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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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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50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09.28 15: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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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다른 단서를 찾아

DUMMY

나주연은 신중하게 양념을 재가며 나물을 버무렸다.

집에 돌아온 후 줄곧 요리했는지 방은 고소한 기름 냄새가 가득 찼다.

‘혼자 사는 것 같은데 오늘은 손님을 초대했나?’


어제 전화하면서 말했었지.

‘오후에는 일찍 시작해도 되겠죠? 내일 저녁이 아버지 제사라서요.’


아버지 제사였구나.

그렇다면 다른 일에는 신경 안 쓰겠지? 이를테면 종이가 흩날리던가, 바스락 소리가 난다던가.


그녀가 요리하는 동안 침대 아래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마다 들어가 낱장 종이부터 책까지 모두 훑었다.

이중인에 대한 다른 단서가 있는지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침대 밑에서 작은 책장으로 옮겨갔다. 메모, 사진, 낙서, 책 닥치는 대로 펼쳐보았다.

‘없어, 어디에도 없어. 스프링 제본된 출력물, 오직 그거 하나야.’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다시 찾아야 해. 어디서 시작하지?’


이쪽 세계에 오면 바로 찾을 줄 알았는데···. 보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을 거라 믿었다.


이단주 원장의 충고대로 작가를 찾는 것은 쉬울 거라 생각했다. 소설을 다시 쓰게 하는 것이 어렵지. 그런데 작가도 못 찾았으니···.


사념체가 아니라면 나주연에게 물어볼 텐데.

그녀가 이중인도 아니고, 글을 쓰지도 않으면서 도대체 그 책이 왜 여기 있는지.


‘유연한의 집에 가서 검색해야겠다. 곧 잠들 시간이니 컴퓨터를 아침까지 쓸 수 있어.’

미처 찾지 못한 다른 물건이 있는지 방을 둘러보았다.


화장대 위에 놓인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중년의 부부와 두 딸이 함께 찍은 사진.

이 남자가 아버지인가?


나주연은 작은 상에 음식을 올리고 아버지의 사진도 올려놓았다. 하얗고 긴 초에 불을 붙였다.

“아버지, 많이 드세요. 좋아하시던 해물전이랑 삼색나물이에요. 막걸리도 있어요.”


사진을 보며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자 차마 방을 나올 수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비록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제사가 끝날 때까지 함께 있어야지.


퀭한 눈으로 술을 따르는 그녀를 보자 달빛사원에서 아지트를 찾아준 아저씨가 생각났다.

그 아저씨는 하나뿐인 딸을 미늘 호수에서 잃었다.


*


소설에 이름이 안 나오니 그냥 아저씨였다.


스승님을 그냥 스승님으로 부르는 것처럼 이름이 없어도 여러 호칭이 있었다.

달둥지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는 동생도 아이라고 불렀다. 가장 친한 데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아저씨는 달빛사원의 시설을 관리했다.

너무 말라서 어깨가 구부정하고, 귀가 어둡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저씨는 사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사원 벽과 하람언덕이 이어진 곳에서 작은 동굴을 찾아냈다.


“심지아, 이리 와봐. 근사한 동굴을 발견했어.”

아저씨가 자랑스럽게 보여준 곳은 아늑한 동굴이었다.


“여기서 연습해. 염력이랑 대화술 말이야. 너만큼 마법 잘하는 주술사도 없잖아?”

“와! 정말 멋져요. 그러잖아도 작은 짐승을 초대할 공간이 필요했는데···. 고마워요!”

너무 기뻐서 아저씨의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아저씨와 얘기할 때면 언제나 약간의 마법을 더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잘 알아듣지 못하니까.


보면 볼수록 아담하고 포근한 동굴이었다. 입구 위쪽으로 구멍이 하나 더 있어 빛이 잘 들어왔다.

“여기 화초도 놓아야겠어요. 꽃과 대화하게 되면 아저씨에게도 알려줄게요.”


“그래, 그래. 그럼 오늘 방들이 하자.”

“방들이요?”

“동굴들이인가? 여기가 심지아 전용 동굴이라고 신고해야지.”


“그런데, 정말 저 혼자 써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여기까지 찾아올 사람도 없고, 네가 마법을 걸면 아무도 못 찾을 거야.”


아저씨는 끙끙 허리를 펴면서 뿌듯한 얼굴로 동굴을 둘러보았다.

“이 앞에다 모닥불과 향을 피우자. 차오름도 부르고.”

“예? 차오름은 왜요?”

“그 녀석도 가족이 없잖아? 가족 없는 우리끼리 뭉쳐야지.”


차오름을 부른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붙어있어도 사원 안에서는 그와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열일곱 살의 나는 소심하고 용기가 없었다.

