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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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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59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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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황혼의 이중창

DUMMY

금요일 저녁이어서인지 생각보다 손님이 적었다.

소극장 로비에서 스무 명 정도가 공연을 기다렸다. 그중에서도 지새늬는 눈에 확 띄었다.


실내인데도 선글라스를 쓰고 스카프로 머리를 감쌌다. 여기 들어올 때까지도 선글라스는 못 봤는데···

.

그녀는 구석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을 숨기려 애쓰는 건지 드러내려는 것인지, 옷 색깔부터 스카프의 무늬까지 강렬했다. 누구나 한 번씩 흘끗거렸다.


지새늬야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고, 나는 내 일을 찾아 나섰다.

원대함을 찾는 일이 먼저였다. 전에 왔을 때는 사무실에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벽을 통해 공연장으로 들어가니 원대함과 단장이 조명과 음향을 점검하고 있었다. 무대 뒤편에서는 목을 가다듬으며 가볍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단장 한다발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작하려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시나리오는 잘 돼 가냐?”

“영 안 풀려요. 명치에 뭐가 걸린 것 같아요.”

“많이 좋아졌던데? 햐, 처음 가져왔을 때는 이걸 어쩌나 난감했는데.”

한다발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너 연기도 별로잖아? 왜 왔나 싶더라고. 시간이 약인 건지, 노력이 왕도인 건지 지금은 그럴싸해.”

“아직 멀었어요. 더 열심히 해야죠.”

원대함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아직 멀긴 해.”

한다발은 무대 중앙의 조명을 껐다 켰다.


“시대를 잘못 만나 그런가? 그렇다고 남들 따라 할 수는 없잖아? 알아주면 좋고, 몰라줘도 할 수 없지. 최선을 다할 수밖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찡해졌다.


어디선가 또 다른 혼잣말이 들려 로비로 나왔다.

단장의 목소리에 섞여 있기는 해도, 작고 여린 소리였다. 누구의 소리인지 로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자잘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내가 들었던 속삭임은 아니었다.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복도 구석의 마른 화초에서 나왔다.

‘목이 말라요. 물을 주세요.’


식물의 말이 들리다니.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대화술은 들으려고 할 때 듣는 기술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그냥 들린다면 시끄러워서 살 수 없으니까.


‘물을 주고 싶어도 난 몸이 없는걸···.’

바로 옆에 젊은 여인 둘이 앉아있었다. 한 사람이 생수병을 들고 있는데, 그 정도면 될 것 같았다.


간단하게 암시를 걸었다.

‘저 화초 좀 봐. 너무 말랐다.’


긴 머리의 여인이 화초를 돌아보고는 생수병을 들어 올렸다.

“저것 좀 봐. 너무 말랐어. 이거라도 줘야지.”

그녀는 남아있는 물을 다 쏟았다.


‘이 정도면 흙이 촉촉해질 거야.’

극단 단원 중에 꼼꼼한 사람을 찾아서 부탁해야겠다. 또 목마르지 않도록.


*


원대함은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커튼을 치고 문을 닫는 역할이었다.


그를 보며 객석에 앉은 지새늬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불이 꺼지고 나서야 선글라스를 벗었다.


‘황혼의 이중창’은 칠순을 앞둔 두 부부가 나오는 극이었다.

리플렛에 배우의 사진과 내용 소개가 있는데, 몇 명은 놀이터에서 본 사람들이었다.


감사유 역(조아용), 어진리 역(선명해)

변소통 역(하루도), 오자유 역(사비야)

어진리의 옛사랑 임신중 역(공사중)

멀티(간결희)


사비야와 간결희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리플렛에는 출연진 말고도 다른 역할을 맡은 사람도 있었다.


조명, 음향(정상인)이라고 되어있지만, 오늘은 단장이 그 자리에 앉았다. 원대함의 얼굴도 있었다.


극본 – 원대함


‘오, 우리 세계를 만든 작가가 여기서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구나.’

마치 가족의 일처럼 설레고 뿌듯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대사와 움직임에 집중했지만,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고, 이중창이라는 단어도 나오지도 않았다.

이중인을 찾는데 몰두해서 이중창마저 사람 이름이라 착각했던 내가 우스웠다. 어쨌든 이중인을 찾아냈으니 된 거야.


연극을 보다 보니 극 중 사람들이 어딘지 낯익었다.

‘응? 이거 오미재 시장에서 일하는 분들 같은데?’


생선가게와 과자가게 주인들과 비슷했다. 성격이랑 말투가 보면 볼수록 똑같았다.

물론, 그들에게는 옛사랑이 없지만.


*


오미재 시장은 미늘호수 건너편에 있는 시장이었다. 배를 타도 되지만, 보통은 마차를 타고 호수를 돌아 어울림 광장을 지나갔다.


생선가게 주인은 미늘호수에서 그물질을 해서 물고기를 잡았다.

아저씨는 그물을 치고, 아주머니는 낚싯대를 주로 썼는데 실력이 아주 좋았다.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미끼를 던지자마자 휘릭 물고기가 딸려 올라왔다.


