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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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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48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04 15:00
조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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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8쪽

이중인의 정체

DUMMY

원대함의 방은 유연한의 반지하보다는 낫지만,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깔끔하고 반듯한 것으로 따지자면 나주연의 방이지. 지새늬의 것은 너무 화려해서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를 정도니까.


들어서자마자 책상 위를 살펴보았다. 분명 손글씨가 있을 것이다.

모니터 옆에 책이 쌓여있는데, 맨 위에 ‘황혼의 이중창’이라는 대본이 있었다.


‘이게 놀이터에서 말하던 그 이중창이구나.’

이중창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지만, 지금은 대본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쌓여있는 책과 대본을 휘리릭 넘겼으나 손글씨는 없었다.

요즘은 아이디어를 모두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저장하나. 우리를 위해 손글씨도 남겨놓지.


책상 위에 파일철도 있었는데, 표지에 ‘시나리오’라는 글씨가 보였다.

‘이거다! 이건 손으로 쓴 거야.’


네 글자만으로는 구분하기 힘들었다. 첫 번째 쪽지는 너무 흘려 써서 글자라고 할 수 없었다.


파일철은 원고를 출력한 것이지만, 사이사이 메모가 끼어있었다.

가장 긴 메모를 꺼내 보았다. 작품 소개인가.


- 수면 상승과 지각변동으로 대륙이 하나 남은 먼 미래.

유전자 조작으로 세 배의 수명을 갖게 된 상층인들은 다른 사람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사막에 살게 한다.


유가현은 상층인이면서도 유전자 조작이 불가능한 변이체. 그녀는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으로 바꾸고자 ‘다시세움’이라는 조직을 만든다.


상층인들의 패권 다툼, 기계 인간의 방해를 이기고, 핵심 타워를 파괴하지만. 세상을 조종하던 뇌, 허밍이 바라는 것 역시 완전한 파괴였다. -


‘뭐야? 왜 이렇게 암울해?’

전설의 근원과는 전혀 다른 미래의 이야기였다. 뭔가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


‘나의 끝이 너의 시작이다.’

제목도 참 희한하게 지었네.


글씨체는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아이디어 노트에 있던 글자는 힘이 있었다. 약도도 대충 쓴 글씨지만 획이 시원시원했다.


십 년 전이니 그사이 힘이 빠질 수 있지만, 글자의 기울기나 둥근 획의 처리는 비슷했다. 가로 선이 살짝 올라가는 모양도···.


다른 종이도 꺼내 보았다. 여러 개를 한꺼번에 보니 알 수 있었다.

‘틀림없어!’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어.’

심장이 쿵쾅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었다.


*


차오름이 용사로 출정하기 전날 저녁, 그가 해준 말이 있다. 그것은 소설에 없는 우리만의 이야기였다.

소설에는 간단하게 몇 줄 나온다.


---


내일 떠난다.

차오름은 잠을 못 이루고 별을 바라보았다.


구하라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니. 가슴이 설레었다. 그녀와 더 가까워지겠지.

그는 해치족 용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정한 용사가 될 것이다.


용사 차오름은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다음날 떠나야 했다. 멀고 먼 곳으로,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그때 차오름은 열아홉 생일을 막 지났을 때였다.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고 싶어 그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사원 식구들과는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니그는 남매 같고만, 오빠가 떠나는데 누이가 모르면 되누?”

“어허, 심지아가 누나지. 두 살이나 많은데.”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걱정 마라. 차오름이 듬직하니, 잘 해낼 거다.”


그래도 직접 얼굴을 보고 무사히 돌아오라고 축복해주고 싶었다.

‘하람언덕에 있나?’


우리가 자주 앉아있던 곳을 떠올렸다.

나는 정신없이 언덕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하람언덕 중턱에서 달빛사원과 미늘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잔잔한 미늘 호수에 거울처럼 반달이 비쳤다.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별이 쏟아질 것 같았다.


