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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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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72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20 10:11
조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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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결심

DUMMY

큰솔하우스 이 층, 원대함의 원룸은 잠든 듯 고요했다.

주인은 편의점에 있을 시간이고, 원작가에게는 애완동물도, 내게 말을 거는 화초도 없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옷장 서랍을 열었다.

아이디어 노트와 스프링 책을 꺼내 드니 심장이 빨리 뛰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아. 심지아, 할 수 있어.’


쓰다 만 소설을 처음부터 새로 읽었다. 이번에는 그냥 읽지 않고 모조리 외웠다.

‘전설의 근원’, 우리의 세계가 더 분명하게, 더 자세하게 보였다. 관찰자가 진실을 본다는 건 이런 뜻이지.


집주인 원대함은 편의점에서 곧바로 어머니의 병실로 갈 것이다.

그가 오늘도 밤늦게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손과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모든 메모를 외우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원작가가 끝까지 지어놓은 이야기. 이걸 엮기만 해도 우리 세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초안만 지어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고, 완성한다면 그때는 영원해질 것이다.


나는 원작가의 노트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우리 세계의 다음 이야기가 끝없이 펼쳐졌다.


*


한낮의 놀이터에는 어린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뛰어다녔다.


가을 찬바람을 못 느끼는지 여전히 여름을 달리고 있었다. 아이 엄마들은 벤치에 앉아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나는 구석 벤치에 앉았다. 그늘이 짙고 으슥해서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는 곳이다.

가끔 자동차 경적이 상념을 깨워주었다.


도시의 소음들 사이로 금은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심지아님! 무슨 일이에요? 이귀들이 찾아와서 놀랐어요.”

“그러게. 한낮에 주술을 거는 건 아닐 테고.”

금은비의 뒤를 따라 고충만도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할 말이 있어요.”

“보통 일이 아닌가 본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고충만이 내 앞에 섰다. 그는 실뭉치처럼 몽실해진 수염을 쓰다듬었다.


“작가는 소설을 안 쓴다고 하고, 대리 작가도 못 찾았어요. 그래서···.”

“그래서요?”

금은비가 내 옆에 앉았다.


“내가 쓸 거예요. 전설의 근원.”

“뭐라고요? 미쳤어요?”

금은비가 소리 지르며 뒤로 물러앉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알아요. 파견의 주술을 어기면 혼까지 소멸한다고요! 분명 들었단 말이에요.”

“지금 우리 세계가 지워지고 있어요. 이대로 있을 수 없어요.”


“그래도 혼은 남지 않아? 다른 영역에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잖아?”

고충만이 팔짱을 끼고 서서 손가락으로 팔뚝을 두드렸다.

“증명할 수 없으니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멈추었다.


“정말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금은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달빛사원과 연락이 끊어졌어요. 우리 세계도 이미 많이 지워졌고요. 당장 시작해야 해요. 소설이 시작되면 사람들이 돌아올 거예요. 사라진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살릴 수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금은비는 두 손을 모으고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난 심지아님을 도울 수 없어요. 우리는 주술사도 아니고, 마법도 몰라요.”

“혼자 할 수 있어요. 두 분을 소설에 다시 넣어줄게요.”


“정말요?”

금은비가 눈을 빛냈다. 고충만도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나는 두 사람을 위해 웃으려고 애썼다. 얼굴이 굳어 입꼬리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지만.


‘그토록 마법과 주술을 열심히 수련한 이유가 이것이었나.’

그래도 다행이었다. 내가 결심한 일은 주술과 마법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어떻게 넣어주려고요?”

“금은비님은 이미 연합에서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작가의 노트에도 그 이상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요.”


“그럼···.”

금은비와 고충만이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기루다 대표님이 편지를 받는 거예요. 금은비님이 보낸 편지요. 소설에 이름이 한 번 더 나오는 거죠.”

“그럼 난? 난 차원침입군에게 죽은 걸로 되어 있는데?”

고충만이 눈을 빛냈다.


“그건···.”

내가 설명하려는데 금은비가 손을 뻗었다.


“잠깐!”

금은비가 벌떡 일어나더니 고충만의 팔에 손을 끼웠다.


“좋아요. 심지아님이 하신다면 저희는 따라야죠. 그 편지에 이렇게 써주세요.”

그녀는 고충만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저는 고향에서 식당을 열었어요. 장사가 아주 잘 돼요. 죽은 줄 알았던 고충만은 심하게 다쳐서 동네 뒷산에서 발견되었어요. 저의 지극한 간호로 살아난 거죠.”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싱긋 웃었다.


“고충만은 식당 옆에서 가구를 만들어요. 목수 일을 다시 시작한 거죠. 그리고 금은비와 고충만은 곧 결혼한다고 써주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고충만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 약초도 키울 줄 아는 사람이야. 바람의 사원에서는 조경사로 이름을 날렸다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지금 바로 쓸게요.”

