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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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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64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7 17:1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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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악몽

DUMMY

편의점의 아침은 늘 똑같았다.

원대함은 유통기한 하루 지난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청소를 시작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손이 빠른 것이 조금 다를까.


그는 탁탁 손을 털고 노트를 꺼냈다. 시나리오를 쓰려는 구나. 오늘은 눈빛이 다르네.


요즘은 손 글씨 쓰는 사람이 없다지만, 알바하면서 틈틈이 하려니 나름 타협한 방법이겠지. 계산대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번엔 꼭 돼야 해. 연이한테 고백해야지.”

그는 다짐하듯 주먹을 쥐었다.


나는 원대함을 내려다보며 이마를 긁적였다. 그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응모하는 사람들이 다 같은 마음일 텐데.


‘작가님,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나도 우리 세계를 살리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작가가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그의 간절함과 나의 간절함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작가는 작가대로, 나는 나대로 할 일을 하는 거지.


원대함은 열심히 쓰고 고치고, 다시 썼다.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이며 생각에 몰두한 모습을 보니 빛이 뿜어나오는 것 같았다.

정말 시나리오를 쓸 때가 더 즐거운 걸까.


그 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문득 멈추더니 죽죽 검은 선을 그어댔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그는 볼펜을 던지고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뭔가가 터져야 하는데. 뭔가가! 너무 밋밋해. 식상하다고!”


소리 지르도록 내버려 두고 편의점을 나왔다. 나도 내 갈 길 가야지.

작가의 행복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소설을 완성해야 하니까.


*


“여보세요? 범보다 하룻강아지 작가님? 어제 문자 드렸던 심지아입니다. 통화 괜찮으시죠?”

“예. 문자 봤어요. 원고료는 어떻게 되나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설명도 듣지 않고 원고료부터 얘기하다니.

우리 세계를 살리는 일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한번 조건을 들어보고 협의하시죠.”

언제 다가왔는지 은서가 마이크에 대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침 시간이라 만화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붙박이 현재안이 사라진 이후, 오전에는 거의 손님이 없었다.


스피커 건너편에서는 잠에서 덜 깬 듯 우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남의 소설 이어 쓰는 거, 보통 일이 아니에요. 저작권은 어떻게 되나요? 아, 해외 판권은 좀 더 세게 나가죠. 당연히 소속 변호사 있으시죠?”


“변호사요?”

나는 또다시 상대의 말을 반복했다.

내가 이렇게 어리숙하고 멍청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왜 소설을 이어서 써야 하는지 아직 말씀 못 드렸는데요?”

간신히 찾은 말이었다.


“왜가 중요한가요? 이유와 방법은 중요하지 않아요. 결과가 중요하죠. 나한테 얼마나 돌아오느냐가 펜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에요. 아시잖아요?”


상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의 표정이나 몸짓이 보였다. 얼굴은 안 보여도.

말투와 목소리에는 사람의 인성과 버릇이 담겨있어서. 소리만 들어도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보였다.


그는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은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 잠에 취한 목소리가 그걸 증명해줬다.


“예, 예. 그렇죠. 현실이 그렇죠.”

말문이 막힌 나를 대신해서 은서가 대답했다.


“개인 출판인가 봐요? 저, 바쁘거든요. 새로 시작한 소설이 반응이 좋아서. 그럼.”

상대는 툭 전화를 끊었다. 돌아눕는 모습이 보이는데 할 일이 많다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나는 전화기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이 사람 말도 맞아. 전략을 세우고 전화를 해야지. 무턱대고 전화하면 안 돼.”

“한 세계를 살리는 일인데요?”


“실증계는 돈으로 움직여. 입고, 먹고, 쉬고, 자는 모든 것이 돈과 이어져 있어. 그래서 다들 돈을 많이 벌려고 혈안이 되는 거야.”

은서가 던져놓았던 대걸레를 다시 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제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오두막으로 돌아가 더 누워야 하나.


그래도 지금 멈출 수는 없잖아. 오늘 전화하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아직 한 사람 남았어.


“그렇다고 원고료를 줄 것처럼 말할 수도 없고. 뭐라고 하죠?”

“일단 소설을 보여주겠다고 해. 보고 마음에 들면 그때 협상하자고.”


“그 사람이 우리 세계와 인연이 있다면 쓰고 싶어지겠군요.”

나는 기뻐서 튀어 올랐지만, 은서는 혀를 쯧쯧 찼다.


“기대하지 마. 너한테 명함을 보여준 건 부딪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야.”

“무슨···.”


“실증계에 사는 사람 중에 결이 다른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그중에서도 글 쓰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아직 작가는 못 봤어. 음악가나 요리사는 있어도.”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없다고는 할 수 없죠.”


