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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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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78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20 10:40
조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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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작별 인사

DUMMY

아침 일찍 고충만과 금은비가 그림 속 오두막으로 찾아왔다.

마침 그들의 이야기를 쓰려던 참인데.


금은비는 들어오자마자 오두막 이 층 난간에 매달렸다. 눈 앞에 펼쳐진 사파이어 빛 호수를 넋 놓고 내려다보았다.

“와! 진짜 미늘 호수와 비슷하네요. 어쩐지 심지아님은 매일 쌩쌩하시더라.”


“금은비, 할 일이 있잖아?”

고충만이 나지막이 말을 건네자 금은비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옆에 앉았다.


“우린 준비됐어.”

고충만이 말하자 금은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그래도 두 분을 보내드릴 수 있어 다행이에요.”

“심지아님이 고생이지.”

“우리 돌아가면 심지아님을 잊게 되나요?”


“그럴 수도··· 있죠.”

웃으며 보내주려 했는데, 어색한 웃음이 되고 말았다.


“가서 꼭 전할게. 심지아님이 얼마나 애썼는지.”

고충만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기루다가 편지를 받는 장면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오후의 햇살이 연합의 사무실을 밝게 비춰주었다.

기루다는 다섯 명의 용사가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곧 차원침입군을 몰아내겠군.’


기루다는 창가를 서성이며 다음으로 할 일을 하나씩 짚어보았다.

‘구하라는 차원관리자로 경계에 남으라고 해야겠어. 신탁의 주술사가 차원관리자가 된다는데 누가 반대하겠어?’


사람들에게 인기 높은 구하라를 연합에서 멀리 보낼 기회였다. 경쟁자는 일찌감치 보내는 것이 좋아.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나갔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그녀는 여러 통의 편지 중에 하나를 골라 기루다에게 건넸다.


“대표님! 금은비가 편지를 보냈어요.”

“금은비?”

“재작년인가,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갔잖아요? 고충만과 함께 지낸다는데요?”


---


비서가 이름을 말하자 금은비와 고충만이 휙 허공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줄기가 쏘아지듯 빠르고 강렬했다.

돌아가고 싶은 그들의 소망이 힘을 더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한 장면을 마치고 생각을 멈추었다.

금은비가 서 있던 난간 옆으로 가서 섰다.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새벽부터 오슬오슬 몸이 떨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


은서의 반응은 담담했다. 마치 예상한 것처럼.

“결국 가장 위험한 결정을 했구나.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상상계의 작품이 사라지는 건 아까워. 사람들의 상상이 모두 상상계에 태어나는 건 아니니까.”


“쓰다가 막혀서 나왔어요. 때로는 생각이 완전히 멈춘 것 같아요.”

“소설은 영혼을 갈아 넣는 일이니까. 소멸을 앞두고 있으니 혼을 갈아 넣는 건 맞구나.”

은서가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전이라 그런지 짱짱 만화방은 조용했다.

사람이 없으니 침묵도 무겁고, 세상이 적막했다. 현재안은 오늘도 나오지 않았다. 금은비와 고충만이 떠났으니 내일은 다시 나오려나.


“그래도 너라서 가능한 일이야. 마법을 배웠고, 주술도 연마했으니까. 무엇보다 이름이 있잖아. 주술사 중에서 주인공 말고, 이름이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을걸?”

“달둥지에는 두 사람뿐이에요. 구하라의 친구들이요. 이단주 원장님의 조수가 한 명, 기루다 대표의 참모가 한 명.”


“거봐. 넌 선택받은 주술사야.”

“잘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세계에 다른 피해는 없겠죠?”

“그건 알 수 없지만, 일단 이어지기 시작했으니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겠지.”


은서는 만화방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상상계에서 쌓은 실력이 실증계에서도 통한다 이거지? 으흠. 그래서인가?”

“예? 뭐가요?”


은서가 찻잔을 내려놓고 내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천사님이···, 아, 달숲의 작은 천사님 말이야. 알지?”

“예. 그믐밤의 모임.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난 그저 고향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래서 초대한 거고. 그믐밤의 파라다이스 빌라에서는 그것이 가능하거든.”

은서의 말을 들으며 나는 빌라 옥상에서 보았던 미늘 호수를 떠올렸다.

그곳은 옥상이면서 옥상이 아니었다. 하람 언덕 중턱,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리였다.


“달숲 천사님이 그러셨어. 심지아는 여기서 할 일이 있다고. 그래서 일이 커졌어. 미루안 문지기님이 소원을 물으시다니.”

은서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소원이 뭐냐고 물을 수도 있지. ‘넌 꿈이 뭐야?’ 라고 묻는 것처럼.


“그게 무슨 일일까 싶었는데···.”

은서가 손뼉을 쳤다.

“전설의 근원을 완성하는 거!”


그녀가 찻잔을 다시 들었을 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를 깨달은 듯한 눈빛이었다.

“파라다이스 빌라에서 소원을 빌었으니···. 기다려볼까?”

“뭘요?”

“아니, 그런 게 있어.”


은서는 빈 찻잔을 들고 일어났다.

“심지아! 빨리 소설 끝내야지.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소멸이 코앞이라고.”

소멸을 얘기하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차려진 밥을 먹으라는 말만큼 태연했다.


‘그래, 뭐. 소멸하는 건 나지, 은서님이 아니니까.’

나는 대꾸도 못 하고 돌아섰다.


*


집으로 돌아왔지만, 유연한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림 앞에 서서 그림 속 호수와 그 너머의 산을 바라보았다.


