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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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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66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5 09:05
조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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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애원

DUMMY

날이 밝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커다란 바위를 매단 듯 손을 들기도 버거웠다.

‘왜 이러지? 이렇게 아픈 적이 없는데···.’


바닥에 달라붙어 꼼짝할 수 없었다. 누운 채 오두막 천장만 바라보았다. 눈꺼풀도 무거웠다.

유령이 되었기 때문인가? 파견의 주술 부작용인가? 아니면 소설이 늦어지기 때문일까.


“지아님! 무슨 일 있어요?”

그림 바깥에서 유연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안 좋으세요? 기운이 탁해졌어요. 빛깔도 달라지고. 어디 아픈 거죠?”

“괜찮아요. 누워있으면 나아질 거예요.”


그림 앞을 서성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런 때는 뭘 드려야죠? 의사도 올 수 없고, 무당을 찾아야 하나요?”


한참 후, 손가락을 튕기며 멈추어 섰다.

“편의점에서 죽을 팔죠! 유령이 제사음식 먹는 것처럼 지아님도 먹을 수 있잖아요? 왜 여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는 지갑을 들고 그림 앞에서 흔들었다.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럴 거예요. 기다리세요. 뭐라도 사 올 테니까.”


대답할 사이도 없이 문이 닫혔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날 걱정해주는 모습이 꼭 아이와 비슷했다. 기숙사에서 같이 방을 쓰던 아이.

‘잘 지내고 있을까? 아이도 차오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겠지.’


달빛사원에서의 수련이 끝나면, 매일 식당에서 일하느라 자주 감기에 걸렸다. 아이는 내가 힘들어하면 죽을 만들어주었다.

항상 새알죽을 만들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처음 내 방으로 들어온 날, 아이는 낯선 환경이 무섭다며 서럽게 울었다. 열다섯의 나이로 집을 떠나왔으니 무서울 수밖에.


그녀를 위로하려고 단맛이 나는 새알죽을 쑤어주었는데, 그 후로 그녀도 새알죽을 만들었다. 그때 너무 맛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는 너나족이기에 주술과 마법을 배우는 속도가 느렸다. 비조족인 나를 부러워할 때도 많았다.


‘조금 느린 것은 괜찮아. 어쨌든 나아가고 있으니까.’

그녀가 풀이 죽어있으면 나는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우리 세계의 시간은 넉넉해. 소설이 완성되고, 저편 세계에 사람이 사는 한 계속될 테니까.’

주술과 마법을 배우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알려주었다. 아무리 비조족이라 해도 저절로 익혀지는 능력 따위는 없다.


아이는 차오름을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나이가 같으니 친구처럼 여겼을 것이다.

뽀글 미용실 안가유가 유연한을 바라보는 것처럼. 극단의 선명해가 원대함을 보는 눈빛처럼 어딘지 슬프고, 아련했다.


아이가 차오름에 대해 자꾸 묻기에 할 수 없이 그에게도 알려주었다.

‘아이랑 친구가 되면 어때?’

‘전 할 일이 있어서요.’

차오름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자리를 피했다.


더 말할 기회도 없이, 아이는 우리 세계의 ‘숨은 사명’ 영역으로 연수를 떠났다. 단기 연수였지만, 아이가 돌아왔을 때 차오름은 이미 용사로 선발되어 떠난 후였다.


아이를 생각하니 그녀에게도 이름을 주고 싶어졌다.

작가가 소설에 이름을 써주면 되는데. 단 한 번이라도.


작가와 소설을 생각하니 불끈 화가 치밀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원대함! 이 책임감 없는 작가!’


이귀가 가져다준 약도도 신발 상자에 같이 넣었는데, 보기는 했을까. 현재안의 집에서 그것을 가져오느라 애쓴 이귀들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는 거야?


멍하니 미늘호수를 바라보는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유연한이 폰을 두고 나간 것이다.

한두 번 울리다 말 줄 알았는데 벨소리는 여간해서 멈추지 않았다.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아우,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아. 꺼버려야지.”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림 밖 탁자 옆으로 날아갔다.


이런, 끈다는 것이 연결 버튼을 잘못 눌렀나 보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 여기는 알맹이 엔터인데요, 유연한씨인가요?”

“유연한씨는 잠시 나갔어요. 제가 대신 받았어요.”


“그래요? 이 번호가 유연한씨 것 맞지요? 일단 문자 드리고, 다시 연락할게요.”

전화는 툭 끊겼다.


나는 정신이 먹먹하여 잠시 서 있었다. 그림 밖으로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런지 어지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온몸에 찬바람이 지나갔다.

물어보기에 무심코 답했는데, 저쪽에서도 대답하다니? 내 목소리가 들렸다는 거잖아?


‘전화로는 사람과 말할 수 있어!’

유령이 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전화로는 원대함과 얘기할 수 있어···.


그때, 골목 저편에서 지새늬의 기운이 느껴졌다.

한 번 빙의했던 몸이라 그런지 가까이 그녀가 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원대함에게 가겠지? 그렇다면 나도.’


*


유연한이 계산대에 죽을 내려놓으니 원대함은 바코드를 찍으려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웬 죽? 어디 아파?”

“제가 아픈 건 아니고요. 아는 사람이···.”