“아니, 아니!”

이번에는 고충만이 손을 저었다.


“우리 이야기는 내일, 내일 써줘. 현재안과 작별 인사는 해야지. 좋은 친구였는데.”

“그래요. 여기 와서 처음으로 사귄 사람이에요. 비록 악수는 못 해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훌훌 날아올랐다.


그들이 사라진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쪽 세계에서 인연을 쌓으면 안 된다는 파견 주술의 제약. 그들이 현재안과 만난 것도 주술의 금기를 어긴 일이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설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 세계에서 행복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구태여 알릴 이유가 없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나 하나로 충분하다.


기다렸다는 듯 야문과 가디록이 다가왔다.

도시를 돌며 소식을 모은다더니 오늘 일정을 벌써 끝낸 건가.


“심지아, 진짜 네가 쓸 거야?”

가디록이 어두운 눈빛으로 내 옆에 앉았다.


“작가가 써놓은 줄거리가 있으니까 내가 쓴다고도 할 수 없지. 엮는다고 할까?”

“그래도 네가 소멸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괜찮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살아남으니까. 그들도 나도 충분히 행복할 거야.”

“쯧쯧, 겨우 생각해낸 방법이···.”

가디록이 혀를 끌끌 찼다.


“가디록, 너도 소설에 넣어줄게.”

“뭐? 진짜?”

“벌써 생각해놨어.”


“혹시 지나가는 사람은 아니겠지?”

“차오름이 세 번째로 만나게 될 동료야. 날렵하고, 까칠하며, 말이 별로 없지만, 의리파야. 청룡족, 스물두 살. 어때?’


가디록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완전 중요한 역할이잖아? 내 삶에 이런 행운이 오다니! 시, 심지아! 넌 정말 대단해!”


“어째···, 이리도 금방 말이 바뀌는가? 쯧쯧.”

야문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가디록에게는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역시, 넌 최고의 주술사야. 원작가의 시나리오를 살핀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재주를 타고난 거야. 그러니까 고칠 게 눈에 보이지.”

가디록은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소설 속 세상으로 돌아간다, 가디록! 스물두 살의 청룡족 젊은이라고? 맡겨줘. 내가 가서 너의 차오름을 잘 돌봐줄게.”

“나의 차오름?”

“어떤 괴물이든, 어떤 적이든 내가 있는 한 누구도 차오름을 건들지 못할 거야. 날 믿어.”


‘동료3’을 가디록으로 정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나의 차오름을 지킬 수 있다. 소설이 끝나도 그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시나리오는? 다 끝났어? 시나리오가 당선되면 작가가 행복해질 거라며?”

야문이 점잖게 물었다.


“대충. 나머지는 작가가 해낼 거야. 난 전설의 근원에 집중해야지.”

작가가 행복해야 소설 속 세계도 행복해진다. 여기서 조금 더 원대함을 돕고 싶었는데.


소설을 시작하면 나는 언제 소멸할지 모른다. 소멸하기 전에 끝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니, 그를 도울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원대함이 계속 행복하면 좋겠다. 그는 차오름을 만든 사람이니까.


*


유연한이 그린 그림 속 오두막에 앉아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에는 원대함이 써놓은 이야기가 펼쳐졌다. 처음에는 큰 덩어리로 뭉쳐있던 이야기가 조각도로 손질하듯 모양을 잡아나갔다.

노트에 적은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세우고, 그 장면에 나오는 장소와 사람들을 그렸다.


그들의 표정, 말투, 옷과 무기, 주변의 냄새와 색깔, 주위의 분위기가 눈에 그려졌다. 해야 할 말과 할 일, 이야기에 필요한 물건도 보였다.


‘차원침입군이 이천 명이 넘었지? 차오름과 구하라, 정상인, 호야, 가디록. 이 다섯 명이 이천 명과 맞서 싸운다고?’


어쨌든 이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승리의 단서는 희미했다. 원대함은 ‘차오름이 모든 전투에서 승리함’이라고만 써놓았다.

어떻게 싸우는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전설의 무기 다섯 개를 얻은 다음이니까, 당연히 전설의 무기로 싸우겠지.

빛의 검, 불의 화살, 바람의 창, 물의 방패, 흙의 곤봉.


마른 협곡에서 구한 빛의 검은 차오름 것이다. 인어의 탑에서 찾은 물의 방패가 구하라의 것이고.

그럼, 별의 심장에서 찾은 불의 화살을 정상인에게 줘야겠구나. 호야에게 흙의 곤봉을, 가디록에게 바람의 창을 줘야지.


그것으로 어떻게 싸우느냐가 문제구나.

전설의 무기는 마법력이 있다. 그렇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지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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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2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8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30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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