“왜 혼자 있어?”

“한동안 여기 못 앉을 테니까요.”

그의 웃음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달빛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왠지 평소와 달랐다.


“넌 잘 해낼 거야. 걱정하지 마.”

“알아요. 무슨 일이든 어딘가에 해결책도 있을 거예요.”

“맞아, 그럴 거야. 넌 주인공이잖아?”


우리는 말없이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오 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었다.

그동안 그와 나는 너럭바위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향과 가족 이야기, 사원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들.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몇 가지 간단한 주술과 마법도 가르쳐주었다.


“작가는 모험을 꿈꾸나 봐요. 수많은 위험을 뚫고 고비를 넘기며 승리하는 상상을 하겠죠.”

그는 바닥의 풀줄기를 뜯어 아래위로 천천히 흔들었다.


“구하라와 비슷한 여자를 좋아할 거예요. 그분도 작가를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소설 속 구하라와 비슷하다면 상당히 매력 있는 여인일 것이다. 아름답고, 능력 있고 강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에요. 난 차오름이고, 내 삶이 있거든요. 소설이 끝나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예요.”

“무슨 일을 하고 싶어?”


“고백할 거예요.”

“고백?”

나는 놀라서 소리 질렀다.


차오름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설마 구하라··· 는 아닐 테고. 그녀라면 구태여 소설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잖아.


가끔 그가 멀리 시선을 두고 서 있던 모습이 기억났다. 넋 놓고 있던 이유가 그 사람을 생각하느라 그랬구나.


“우와,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은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몰라요.”


“저런···. 너라면 굉장히 멋진 연인이 될 텐데.”

가슴이 찌릿거리며 칼에 베이는 듯 아팠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도닥였다.

내가 욕심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보는 것만도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하거든.


“누나는요? 누나는 뭘 하고 싶어요?”

“나? 나는···.”


뭘 물어봐.

내가 바라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랑 알콩달콩 재미있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는 거지.


차오름과 함께 사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침이 흘러나오기 전에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전설의 근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하고 싶어. 그 후로 오랫동안.”

“어디서 많이 듣던 구절이네요?”

“하하, 그런가.”


차오름은 정색을 하고 나를 보았다.

“가끔 안부 물을게요. 누나한테 생각신호 보내는 방법 배워서 다행이에요.”

“그래. 궁금한 사람 있으면 말해. 잘 보고 얘기해줄게.”

“좋아요.”


그 후로 여러 번 생각신호를 주고받았지만, 파견의 주술로 나올 때는 알리지 않았다.

파견되었다가 돌아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시 못 볼 테니,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원대함은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이내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현재안은 멀쩡하게 돌아가던데.


‘용사가 되고 싶었다고? 이쪽 세계는 딱히 용사가 필요해 보이지 않던데.’

잠에 빠진 작가를 내려다보았다.


‘작가는 용사의 이름으로, 위험을 뚫고 고비를 넘기며 승리하는 꿈을 꿀 거예요.’

그건 어느 세계에나 들어맞는 말이다.

누구의 삶이든 위험과 고비가 있으니까. 모두 역경을 이기고 승리하고 싶어 하니까.


그런데 왜 자기 이름을 쓰지 않고 이중인이라고 했을까?

원대함이라고 썼으면 금방 찾았을 텐데.


괜찮아, 아직 시간이 남았어.

전설의 근원을 기억하게 해야지. 보름이 오기 전까지 다음 내용을 시작하기만 하면 돼.


내일 아침에 그에게 암시를 걸 것이다. 단어 몇 개면 바로 생각해내겠지.


창문으로 가로등 빛이 새어들었다.

보름달처럼 둥글고 환한 빛을 보고 있으니 차오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작가가 구하라와 비슷한 여자를 좋아하나 봐요.’


가만···. 원대함이 좋아하는 상대?

그녀가 있으면 소설을 더 빨리 쓸지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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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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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4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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