“집에 누구 왔어?”

“어, 그게요···.”


유연한이 얼버무리는 동안 지새늬가 유리문을 열었다. 그녀를 따라 바람 한 줄기가 휙 들어왔다.

그녀를 보자마자 원대함은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새오빠! 여전히 열심히 사네?”

지새늬는 구두를 또각거리며 들어섰다. 원대함을 머리부터 훑어보더니 손을 휘저었다.


“아우, 촌스러워.”

“왜 왔냐? 드럽게 할 일 없나 보다.”

“일이 없기는? 얼마나 바쁜데. 새엄마가 걱정하셔서 시간을 낸 거야. 내가 새오빠 같은 줄 알아?”


원대함은 계산을 끝내고 유연한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유연한은 지새늬를 흘끗거리며 서둘러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어머니가 네 앞에서 내 걱정을 하셨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왜 이래? 내가 얼마나 잘하는데?”

“아직 그 가면을 못 보셨나 보지.”


“어머! 생사람 잡고 있네.”

지새늬가 몸을 떨었다.

몹시 억지스러운 몸짓이었다. 오디션에서 보았던 그녀의 연기가 떠올랐다.

원대함은 씁쓸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새늬는 진열대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연기학원 매니저에 대해 투정을 늘어놓았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심사위원들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다가 느닷없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 동창 모임이 있거든.”


지새늬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문을 나섰다.

원대함은 빨리 가라고 손짓했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바람이 빠져나가는 느낌. 풍선이 곧 주저앉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할 겨를 없이 그녀를 따라 나갔다.


골목 모퉁이를 도는데 그녀의 뾰족한 구두굽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어버렸다. 지새늬는 넘어지지 않으려 벽을 짚었지만,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몸에서 빈틈을 보았다.

‘지금이야!’


*


당당히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원대함이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간 줄 알았던 지새늬가 다시 돌아오자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뭐 놓고 갔어?”


나는 말없이 계산대 위의 메모지에 사원의 약도를 그렸다. 현재안의 집에서 보았던 그림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달빛사원의 아삼관, 도움관, 세움관과 사원을 안고 우뚝 선 하람언덕과 사원 앞에 펼쳐진 미늘호수를 그렸다.


“작가, 아니 새오빠, 이거 어딘지 알죠?”

내가 그림을 내밀자 그는 눈을 껌뻑이며 들여다보았다.


무슨 그림인가 한참 생각하던 그가 메모지를 탕 내려놓았다.

“너 이거 어떻게 알아? 내 방에 들어갔었어?”


“기억하시죠?”

“그야, 어제 받은 물건도···. 가만.”

원대함이 이마를 찌푸리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노트, 네 짓이야? 왜 쓸데없는 짓을 해?”

그는 갑자기 화를 내며 눈두덩에 불끈 힘을 주었다.

“어머닌 그런 쓰레기를 왜 모아놨어? 그게 언제 적인데. 아우, 그냥 어린애 장난이었다고.”


“이어서 써주세요. 부탁이에요.”

담담하게, 그러나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네가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나서지 말고 하던 대로 살아.”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어요. 꼭 이어서 써야 해요.”

나는 두 손을 꼭 모으고 애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손바닥으로 계산대를 내리쳤다.

“말했잖아. 그건 버린 거라고! 그러잖아도 귀신 씌운 것 같아 찝찝한데 너까지 왜 그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전부야. 장난이고 쓰레기라고 하면 안 돼.’

내 마음이 울자 지새늬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어버렸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세계예요. 아무리 작가라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어요.”

울지 않으려 이를 꽉 다물었으나 소용없었다.


참고 참았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나는 서있지 못 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소설 써주세요. 시작만 하면 돼요. 그러면 살 수 있어요.”


그가 내 팔을 잡아 올렸다.

“왜 그래? 안 하던 짓을 하고. 너 연기 연습하냐?”

말없이 울고만 있으니 그는 내 팔을 놓고 조끼 주머니에 손을 문질렀다.


“그만해리. 나 시나리오 써야 해. 공모전 마감이 코앞이야.”

그가 다시 내 팔을 잡았다.

“사람들이 기웃거린다. 빨리 일어나.”


결국 그의 손에 이끌려 문밖으로 나왔다.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고.


놀이터 앞에 다다르니 지새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라켓에 퉁겨지는 공처럼 그녀의 몸에서 튀어나왔다.

사념체로 돌아와도 서러운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갑자기 지새늬의 비명이 들렸다.

“으악! 내 얼굴! 이게 뭐야?”


눈물 때문에 꾸덕꾸덕해진 얼굴을 만지더니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냈다. 다시 비명을 질렀다.

“끼악! 화장이 지워졌잖아! 미쳤어, 미쳤어! 나 뭐한 거니?”


그녀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물티슈를 꺼내고 화장품 파우치를 펼쳤다.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귀신이 곡하겠네, 진짜. 뭐 하자는 거야?”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화장을 고쳤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렸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여간해서 진정되지 않았다. 초고리 편의점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우리를 버린 거야?’


놀이터 구석에서 야문이 다가왔다.

그는 완전히 모습을 되찾아 하얀 심의에 복건을 쓰고 있었다. 그 흰 빛이 더 서럽게 느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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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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