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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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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71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5 09:09
조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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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소리 없는 울음

DUMMY

소극장은 한산했다. 평일 저녁 공연이라서인지 로비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열대여섯 정도였다.


원대함은 티켓박스에 앉아 작은 창문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머리를 흩뜨렸다.

“아우!”


노트에 마구 선을 그어댔다. 종이는 지저분한 선으로 새까맣게 칠해지더니 북 찢어졌다.

“아잇!”

그는 종이를 떼어내 좍좍 찢어버렸다.


“너무 심했나? 아휴, 왜 갑자기 그러냐고!”

원대함은 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고개를 숙였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책도, 노트도 갑자기 나타나고, 지새늬도 뭔가에 씌인 것처럼···.”

그는 손바닥으로 볼을 찰싹 두드렸다.


“우연이야, 우연! 귀신이 붙었을 리 없어. 그래. 우연이라고.”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어나 티켓박스를 정리하고 문을 잠갔다.

“새늬에게는 미안하네. 얘기라도 들어줄걸.”


그가 극장으로 들어간 뒤에도 나는 티켓박스 천장에 붙어 나가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그가 앉아있던 의자를 보며 주먹을 휘둘렀다.

‘후회할 짓을 왜 해! 이럴 거면 우리를 만들지 않았어야지!“


“당신한테 우리는 뭐야? 우리 세계가 멸망한 뒤에 후회하지 말고, 소설을 쓰라고! 시나리오는 내년에 쓰면 되잖아?”

혼자 씩씩거리는 소리가 티켓박스 안을 울렸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겠지.


“왜 내 말을 안 듣냐고!”

있는 힘껏 소리 지르니 머리가 멍해졌다. 화를 낼수록 화가 커져서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참았는데. 이중인을 찾기 위해 마음 졸이고, 원대함을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건 당신이 만들어놓은 세계라고! 바로 당신이! 그런데 장난이고, 쓰레기라고 말하다니.

우리는 살아있는 세계야. 당신이 그렇게 말할 존재가 아니라고!


원대함이 올라간 계단을 노려보았다. 나는 이 층 공연장 앞 난간을 붙잡고 흔들었다.

“원대함! 네가 이중인이면 다야! 우리 세계를 살려내!”


듣는 사람 없는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를 살려내라고!”


화가 화를 부르도록 내버려 두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관객이 다니는 문이 아니라 안쪽으로 난 쪽문이었다.


공사중이 폰을 들고 헐떡이며 뛰어나왔다.

놀이터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사춘기 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했던가.


“어머니, 흥분하지 마시고요. 천천히 말해보세요. 연하가 없어졌다고요?”

공사중은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도 발을 굴렀다.


그의 뒤를 따라 단장 한다발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친구네 놀러간 건 아니고요?”

공사중은 손을 쥐었다 풀었다하며 숨을 빠르게 쉬었다.


“쪽지요?”

공사중이 소리치자 한다발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 있지 말고 빨리 가봐. 딸부터 찾아야지.”

“그, 그럼 공연은···.”


나는 그제야 공사중이 분장까지 마친 것을 알아보았다.

‘딸이 없어졌다고?’

그의 외침에 나의 울음도 멈추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니 내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순간 달빛사원에서 시설을 관리하는 아저씨가 떠올랐다.

아지트로 쓰라고 동굴을 찾아준 아저씨, 차오름과 나를 가족처럼 챙겨주던 아저씨와 겹쳐졌다.


그 아저씨도 딸이 미늘 호수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딸을 잃은 마음이 어떤지 알아. 아저씨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공사중의 숨소리를 따라 내 마음도 다급해졌다.

‘찾아줘야 해. 잃어버리기 전에!’


“사중아, 빨리 가봐. 이럴 때 쓰라고 잉여인력이 있잖아?”

한다발은 한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래서 무대에 집중할 수 있겠어? 걱정하지 말고.”

한다발의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울리자 벌써 일이 해결된 것만 같았다.


공사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망히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그를 따라 돌아섰다.


계단 끝에서 돌아보니 한다발이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쪽문으로 들어갔다.


*


공사중은 작고 낡은 자동차에 앉아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나 연하 아빠인데, 혹시 연하 거기 있니?”


나는 폰에 바짝 다가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연하 조퇴했어요. 아프다고.”

“연하가 쪽지만 남겨놓고 나갔다는데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아···.”

아이는 순간 말을 삼켰다.


“요즘 연하가 이상하긴 했어요. 오늘은 애들하고 싸우고요. 연하네 엄마가 없다고 하니까 화를 냈어요. 그냥 그렇다고 얘기한 건데···. 전에는 그런 말해도 아무렇지 않았거든요.”

“그러냐. 내가 다른 애들 번호는 모르거든. 혹시 애들한테 알아봐 줄래?

“예. 물어볼게요.”


전화를 끊고도 공사중은 폰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연락처를 찾아보던 그는 한숨을 쉬며 폰을 조수석으로 던졌다. 딸이 누구와 만나고, 어디에 주로 가는지 아버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자동차 시동을 켰다.