“맞아. 있기는 있겠지. 하지만, 며칠 안에 찾기는 어려워.”

은서는 대답하면서도 걸레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쪽 세계에서 대리 작가를 찾을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데···. 보석을 만들어 팔면?’


마법력을 가진 주술사에게 그 정도야 일도 아니지.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은서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안 돼. 보석이든, 금괴든. 여기선 신고 들어가.”

아니, 그럼 어쩌라고요!


이 정도에서 물러날 심지아가 아니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달려보는 거야.

남은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투명한 어둠님이시죠? 어제 문자 드렸던 심지아입니다. 통화 괜찮으시죠?”

“예. 말씀하세요.”

이번에는 여자였다.

역시 덜 깬 목소리지만, 잠에서 덜 깬 것이 아니라 숙취에서 깨지 못했다.


“중단된 소설이 있는데요, 일단 원고를 보여드릴까요?”

“우웅, 시간 낭비하지 말죠. 중단된 소설이든 완결이든 두 배로 쳐주세요.”

“두 배라고요?”


“새로 쓰는 것보다 두 배 넘게 힘들잖아요. 저도 땅 파먹고 사는 건 아니라서요. 제 작품도 해야 하고요.”

“그래도 일단 보시면 마음이 바뀔지도···.”

“어느 회사예요?”


“회사 아니고요, 저는 상상계···.”

“기업 아니면 거래 안 해요. 요즘 사기꾼들이 많아서.”

상대가 전화를 끊으려 했다.


나는 다급해서 일단 소리부터 질렀다.

“어, 얼마면 될까요?”


“계약금에 착수금은 따로 주셔야죠. 이어 쓰는 거라면서요? 배당금 10퍼센트, 판권도 제 명의로 해주세요.”

“계, 계약금은 얼마 생각하시는데요?”


“10퍼센트니까 이천만 원 어떨까요?”

뭐? 10퍼센트가 이천만 원이면 원고료가 이억 원이라고? 거기에 착수금 따로?

혹시 지금 잠꼬대 하는 걸까?


꽥 소리 지르려는데 은서가 마이크에 대고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

“예, 저희가 협의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재빨리 통화버튼을 껐다.


“이건 날강도잖아요? 착수금이라니요?”

“네가 실증계를 몰라서 그래. 작가도 살아야 하잖아. 창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데.”


하루도 되지 않아 다른 작가를 찾겠다는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시작은 그럴듯했는데.


*


도저히 떠 있을 힘이 없었다. 너무 신경 쓴 탓일까. 기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햇살이 온 누리에 가득했지만, 늘어진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일찌감치 쉬어야 해.

극단에 가서 원작가를 돕는 일도, 놀이터에서 야문과 가디록, 푸르니와 만나 다른 계획을 상의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휘적휘적 유연한의 방, 나의 오두막으로 들어섰다.


“지아 정령님, 오늘은 일찍 오시네요?”

유연한이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손을 멈추었다.


그는 아직도 나를 정령이라고 믿고 있을까. 정령이 자신의 그림을 지켜준다고.

여기나 저기나 지켜야 할 사람이 많기도 하구나.


“너무 힘들어서요. 이쪽 세계에서는 금방 기력이 빠져나가요.”

“그렇게 보여요. 빛깔이 엄청 탁해졌어요. 얼른 쉬세요.”

유연한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도 마감이 코앞인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림 속 오두막에 드러누웠다.


사파이어 빛 호수가 찰랑거렸다. 맑은 바람이 살랑이며 코끝을 스쳐 갔다.

눈을 감고 물소리와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젯밤 차오름과 얘기한 것이 까마득히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누나가 없으면 이 세상도 없어요. 나한테는 누나가 더 소중해요.’


그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에 울렸다.

‘꼭 돌아와야 해요.’


응. 돌아갈 거야. 반드시 소설을 이어놓을 거야.

내 결심은 어느새 어지러운 꿈으로 이어졌다.


우리 세계의 경계가 서서히 지워졌다. 넓디넓은 영토의 끝부분이 가루가 되면서 허공으로 먹혀들어 갔다.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사람들은 슬픈 눈을 하고 있을 뿐 소리 지르거나 울지도 못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심지아. 이게 우리의 운명이야.’

그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차원의 경계도 무너져 내렸다. 전설의 무기를 찾아 나아간 차오름이 거기 있었다.

그가 서 있는 바닥이 지워져 갔다. 그는 슬픈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소리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몸이 무언가에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힘껏 몸을 비트는 사이, 차오름이 서서히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안 돼!”

나는 놀라 깨어났다.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눈앞을 노려보았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중얼거리면서도 꿈이 현실이 될까 두려웠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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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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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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