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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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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80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7 09:32
조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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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0쪽

훼방꾼들

DUMMY

카페 카르페디엠은 소극장 마중에서 멀지 않은 골목에 있었다. 넓은 정원에 이 층짜리 하얀 벽돌집이라 푸근한 인상을 주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달빛사원의 도움관에서 하람언덕을 바라볼 때도 이런 분위기였는데···.

아니지, 지금 감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야.


그들의 약속은 오후 6시. 아직 이십여 분 남았지만, 원대함과 조아용은 벌써 카페 앞에 와있었다.


“다 둘러봤는데, 안 왔어요. 그 애 성격에 십 분은 일찍 올 거예요. 제가 지키고 있다가 오면 신호할게요.”

“알았어. 이 층에서 기다릴게. 네가 아는 척하고 있으면 내가 끼어들면 되지?”


원대함은 꾸벅 인사를 하고 여러 차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긴장되나 보다.

이럴 거면 편의점에 왔을 때 제대로 얘기하지 왜 지금까지 기다렸을까.


‘나주연도 원대함이 싫지 않은 것 같던데···?’

실증계 사람들은 솔직하지 못하구나. 좋으면 좋다, 얘기하면 안 돼?


하긴···. 나도 차오름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다. 그는 우리 세계의 주인공이고, 그의 곁에는 늘 구하라가 있었으니까.


나는 조아용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자리를 둘러보다가 깜짝 놀라 몸이 굳었다. 나주연이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원대함이 둘러봤다고 했는데? 게다가 약속 시간까지 한참 남았고.

에휴, 혹시 화장실에 간 사이 휙 둘러보고 내려간 거 아니야?


어쨌거나 그녀가 여기 있다고 원작가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어떻게 알리지?

고민할 사이도 주지 않고, 조아용이 빠른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여어, 얼음공주! 오랜만이다.”

“어? 아용 선배!”

나주연은 조아용을 보고 활짝 웃으며 일어섰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조아용은 스스럼없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도 따라서 그들 곁에 앉았다.

“히야, 이렇게 만나다니. 이런 우연이 있나.”


그가 손을 내밀자 나주연도 반갑게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잖아도 궁금했어. 그···, 아버지 소식은 들었어.”


“예에. 그래도 고생 많이 안 하고 가셨어요.”

나주연은 눈을 아래로 뜨고는 쓸쓸히 웃었다.


“힘내라. 해줄 말이 이것밖에 없네. 요즘 어떻게 지내?”

“저 도배사해요. 이 바닥에서는 잘 나가는 신의 손이랄까.”

나주연은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냈다.


조아용이 활짝 웃으며 명함을 받았다.

“너 손이 빠르고 꼼꼼하잖아? 성격도 까칠하고. 하하하.”


그가 너털웃음을 짓자 나주연이 새침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요. 선배는 어때요?”


“응. 난 연기하는데···.”

갑자기 조아용의 얼굴에 범상치 않은 미소가 지나갔다.


“그러잖아도 오늘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을 거야. 그것 때문에 왔거든.”

조아용이 목소리를 낮추고 어깨를 기울였다.


“후배가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여기서 소개팅한대. 그거 막으려고 나왔어.”

“오, 재밌겠네요. 어떻게 할 건데요?”


“내가 구남친이고, 후배가 현남친 역할이지. 후배가 시비를 걸고 있으면 내가 숟가락 얻는 거지. 쐐기를 박는 달까?”


나주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 후배, 좀 쩨쩨하네요. 그 정도면 그냥 고백하지, 왜 이런데요?”


“내 말이. 아무래도 사정이 어려우니까 그러겠지.”

조아용은 쓰읍 침을 삼켰다.

“여태까지 되는 일이 없었거든. 집안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여러모로···. 애는 참 착한데, 안쓰럽지.”


그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카페 맞은편 가로수 아래 단원들이 모여 기웃거리고 있었다.

하루도와 간결희는 원대함을 바라보며 키득거렸지만, 선명해는 심각한 얼굴이었다.


나는 유독 선명해에게 눈길이 갔다.

단원들이 구경하러 온다는 말은 언뜻 들었지만, 선명해가 올 줄은 몰랐다. 원대함의 지독한 짝사랑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는 하겠구나.


“그런데, 여기 혼자 왔어?”

“약속이 있었는데, 취소됐어요. 갑자기 응급환자가 들어와서 꼼짝 못 한대요. 어차피 시간도 남고, 커피도 마시고 싶어서요.”


조아용이 얼굴을 활짝 펴며 시원하게 웃었다.

“우와, 이거 우리 다시 만나라는 하늘의 계시 아닐까?”


그의 말에 나주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선배, 그런 농담 재미없거든요.”


그녀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약속이 몇 시래요?”

“응? 시간 지났는데? 이상하다. 왜 연락이 없지?”


