 아냐?”


푸르니는 그대로 허공에 멈추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래. 나를 태어나게 한 작가를 위해 그 정도는 해 주고 싶어.”


“진실을 소설로 각색하는 데서 멈춘다면 도와줄게.”

내 말을 듣고 푸르니도 내려앉았다.


“그건 대장도 의심한다는 뜻이지?”

“음. 조금 알아봤는데 작가가 당한 게 맞는 것 같아. 소송을 건 사람이 강의전담교수가 되었더라고. 그 아버지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그 정도 정보는 컴퓨터 앞에 앉아 몇 번 검색하면 나오는 것들이었다.


“뭔가 냄새가 난다.”

야문이 팔짱을 끼고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가 찾는 증거는 실증계에서 아무런 효력이 없어. 감나무와 길고양이에서 시작하니까.”

“나도 알아. 진실을 밝히는 데서 멈춰야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괜찮아. 작가를 위로하고 싶어.”

푸르니가 어렵게 마음을 정했다.


“그럼, 나도 도울게. 난 학자이고, 넌 전사야. 우리가 힘을 합하면 못 할 게 뭐 있어?”

야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게다가 대장은 사람이면서 주술사의 마법력을 갖고 있잖아. 우린 환상적인 팀이야.”


주술사의 능력,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처음에는 사라질까 봐 불안했다.

아직까지 그대로인 걸 보면, 푸르니의 말대로 할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치러야 할 대가에 그 ‘일’도 포함되는 건가.


“감나무를 찾아가자.”

나무를 찾는 건 쉽지. 이귀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이귀들이 좋아하며 뛰어오를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러나···. 여기서 또 몸을 가진 자의 비애를 느껴야 한다.

단서를 찾아다니려면 버스나 택시를 타야 하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정에 맞춰서 다녀야 하고···.

이것이 직장인의 비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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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일곱 밤이 지나고 22.10.21 32 1 8쪽
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30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2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8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30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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