오두막에서 볼 때와 그림 밖에서 볼 때 호수 빛깔이 조금 달랐다. 그림 밖에서는 오래되어 색이 날아간 것 같지만, 그림 속에서는 눈부시게 빛났다.


‘달빛사원 사람들은 돌아왔을까?’

달둥지의 수련생 중에서도 몇 명 사라졌다고 했지. 그들도 이름이 있었다면···.


‘이름?’

맞아. 이름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 작가를 찾으면 부탁하려고 했는데, 내가 쓰면 되잖아?


우리 세계의 모두에게 이름을 줄 수는 없었다.

일일이 다 쓸 수도 없거니와 몇 명을 추가한다 해도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원대함이 써놓은 사건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작가가 쓴 줄거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장면에 나오면 이름을 줄 수 있다.


스승님과 시설관리 아저씨, 같은 방을 쓰는 아이를 넣을만한 장면을 찾아보았다. 원작가의 노트에 적당한 사건이 있을까?


‘이름은 뭘로 하지?’

고민하다가 극단의 리플렛을 생각해냈다. 단원들의 이름을 빌리는 거야.


스승님은 한다발로 결정했다. 목소리가 비슷하니까. 단원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스승님을 떠올리게 했다.


시설관리 아저씨에는 공사중의 이름을 주었다. 그의 딸 연하를 찾아다니던 날이 떠올랐다. 아저씨도 딸이 있었으니까.


아이는···.

나는 고민하다가 선명해라고 적었다. 원대함을 아꼈던 것처럼 내가 없는 동안 차오름을 아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열린 연합에서의 사건을 끝내고 일어섰다.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빽빽한 종이를 바라보았다.

‘전설의 근원’에서는 다섯 용사의 도전과 차원침입군과의 싸움만 남았다.


*


“그래? 내일 오전이면 끝나겠네?”

푸르니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며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미끄럼틀 꼭대기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운이 없어 돌아다니기 힘들었다. 소설이 써지는 만큼 기력이 쑥쑥 빠져나갔으니까.


날이 맑았지만, 달은 보이지 않았다.

달빛사원에서도 신호가 오지 않았다. 저쪽에서 신호를 보낸다 해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야문이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소멸의 징후가 보여?”

“조금. 진기가 빠져나가고 있어.”


“심지아가 내게 이름을 줬으니 네가 가면 나도 떠나겠어.”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내가 놀라 바라보는데도 야문은 진지한 얼굴로 푸르니를 불렀다.


“푸르니, 넌 어떻게 할 거야?”

“나도 별 미련 없어. 심지아와 같이 있을래.”


“아우, 난 소멸한다니까?”

“그럼, 마지막까지 지켜드리지!”

푸르니는 자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거 완성본 아니잖아? 초고잖아? 완성하고 가야지.”

“초고만이라도 우리 세계는 살 수 있어.”

“안전한 것과 완전한 것은 달라. 그 상태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그의 말에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어쩌라는 건지···.”


그때 놀이터 입구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령님? 지아 정령님?”

유연한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놀이터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실증계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요?”

“미친놈인가 하겠죠? 하하하.”


유연한이 그네에 앉으며 내게 손짓했다.

내가 그네에 앉자 그네 두 개가 나란히 흔들렸다. 내가 앉은 자리는 그네 혼자 흔들리는 것으로 보이겠지.


“마침 잘됐어요. 유화백님한테도 인사하려 했는데.”

“인사요? 무슨···.”

“저는 곧 사라질 거예요.”


“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 호수랑 오두막이 마음에 든다면서요?”

“만나면 헤어질 때가 있는 거죠.”

나는 다리를 까딱거리며 그네를 흔들었다.


유연한의 축 처진 어깨를 보니 측은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유령이 떠난다고 슬퍼하는 사람이라니.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림 덕분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어요. 쉴 집도 주고, 음식도 나눠주고.”

“에이, 그건 미용실 실장님이랑 옷가게 사장님이 주신 건데요.”


“유연한씨가 착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저 같은 유령도 받아주잖아요? 저를 볼 수 있는 건 그만큼 영혼이 맑다는 뜻이에요.”


“그치만, 전 맨날 이 모양인데요.”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네줄을 쓰다듬었다.


“이름이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자신을 사랑하세요.”

“안 가면 안 돼요? 계속 같이 있으면 좋잖아요?”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요.”


고개를 들어보니 야문과 푸르니가 시소에 올라앉아 키득거렸다.

손으로 하트를 그려 보이며 손가락으로 유연한과 나를 가리켰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렇게 신났을까.


“그럼···. 헤어지는 거 말고,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해요.”

유연한이 일어서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두 손을 맞잡고 똑바로 섰다.


“정령님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능력자잖아요? 제 그림이 달라질 정도니까요.”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양쪽 손가락을 꾹 눌러 잡았다.


“다시 만나도 꼭 알아볼 거예요. 지아님은···, 매, 매력이 있어요.”

유연한이 진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의 뒤편으로 다가온 야문과 푸르니는 손을 흔들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다른 날이었다면 유연한도 위로하고, 야문과 푸르니와 농담을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눈을 뜰 힘도 없었다.


결국 야무과 푸르니의 부축을 받으며 오두막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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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결심 22.10.20 30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7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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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7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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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2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8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5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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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의외의 변수 22.10.14 30 1 11쪽
24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3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40 1 10쪽
21 빙의 22.10.12 29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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