낚시로 잡은 물고기는 더 비쌌다. 크기도 크고, 비늘도 온전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시장에 갈 때마다 그분들은 꼭 나를 불렀다.


“심지아! 낚싯대 좀 쓰다듬어줘!”

“뭐야? 내 그물이 먼저야.”

부부는 어깨를 부딪치며 서로 앞으로 나왔다.


“주술사가 만져주면 고기가 잘 잡힌다고.”

“그중에서도 심지아를 찾아야지.”


낚싯대와 그물을 만져주면 생선구이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의 생선구이는 도달이 아저씨의 요리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도달이 아저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더 고소하고 쫀득했다.


그래서 시장에 나갈 때 차오름을 데리고 갔다. 그가 사원에 들어온 다음 해였으니 차오름이 열다섯 살 때였다.


“얘는 누구야?”

“차오름이에요. 곧 용사가 될 주인공이지요.”

“아하, 네가 우리 세계의 주인공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심지아랑 같이 와?”


아주머니의 물음에 차오름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달빛사원 기념품 가게에서 일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휴, 우리가 부탁해야지. 우리 세계가 이 어깨에 달렸는데!”

아주머니는 차오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와, 이 어깨 좀 봐. 해치족이야?”

“예.”

“좋았어! 내가 낚시를 가르쳐주지. 배워놓으면 좋을 거야. 어디서든 굶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차오름은 아주머니에게 낚시를 배웠다.

이듬해에는 아주머니만큼 낚시를 잘하게 되었다. 가끔 호수에서 아주머니를 돕기도 했다.


그 덕분에 차오름과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아 구워 먹은 적도 있다.


주술 대회에서 또 구하라가 우승한 날이었다. 나는 하람언덕까지 오를 힘도 없어서 호숫가에 넋 놓고 앉아있었다.

언제 왔는지 차오름이 물고기를 잡아 내 옆에 내려놓았다.


말할 기분이 아니어서 하염없이 물비늘만 바라보았다. 그 사이 그는 모닥불을 피워 물고기를 구웠다.


냄새가 솔솔 올라오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우울이고 쓸쓸이고 먹을 것 앞에서는 힘을 못 쓰는구나.

막 잡아서 구운 생선이 얼마나 달고 맛있는데!


“와, 대단하다. 아주머니보다 더 잘하는데?”

“아직 멀었어요. 누나가 더 대단해요. 시장에선 모두 주술사가 지나가기를 바라잖아요. 정말 멋져요.”


“으응. 나보다 더 대단한 주술사도 많아.”

나는 구하라를 떠올렸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도 차오름과 친해지기 위해 기념품 가게를 자주 드나들었다. 소설과 이어진 것이면서 그녀의 진짜 마음이기도 했다.


오미재 시장의 과자가게에 들른 적도 있다. 도달이 아저씨의 심부름으로 차오름과 함께 갔을 때였다.


아저씨가 나를 부르며 고민이 있다고 했다.

“마누라가 마음이 몹시 아프대. 얼마 전에 장인 어르신이 돌아가셨잖아. 마누라를 키워준 유일한 가족이거든. 보고 싶다며 우는데 달래도 소용 없고 말이지.”


아저씨는 나와 차오름에게 사탕을 하나씩 내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리운 사람이 보이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과자를 만들면 어떨까?”

“그건 오히려 독이 돼요. 계속 거기 머물면 나아질 수 없어요. 언제까지나 갇혀 있으려 하거든요.”


“그럼, 어쩌지? 보기도 딱한데.”

“제가 얘기해볼게요.”


잠시 후, 내가 아주머니를 데리고 나오자 차오름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떻게 한 거예요? 아주머니가 웃으시는데?”

“주술사만의 비밀무기.”


비밀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었다. 마법이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같이 슬퍼해 주고, 들어주고, 그녀의 아버지가 알려준 삶의 지혜를 꺼내주었을 뿐이다.


주술사는 사람을 돕기 위한 존재니까. 언제든 어디서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나칠 수 없었다.


*


연극은 등장인물이 소로 오해를 풀고, 함께 살아온 날을 감사하는 것으로 차분하고 담담하게 끝났다.


원대함은 ‘전설의 근원’이 유치한 클리셰 범벅이라고 했지만,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한 생각과 상상은 바뀌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면 글 쓰는 기술이 좋아지고, 묘사를 더 잘하게 된 정도겠지.


‘그가 바라는 세상이 무의식 안쪽에 남아있어. 마음에 품은 우리 세계를 꺼내면 돼.’

내 안에 다시 희망이 피어났다.


그를 따라다니며 암시를 걸었으나 그는 손으로 귓가를 쳐냈다.

‘작가는 대단한 존재예요. 한 세계를 창조하다니. 원대함 작가님, 부디 소설을 이어 써주세요.’

간절한 부탁도 통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 나주연도 그랬는데, 원대함도 암시를 거부해? 아까 로비의 여자는 잘 받아주었는데!

주술의 힘이 약해졌나?

아니다. 대화술도 돌아왔고, 이귀들도 잘 다루니 그건 아닌데···.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앞이 아득했다. 이 고비를 어떻게 넘기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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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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