그때 헐레벌떡 원대함이 이 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그는 조아용을 발견하고 창가 자리로 다가왔다. 나주연은 창문 밖을 보며 등지고 있었다.


“시간을 잘못 알았나 봐요. 이렇게 늦을 리가 없는데···.”

말하다 말고 원대함은 입을 다물었다. 나주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 저, 저기. 그러니까···.”

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심하게 더듬었다.


“오늘 아니래?”

조아용이 턱을 받치고 원대함을 올려다보았다.

원대함이 굳은 채 가만히 있자 그는 손으로 나주연을 가리켰다.


“이쪽은 내 후배. 대학 다닐 때 연극 동아리 같이 했어.”

조아용이 원대함을 소개하려 하자 나주연이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팔짱을 꼈다. 원대함을 바라보며 다리를 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너였어? 그 찌질한 후배가?”

“어?”


원대함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 터지기 직전이었다. 두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제야 조아용은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켰다.

“네 짝사랑이 그럼···.”


그는 참지 못하고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웃다가 배를 붙잡고 눈물을 찔끔거렸다.


단원들도 이 층으로 몰려왔다. 세 사람은 모른 척 다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원대함이 카페로 들어왔으니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고 보러 온 거겠지.


“이런, 이런. 난 그것도 모르고.”

조아용이 숨을 고르며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럼 난 빠질게. 둘이 얘기해.”

조아용이 일어서니 나주연도 따라 일어났다.


“선배, 오랜만에 만났는데 식사라도 같이 해요. 구남친은 아니지만, 남친될 뻔은 맞으니까요.”

조아용이 어깨를 움찔거리는데도 나주연은 눈웃음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야야, 그러지 마라. 입장 곤란해져.”

“왜요? 혹시 몰라요. 이것도 하늘의 계시일지.”

나주연이 고개를 돌려 윙크하자 조아용의 눈동자도 빠르게 움직였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그녀의 신호를 알아챘는지 그는 헛기침으로 목을 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앉아라. 앉아서 얘기하자.”

“이렇게 선배를 만나니 너무 반가워요. 뭐해? 너도 앉아.”

나주연의 눈짓에 원대함이 쭈뼛쭈뼛 자리에 앉았다.


“언제 술 한잔하죠. 오늘 어때요? 약속도 취소되고 기분도 꿀꿀한데.”

“좋지. 셋이 한잔할까?”


“그런데 둘은 어떻게 알아요?”

“극단 식구. 대함이는 연기보다는 희곡 쪽이고. 요즘은 시나리오 준비한대.”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가는 데도 원대함은 고개만 푹 숙이고 한 마디도 끼지 못했다. 지켜보는 내가 답답할 정도였다.


조아용이 다른 단원들이 앉은 테이블로 옮겨가자 원대함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소개팅은···.”

“취소되었어. 너 뭐야? 스토커야?”

“아, 아니야.”

원대함이 두 손을 휘저었다.


저쪽 테이블에서는 조아용까지 네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아 창가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덟 개의 눈이 깜빡이는데 전등 빛까지 더해져 괴기스러웠다.


“한 번만 기회를 줘. 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게.”

“무슨 기회? 뭔지는 몰라도 여러 번 있었을걸? 넌 매번 도망갔고.”

“그때는 그럴 사정이 있었어.”

“핑계도 좋다.”


나주연이 핸드백을 들고 일어났다. 원대함이 핸드백 줄을 잡았다.

“너 오늘 생일이잖아? 밥 사줄게. 먹고 가.”

“하! 이 대목에서 내가 감동해야 하니?”


말은 뾰족하게 하면서도 나주연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녀는 은근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두 사람이 재미있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만, 오늘이 10월 23일. 뭔가 낯익은 숫자인데. 데자뷰인가?

1023! 그래, 원대함의 집 비밀번호. 나주연의 생일이었구나.


나주연이 손짓하자 조아용이 빠르게 다가왔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극단 사람들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오늘 대함이가 밥 산대요. 선배도 가요.”


원대함이 빠르게 고개를 젓자, 조아용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나주연이 조아용의 옆구리에 손을 끼웠다. 옆구리를 찌르자 조아용이 켁켁 기침을 했다.


“그래? 얘기가 잘 됐나 보네. 그래도 내가 낄 자리는 아니지. 일행도 있고.”

“뭘 걱정이에요. 다 같이 가죠!”


나주연은 생글생글 웃으며 단원들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조아용이 그녀를 소개하자, 손뼉을 치며 반가워했다. 물론, 선명해는 빼고.


“맞다, 너 직장인반 들어와라. 너도 한때 연극에 열정을 불태웠잖아?”

“좋은 생각이야. 주연씨라면 언제든 대환영이죠!”

하루도가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카페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원대함만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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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8 1 12쪽
39 집필 22.10.20 32 1 10쪽
38 결심 22.10.20 30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2 1 10쪽
» 훼방꾼들 22.10.17 35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8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30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30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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