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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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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58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4 09:31
조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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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유령

DUMMY

미끄럼틀 꼭대기에 앉아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하현에서 그믐으로 넘어가며 일그러지고 있었다. 구름이 흘러가며 그나마 희미한 달빛을 가렸다.


달빛이 깨끗하고 힘차며,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그런 저녁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야문과 가디록, 수니홀이 미끄럼틀 아래에 모였고, 고충만과 금은비는 어린 이귀들과 함께 놀이터 구석에서 구석으로 숨바꼭질했다.

작은 놀이터에 숨을 곳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디록이 미끄럼틀 기둥을 두드렸다. 내려오라는 신호였다.

“푸르니는 왜 안 나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은데.”


“은서님이 그랬어. 때가 되면 나올 거라고.”

수니홀이 손짓했다.


“푸르니도 참 안됐어. 결국 그 영역은 멸망한 거지?”

“그렇지. 완전히 사라진 거야.”

야문이 혀를 차며 기둥 사이 난간에 걸터앉았다.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라. 상상계에 있었다면 푸르니도 소멸했을 테니.”

수니홀이 말하자 가디록이 손뼉을 쳤다.

“선택받은 건가? 유일한 생존자?”


“그럼 뭐해? 영원히 떠돌아야 하는데.”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라고. 심지아가 있으면 걱정 없잖아? 예전에는 나도 암담했는데, 은서님을 만나고 나서는 이 삶도 괜찮더군.”

수니홀의 위로에도 야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아! 대체 작가는 언제 소설 써? 내 이름 넣어달라고 부탁했어?”

기대에 가득 찬 가디록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작가가 소설을 안 쓰겠다니···.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목소리가 자꾸 기어 들어갔다.


원작가의 소설을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세계의 모든 이들이 기다리는데,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뭐라고요!”

새된 소리가 찌링하고 귓가에 울렸다.


“소설을 안 쓴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금 전까지 놀이터 구석에 숨어있던 금은비가 내 앞으로 휙 날아왔다.


“작가가 글을 써야지요! 왜 안 쓴대요?”

“오래전에 쓰다만 글이라 손대고 싶지 않대요.”

“그럼, 우리는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금은비가 소매를 걷으며 씩씩거렸다.

“뭐 하자는 거예요?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서 어디다 쓴대요?”

콧김을 뿜으며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던 그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심지아님이 마법을 걸면 되잖아요? 주술사잖아요?”

“이건 주술로 풀 문제가 아니라···.”

“이러면 작가를 찾은 게 무슨 소용이에요?”

금은비가 목소리를 높이자 고충만이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만, 그만. 파견의 주술에도 제약이 있잖아. 협박해도, 최면을 걸어도 안 된다고. 아무리 주술사라도 어쩌겠어?”

“그래도, 이건···.”


금은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주술사라고 해서 믿었는데···. 실망이에요. 금방 돌아갈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녀는 미끄럼틀 아래 쪼그려 앉았다.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울음에 섞여 웅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니. 어쩜 이럴 수가 있죠? 여기 세상을 보세요. 잘 먹고 잘살아요.”


금은비가 콧물을 삼키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 구두, 그 가방, 엄청 예쁜 옷. 휘황찬란한 물건들! 최소희를 보세요.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요. 사람으로요. 이런 사념체가 아니라!”


“금은비, 뭔 말이야? 돌아가고 싶다는 거야, 여기 남겠다는 거야?”

고충만이 입을 씰룩거렸다.


나는 가만히 금은비를 내려다보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세계로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여기서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


이곳과 비교하면 우리 세계는 소박하고 고단했다.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겠지.

여기 남는다해도 사람이 될 수 없으니 그녀가 원하는 세상은 영영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래 봬도 나, 충분히 예쁘고, 안목도 있고, 감각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세상을 살 기회조차 없다니!”

금은비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도 쇼핑하며 미모를 가꾸고 싶다고요. 여기서! 바로 여기서!”

울먹이던 그녀가 부르르 몸을 털고 일어났다.


“심지아님, 이제 날 찾지 마세요.”

금은비는 갑자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고충만이 재빨리 팔을 뻗었지만, 옷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녀는 남쪽 하늘을 향해 휙 날아가 버렸다.


“금은비! 무슨 짓을 하려고!”

고충만도 날아올랐다.

“심지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찾아올게.”


두 사람이 사라지자 놀이터는 갑자기 고요해졌다. 장난꾸러기 이귀들조차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가디록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야문이 그의 팔을 잡았다.


남은 기력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서 있을 힘도 남지 않았다.

‘쉬고 싶어. 지금은 쉬어야 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망연히 서있는 이들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휘적휘적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호숫가 오두막으로 가자.

잠깐이라도 힘을 받는 거야. 그림에 치유력이 있으니 괜찮아질 거야.


비틀거리며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


반지하 방에서 유연한이 울먹이고 있었다.

그는 호수가 그려진 그림 앞에 주저앉아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었다.

“제발 돌아오세요. 귀신이든 정령이든 상관없어요. 여기 계셨는데 어디 가셨어요?”


