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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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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56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2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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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다시 만난 친구들

DUMMY

초고리 편의점에서도 불이 환하게 밝았다. 대낮이라도 11월의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형광등 빛이 더욱 밝게 보였다.


원대함은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조끼를 입고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원작가를 바라보며 다가가는데 누군가 내 앞에서 먼저 문을 열었다.


반지하방의 유연한이었다.

여전히 꾀죄죄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는지 눈이 퀭하고 어두웠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한가? 지금 나는 지새늬의 몸에 들어와 있으니.


내가 뒤에 서 있으니 흘끗 돌아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아, 예.”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에 원대함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왜 같이 들어와?”

“예? 누구요?”

유연한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목덜미를 긁적였다.


“내 동생이야. 지새늬. 새늬야, 인사해. 큰솔하우스 식구고 그림 그리는 유연한.”

“예. 반갑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도 고개를 끄떡이고는 진열대를 돌아갔다.


“그런데, 넌 왜 왔어?”

“오빠 보러 왔어.”

“야야. 나,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된다. 그 말투. 아우, 닭살.”

원대함은 양쪽 소매를 쓸어내리며 진저리쳤다.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해도 말이야, 이 정도는 아니지.”

“오빠는 내가 살아나서 싫어?”

“아니.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무슨 일이야?”


“은서 언니 만나고 오는 길에 들렀어.”

“그 만화방? 그 사람 소설 쓰지? 괴기 소설.”

“오빠도 알아?”

“이름만. 연이한테 들었어.”


“주연 언니하고는 잘 돼가?”

“별걸 다 참견이네. 너 원래 남한테 관심 없잖아?”


유연한이 샌드위치와 우유를 골라 들자 원대함은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유연한이 나갈 때까지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눈이 어디까지 알아보는지 궁금했다. 나를 흘끗 돌아보기는 했지만,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사람의 몸에 들어오니 못 보는구나. 역시.’


리본을 달아놓은 이벤트 상품을 구경하는데, 원대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런데 네가 연이를 어떻게 알아?”


아뿔싸. 지새늬는 나주연을 모르나?

나는 재빨리 지새늬의 기억을 소환했다. 그녀의 모든 기억과 지식이 남아 있지만, 제때 꺼내 쓰는 일은 아직 서툴렀다.


“아, 예전에 주연 언니가 들뫼무역에서 일할 때, 행사에서 만났어. 내가 모델 했거든.”

“음. 그걸로 나와 연이를 엮다니···.”


원대함이 팔짱을 끼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 혹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히지 않았다.

“그동안 나 쫓아다녔냐?”

“아우, 아니.”


나는 두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작가를 따라다녔으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만.


빨리 나가야겠다. 더 있다가는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몰라.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거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현재안이었다. 사람들이 아주 날을 잡았네. 내가 오는 줄 어떻게 알고 딱 맞춰 몰려오다니.


여기서는 현재밖, 현아웃이라고 불려도, 내게는 도달이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잔치를 벌여주었겠지?’

달빛사원의 식당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현재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발을 끌 듯 걸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작별 인사하러 왔다.”

“뭔 말이야? 합격했다는 말은 아닐 테고.”

“사는 게 시시해졌어. 만화도, 술도.”


원대함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

“나 며칠 동안 신기한 경험을 했거든. 취하면 유령이 보이는 거야. 커플이었다고. 아저씨가 훨씬 나이 들어 보였지만.”


누구를 말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좋은 술친구였다고 했다. 고충만과 금은비가 소설로 돌아갔으니 다시 보지 못할 텐데.


“엄청 즐거웠어. 얘기도 잘 통하고. 만화책보다 훨씬 재미있었어. 바다를 항해하기도 했다고.”

현재안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갑자기 떠난다고 하더니 도무지 나오지를 않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어디서 만났는데?”

“내 방. 문에 붙은 그림 있잖아. 남태평양 휴양지. 거기 오두막에서 지냈어.”


원대함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현재안의 눈앞에서 손을 저었다.

“낮에도 꿈꾸냐?”

“넌 몰라, 임마.”


현재안은 울 듯한 눈으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다.

뭐라고 위로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가 테이블을 탕 두드렸다.


“이런 생활 지긋지긋해. 벗어나고 싶어.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얘기가 왜 그렇게 되냐?”


“아버지가 일 도와달라고 하셨어. 공부 그만둔다고 했더니 좋아하시더라. 화낼 줄 알았는데···. 더 추워지기 전에 빨리 내려오라는 거야.”

현재안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나도 사람 노릇해야지. 언제까지 빈둥거릴 수는 없잖아.”

그의 목소리에 힘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기다려. 일 끝나고 한잔하자.”

“좋지.”

좋다는 말과는 다르게 현재안은 어깨를 들썩이며 힝힝 울상을 지었다.


*


지새늬의 몸으로 빨려들고 이레 만에 놀이터를 찾았다.

놀이터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바뀐 것은 나 혼자였다.


그녀와 함께 있던 사흘 동안 몸은 혼수상태였다. 깨어나서는 계속 지새늬의 방에 누워있었다. 새로운 몸에 적응하고, 생각대로 팔다리를 움직이기까지 연습이 필요했다.


오늘이 첫 외출이었다.

첫 외출치고는 성공적이었다. 짱짱 만화방에서 초고리 편의점을 거쳐 놀이터까지 나왔으니.


지새늬의 눈으로도 이귀와 사념체가 보일지 궁금했다.

심지아로서 가졌던 능력이 모두 사라졌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다.


놀이터로 들어가는데 은서가 나를 불렀다.

“야문과 푸르니 만나려고?”

“지금 퇴근하세요?”