집으로 가서 딸이 남긴 쪽지를 보려는 거겠지.


나는 운전석 앞에 붙여놓은 딸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닮아 동글동글하고 눈코입이 올망졸망했다. 아이의 얼굴을 외운 다음 자동차를 빠져나왔다.


공사중의 차가 멀어지자 나는 곧바로 수니홀을 찾아 날아갔다.


*


“드디어 우리의 활약인가요?”

“우와! 누구를 찾는데요?”

버스정류장의 이귀들이 폴짝거리며 내 주변을 뛰어다녔다.


“공연하. 15살, 중학교 2학년. 오늘 학교에서 조퇴하고 사라졌어. 외지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을 거야.”

사진에서 본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어떻게 움직였을지 상상해보았다.

“쪽지를 남겨두고 나갔다니 무작정 버스를 타고 멀리 갔을 거야. 어디든 헤매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알려줘.”

“알았어요! 심지아님은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이귀들이 한꺼번에 튀어 올랐다.


잠시 후 가로수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사방으로 바람을 만들어냈다. 시야의 끝에서도 어린 이귀가 뛰어올랐다.

지난번 소극장 마중으로 안내해주던 이귀들이었다.


수니홀이 싱글거리며 다가왔다.

“찾는 건 금방 찾을 거야. 마음을 돌리는 게 문제지.”


깜짝 놀라 수니홀을 바라보았다. 파견의 주술을 받을 때 이단주 원장이 해준 말이었다.

‘작가는 쉽게 찾을지 몰라도, 이어서 쓰게 하는 것은 어려울 거다.’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까끌거렸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작가도 그렇고.”

“원래 현실이 그래.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더 열심히 버둥거리는 거야. 뜻대로 되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


이귀들이 만들어내는 바람을 따라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몸은 날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하루하루 기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유령이 되고는 여기저기가 아팠다.

작가를 찾아 소설을 쓰게 하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인연을 쌓으면 상상계와의 연결점이 끊어질 거야.’

은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몸이 아픈 것도 그래서일까.


유연한에게 유령으로 모습이 바뀌고, 야문과 푸르니에게 이름을 준 것이 잘못일까.


어지러운 마음으로 노을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나뭇잎이 흔들렸다. 어린 이귀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찾았어요!”


*


공사중은 차를 몰고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하늘은 어두워져 거리마다 가로등이 불을 밝혔다. 불빛 때문에 가을의 스산함도 희미해졌다.


나는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 암시를 걸었다.

‘양금숲.’


공사중이 차를 멈췄다.

“어쩌면 양금숲에 갔을지 몰라. 거기 애 엄마랑 자주 갔었잖아?”

그는 핸들을 꺾어 방향을 바꾸었다.


양금숲 주차장에서는 이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귀들이 그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은 간단했다.


사람은 위기가 닥치면 감각이 예민해진다. 풀잎이 흔들리고, 바스락 소리가 나고, 바람 한 점이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신호를 알아차린다.


이귀들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돌멩이를 굴리며 그를 데리고 갔다.


나는 자동차에 남아 차갑게 식은 캔 음료를 데웠다. 추위에 떨었을 아이를 위한 것이다.


그가 길을 헤매다가 가게에서 물을 사는 것을 보았다. 바짝 마른 입술로 물 한 병을 사기에 따뜻한 음료도 하나 사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온장고에서 캔 음료를 하나 집어 들었다.


주술사가 물 한 잔 데우는 것은 일도 아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불길을 이끌고, 강물을 부렸지만,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그 정도의 능력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음료를 뜨겁게 데우고 공사중과 그의 딸 연하를 데리러 갔다.


연하는 아빠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흐어엉, 죽는 줄 알았어.”


“이게 무슨 짓이냐! 응? 너 무슨 일 생기면 아빠랑 할머니는 어떻게 하라고!”

“너무 무서웠어. 나쁜 사람들이 쫓아오는 줄 알았어.”

공사중이 연하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연하는 걸으면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짓하지 마라. 할머니가 쓰러질 뻔했어.”

아빠의 말에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느라 눈물 콧물이 범벅되었다.


조수석에 앉아 연하는 무릎담요를 어깨까지 올려 덮었다.

“나 배고파.”

“아까 음료를 샀는데. 다 식었지만···.”


공사중이 캔음료를 잡다가 움찔했다. 따뜻한 기운에 놀라면서도 태연히 딸에게 건넸다.


“우와, 엄청 따뜻해.”

연하는 두 손으로 음료를 쥐고 번갈아 볼에 갖다 댔다.


몸이 따뜻해지자 연하는 잠에 빠져들었다.

연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느낀 따뜻함을 잊지 않기 바랐다.


공사중은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하늘의 별은 보이지 않고 거리의 불빛만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별이 가득한 우리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미늘호수가 너무나 그리웠다.

‘보고 싶다.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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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2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34 플랜 B 22.10.18 34 1 10쪽
33 리허설 22.10.18 30 1 10쪽
32 악몽 22.10.17 36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2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8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 소리 없는 울음 22.10.15 30 1 11쪽
26 애원 22.10.15 24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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