그 뒤에 서서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았다. 내가 있던 것도, 오두막 문도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텐데.

유연한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세상이 텅 빈 것 같아요. 정령님이 계실 때 얼마나 훈훈하고 아늑했는데요.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다뇨.”


그림 그리는 사람은 눈이 다르구나. 그는 보는 감성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실증계의 다른 결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걸 어쩐다?’

나는 버릇처럼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양쪽 엄지를 맞부딪쳤다.

미늘호수 앞에서 울먹이는 그를 보니 차오름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


달빛사원에 막 들어온 날이니 그때 그는 열네 살이었다.

해치족이라 해도 어리고 작아서 몸집이 나와 비슷했다. 열여섯부터 갑자기 크기 시작해 지금은 나를 가리고도 남을 체격이 되었지만.


그날도 나는 수련을 마치고 약초를 캐며 언덕으로 올라갔다. 하람언덕 중턱, 내가 늘 미늘호수를 바라보던 그 자리였다.


처음 보는 소년이 훌쩍이고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얘, 왜 여기서 울고 있어?”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그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해치족이면 용사의 혈통이구나. 저렇게 울 정도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데. 혼자 여기 올라온 거라면 어머니도 안 계신 거고.

‘가만, 오늘 기념품 가게에 새로 온 시동이 해치족이라고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조금 서글펐다. 아이의 어머니가 다른 지방 남자와 재혼하느라 아이를 친척에게 맡겼는데, 그 친척도 살림이 어려워 다시 사원에 맡겼다는 것이다.


나는 소년 곁에 앉았다.

“난 달빛사원 식당에서 일해. 혹시 나 본 적 있어?”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어야 가슴이 시원해져.”

나는 바구니에서 향기 짙은 약초를 꺼내 흔들었다.


“난 열한 살에 여기 왔거든. 벌써 오 년이나 지났네. 처음에는 나도 많이 울었어. 아버지는 생각 안 나고,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셨어. 오빠도 오래전에 떠났는데, 지금도 세상을 탐험하고 있을 거야.”

소년을 향해 애써 웃음 지었다.


“누나는 여기 어떻게 왔어요?”

“옆집 아주머니가 원장님께 부탁해주셨어. 주술사의 자질이 있다고.”

“주술사예요?”


“아직은 견습생. 다 울었으면 약초 보러 갈래?”

나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덕 위 약초밭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사람이 가꾸는 것도 있지만, 숲속에서 저절로 자라난 약초도 많았다.


나는 새빨간 꽃 앞에 앉았다.

“이거 봐. 예쁘지? 얘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뭔지 알아?”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 바로! 사람의 피야. 무섭지?”

나는 일부러 크게 웃었다. 웃으며 빨간 꽃잎을 흔들자 소년도 짐짓 따라 웃었다.


“슬플 때는 호수를 바라봐. 물비늘이 위로해줄 거야.”

나는 손을 내밀었다.


“비조족은 춤과 노래를 거느리고 태어나지. 마음이 울적할 땐 춤추는 게 최고야.”

숲속에서 우리는 춤을 추었다. 숨이 턱에 찰 때까지.


*


“정령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를 부르는 건가?

‘응? 여기가 어디지?’


“정령님, 맞죠?”

유연한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보인다고?

그는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형상, 어렴풋한 빛깔.

‘유령이 되었잖아?’

차오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형상으로 드러났구나. 쉬려고 왔다가 이런 대형사고를 치다니.


내가 돌아서자 유연한이 내 팔을 붙잡았다. 스쳐 가기는 했지만, 그의 손이 그대로 느껴졌다.

“가지 마세요! 제발!”


그는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령님! 그림의 정령 맞죠? 여기 머물러주세요.”


‘그림의 정령이라고?’

웃음이 나왔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니 수호신처럼 그림의 정령이 필요하겠구나.


그의 간절한 눈빛을 보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최소희의 집에서 노트를 가져올 사람.’


신발 상자를 가져오려면 누군가의 손이 필요했다. 바로 유령도 상관없다는 사람.


“그럼, 날 도와줘요. 부탁 하나 할게요.”

“하나가 아니라 열 개, 백 개도 괜찮아요.”

유연한이 대답하자 온몸에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그에게는 내 목소리도 들리는구나.


“유령을 보고도 놀라지 않네요?”

“오래전부터 꿈꿨어요. 이 순간이 오기를.”

유연한은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어릴 때부터 이상한 느낌은 있었어요. 그게 뭔지 몰랐지만, 꼭 보고 싶었어요. 어른들은 망상이라며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랬지만요.”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콧잔등을 구겼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어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안 봐도 되거든요. 세상 속의 다른 세상도 그릴 수 있어요.”

“그건 당신이 특별해서 그래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록 잡을 수는 없지만 그의 손이 스쳐갔다.

“난 심지아예요.”


“심지아님···.”

그는 꿈을 꾸듯 내 이름을 읊조렸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도와줄 사람을 찾았어. 내일은 또 다른 시도를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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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결심 22.10.20 2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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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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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 유령 22.10.14 33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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