“너 보려고 나왔어.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은서는 성큼성큼 놀이터로 들어갔다. 실증계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어서 우리는 구석으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니 수니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서님! 오셨어요?”

이귀들의 요란한 인사가 들리고, 모습도 또렷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릴 때 정류장에 있어야 할 이귀들이 안 보여서 능력이 사라진 줄 알았다. 아름드리나무 위 구석구석에 숨어있었나 보다.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손뼉을 쳤다.

수니홀은 나를 보더니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야문과 푸르니도 다가왔다.

“이 사람은 우리가 보이나 봐.”

“신기한데?”


은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잘 봐. 누군지.”

그녀의 말에 푸르니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시, 심지아···?”

“뭐라고? 심지아가 살아왔다고?”

야문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도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심지아! 살아있었구나! 잘 됐어, 잘 됐어.”


“그런데 왜 사람의 몸을 입고 있어?”

“둥지를 빌렸어. 어떻게 된 건지는 나도 몰라.”

“흠. 주술사라 역시 다르네. 사람의 몸을 낚다니.”

푸르니가 콧방귀를 내뿜었다.


야문이 다가와 푸르니와 나란히 섰다.

“그 몸은 누구야?”

“지새늬.”

“그럼, 심지아라고 불러야 해? 지새늬라고 불러야 돼?”

“그냥 대장이라고 부르자고. 헷갈리잖아.”


이귀들도 내려와 손에 손을 잡고 내 주위를 돌았다. 실증계 아이들이 이귀들의 몸 위로 겹쳐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두워지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귀들은 그 자리에 남았다. 은서와 나는 벤치에 앉아 장난꾸러기 이귀들을 바라보았다.


“미루안 문지기님한테 들었어. 대가를 다 치르면 돌아갈 수 있대. 지금은 벌을 받는 중이라고.”

“혹시 파견의 주술 제약을 어긴 벌인가요?”

“응. 기한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건 언젠가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야.”


가슴 속이 환해졌다.

이 몸으로는 십 년을 버틸지, 이십 년을 버틸지 모른다. 어쩌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세계의 시간에 비하면 셈에 들어가지도 못할 시간이다. 상상계에서 일단 살아남은 영역은 실증계에 사람이 사는 한 영원히 존재하니까.


“잘됐다. 대장, 그럼 여기선 뭐 할 거야?”

야문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뒷짐을 졌다.


“지새늬가 하고 싶어 하던 일 해볼 거야. 그리고, 소설을 웹에 올리려고. 어디에 올릴지도 정했어.”

“전설의 근원?”

은서가 비스듬히 자세를 바꿔 앉았다.


“지금쯤 우리 세계는 모양을 찾았겠지요. 완전하게 하려면, 누군가 읽어야 해요. 한 명이라도 읽는 사람이 있으면 진짜 완성이죠.”

“대장은 다 계획이 있구나.”

야문이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렸다.


“이중인의 이름으로 올릴 거예요. 처음부터 이중인의 소설이었으니까.”

“메일이나 전화번호는? 지새늬 것으로?”

“아뇨. 원대함이 즐겨 쓰는 아이디와 비번도 알아요. 여기 처음 왔을 때 알아냈거든요.”


“원고를 원대함한테 보냈잖아?”

푸르니가 턱을 쓰다듬었다.

“다 기억해. 토씨 하나까지.”

정말. 기억재생술도 남아 있었네?


야문과 푸르니를 보니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지새늬의 몸으로도 마법력을 쓸 수 있었다. 사념체였을 때보다 더 강하게, 우리 세계에서 쓰던 힘과 거의 비슷한 정도였다.


‘어쩐지···. 풍선 같던 지새늬의 몸이 채워졌다고 느꼈는데, 주술의 힘이 적용한 거였구나.’

불안했던 마음이 풀어지며 따뜻해졌다.

그 힘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두렵지 않으니까.


“잠깐! 대장, 그러면 주술사였을 때의 능력이 그대로 있다고?”

“빙의는 빼고. 그건 이미 몸을 가져서 안 되나 봐.”

“휘이!”

푸르니가 휘파람을 불었다.


“주술사 심지아, 죽지 않았구나.”

은서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부탁할 것이 있었다.

“은서님, 앞으로도 심지아라고 불러주세요.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은서가 싱긋 미소 짓더니 이내 환한 웃음으로 바꾸었다.

“그냥 언니라고 불러. 은서님은 무슨. 그보다 이번에는 네 소설을 쓰는 거 어때? 심지아라는 필명으로. 전설의 근원을 살린 작가잖아? 深知我.”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야문이 어슬렁거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푸르니가 야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나도 궁금해. 주술사 심지아의 모험. 많은 영역을 다니며 연수했잖아? 다른 영역을 돌며 사건을 해결하는 거지. 날 도와준 것처럼.”

“다른 영역뿐이야? 상상계와 실증계, 현상계, 에, 또···. 이름은 모르겠고, 하여튼 모든 결과 층을 돌아다니는 거지.”


“그런 문제라면 여기도 있어.”

수니홀이 벌떡 일어났다.

“요즘 이상한 혼령이 나타났거든.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다닌다고. 아주 악질이지. 골치 아파.”


“글쎄. 그것까지는···.”

나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으로 살려면 일자리도 찾아야 해. 주술사의 능력을 사람들 앞에서 쓸 수는 없잖아.”


야문과 수니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푸르니는 싱글싱글 웃으며 턱을 긁적였다.

“그래, 능력이 그대로란 말이지. 으흠.”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뭐야? 왜 저렇게 웃어?’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푸르니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이귀들에게 날아갔다.

놀이터를 빙글빙글 도는 이귀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달둥지 주술사의 힘이 있으니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어.’

가슴에 한가득 숨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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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멸 위기 22.10.21 54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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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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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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