그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차오름은 주인공이라 곁에는 늘 구하라가 있으니까.


나는 가끔 하람언덕에서 그와 마주치는 것에 만족했다. 중턱에 솟아 나온 너럭바위에 앉으면 미늘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지치고 힘들 때면 그곳에서 호수를 바라보는데, 차오름도 가끔 거기 올라왔다.


아저씨의 초대로 차오름과 모닥불 앞에 앉게 되었다.

그는 나를 보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누구에게나 환하게 웃지만, 괜히 가슴 설레었다.


차오름은 장작을 한 아름 나르고, 호수에서 잡아 온 물고기를 꼬치에 꿰어 모닥불에 올렸다.


그는 해치족의 후예답게 크고 건장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오뚝한 코가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그때는 열다섯 살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의젓했다.


사원의 방문자 중에는 우리를 남매로 보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보기에는 딱히 닮은 곳이 없는데. 그런 사람들은 차오름을 오빠로 보았다.


“아저씨, 그런데 이 향은 뭐예요?”

“오늘이 우리 딸이 죽은 날이거든. 너희들과 함께 위로하려고.”


“죄송해요.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지.”

아저씨는 모닥불 옆에 향을 세 개 꽂았다.


“소설에 나오잖아? 미늘호수에 빠져 죽은 아이들도 많다고. 미늘호수는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 낙원으로 보내준단다. 우리 딸도 그렇게 낙원으로 갔어.”


아저씨가 모닥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차오름은 잘 익은 물고기를 내밀었다.

“힘내세요. 아저씨. 따님은 행복하게 지낼 거예요.”

“그렇겠지? 우리 딸도 주술사가 되고 싶어 했어. 살아있다면 심지아만큼 뛰어난 주술사가 되었을 텐데.”


“아우, 아저씨는. 구하라가 제일 잘하죠. 그 아인 타고난 주술사잖아요? 태어날 때도 신탁을 받았고, 뭐든 최고니까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최고점은 늘 구하라의 것이었다.

주인공이니 당연하다고 느끼면서도, 확실히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나도 물고기 꼬치를 꺼내려고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차오름이 꼬치를 꺼내 검댕을 긁어내고 비늘을 손질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잡이로 만든 다음 내게 건넸다.


“고, 고마워.”

내가 당황하니 아저씨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아저씨는 물고기 살을 발라내며 차오름을 불렀다.

“오름아, 네가 주인공이긴 해도 지아를 잘 챙겨야 한다. 누나로 깍듯이 모시고 말이다. 내 딸이랑 닮아서가 아니라, 진짜 성실하고 착하거든.”


이번에도 차오름은 환하게 웃었다. 마치 태양처럼.

“알아요. 저도 누나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나는 침을 잘못 삼켜 사래에 걸렸다. 이런 순간에 실수하다니.

기침을 간신히 참으며 물을 들이켰다.


“너희가 있으니 좋구나. 이런 날 혼자 있으면 너무 쓸쓸하거든. 내년에도 같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저씨는 다 탄 향을 치우고 새 향을 꺼내 꽂았다.


“지아도 오름이도, 나도 가족이 없으니 우리가 가족처럼 지내자꾸나.”

“걱정 마세요. 제가 아저씨도, 누나도 꼭 챙길게요. 내년에도 함께 향을 피워요.”

차오름도 향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나무 타는 냄새와 섞여 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차오름은 용사로 선택되어 모험을 떠났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서 소설이 멈추었기에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갔다.


*


멍하니 앉아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튀어 올랐다. 눈앞에 있던 차오름은 보이지 않았다.

달빛사원이 아니었구나. 가슴이 쓰라렸다.


나주연은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응, 언니.”

“너 궁상떨고 있을까 봐 전화하는 거야. 지금 막 추모예배 끝냈어.”

“아, 캐나다는 지금 아침이지?”

“출근 준비하느라 바빠.”


“엄마는?”

나주연은 말하다 말고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도, 건너편에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거뜬하셔. 천국에 먼저가 계시니 즐거운 마음으로 만날 날을 기다린다나.”

“엄마답네.”

“너도 엄마 좀 닮아봐. 혼자 울지 말고.”

“나도 말짱해.”

“그럼 다행이고.”


두 사람은 서로 안부 인사를 건네며 전화를 끊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주연은 조용히 일어나 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마쳤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지 계속 뒤척였다.


달빛사원 아저씨의 한숨이 들렸다.

‘이런 날 혼자 있으면 너무 쓸쓸하거든.’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만 있으려니 답답하고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술뿐이었다. 마법력이 조금이나마 돌아와 다행이었다.


그녀가 평안히 잠들 수 있도록 주문을 외웠다. 오늘 밤은 꿈도 꾸지 않고 달게 잠들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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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1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4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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