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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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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39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09.27 15: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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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특이한 인연

DUMMY

‘너, 상상계에서 왔구나?’

그녀는 소리 내지 않고 생각으로 말을 걸었다. 이쪽 세계에 저런 능력자가 있다니.


‘수니홀에게 들었어요. 제가 온 곳이 상상계라고.’

‘아, 수니홀을 만났어?’

은서는 눈동자를 빛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나는 원래 모습으로 보일까? 아니면 사념체로 보일까?


은서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책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손님은 거구의 남자뿐이었다.


계산대 안쪽 의자에 앉으며 내게도 보조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둥둥 떠 있으니 너무 이상해. 목매단 사람 같다.’


그녀에게 다가가니 나무 냄새가 났다. 싱그러운 숲의 향기였다. 이런 기분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다니.


‘전설의 근원’에 사는 사람들은 하마터면 냄새를 못 맡을 뻔했다.


이야기 시작부터 차오름이 용사로 선정될 때까지 작가는 후각에 대해 전혀 묘사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에 냄새가 있는 것도 몰랐다.


그러다 차오름이 용사로 선발되고 사원 뜰에 핀 장미 향기를 맡는 장면이 나온다. 전설의 무기를 얻기 위해 떠나기 전날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우리의 기억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세상의 모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때는 정말 당황스럽고 괴로웠는데,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냄새를 맡게 되었으니까.


은서에게서 스며 나오는 숲의 향기를 못 맡을 뻔했다니 아찔하다.


내가 의자에 앉자 그녀는 작은 수첩을 펼치고 볼펜을 찾아들었다.

‘너도 이름이 있어?’

‘예. 심지아예요.’


‘심지아.’

은서는 내 이름을 되뇌며 수첩에 이름을 적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상상계에서 넘어오는 일은 아주 드문데.’

‘작가를 찾으려고요. 우리 세상이 멈췄거든요.’


‘작가가 집필 중단.’

은서는 중얼거리며 수첩에 적었다.


‘어떻게 찾으려고?’

‘파견의 주술은 단서가 있는 곳으로 보내줘요. 어제 제가 나온 곳이 단서일 거예요. 스프링으로 묶인 종이였어요.’


‘거기 작가 이름이 써있어?’

은서의 물음에 책에서 본 대로 글자를 적어주었다.


‘전설의 근원’이라는 제목과 ‘내가 거기 있다’라는 부제목도 쓰고, ‘이중인(二重人)’이라는 이름도 썼다.


‘이건 사람 이름이 아닌데? 필명인가 보다.’

‘필명요?’

‘별명 같은 거야. 이걸로는 찾기 어려워. 스프링이라면 책도 아니고.’


은서는 수첩에 몇 가지 낙서를 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하고 얘기하니 달빛사원에서 언니들과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이쪽 세계로 나온 지 겨우 이틀째인데 오래전 일처럼 아득했다.


‘그런데도 상상계에 태어났다고? 놀라워!’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휘파람을 불었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많은 사람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지만, 상상계에 태어나는 작품은 얼마 안 돼. 그건 정말 귀한 거야.’

‘우리 세계에도 많은 영역이 있는데요. 셀 수 없이.’


‘그야, 실증계에 사람이 사는 한 계속되니까. 살아남으면 그렇다는 거야. 완성되지 못하면 상상계에서도 사라지고.’

‘우리 세계도 무너지나요?’

‘그걸 살리려고 네가 온 거지. 어쨌든 태어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은서는 일어나 진한 코코아를 한 잔 타 주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지? 네 머리카락 보니까 딱 어울린다.’


그녀는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잔을 내밀었다.

따뜻하고 달콤한 코코아가 들어가니 몸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끼니때마다 챙겨주던 아주머니들이 생각났다.

입맛이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챙겨주던 분들이었다. 달빛사원의 식당을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맺혔다.


‘어, 죄송해요.’

‘편하게 있어. 손님이 몰려오려면 멀었으니까.’

‘저 사람은요?’

‘준알바라고 해야 하나? 붙박이라고 해야 하나? 이름은 현재안인데, 현재밖이라고 불러 달래.’


은서가 싱글거리며 속삭였다.

‘저 사람에게는 여기가 독서실이거든.’


코코아를 다 마시고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실내에 사람이 있는 데도 은서가 태연한 것을 보면, 내가 잔을 움직여도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나 보다.


‘파견의 주술에도 기한이 있지?’

‘보름에서 다음 보름까지요.’

‘한 달이라···. 그 스프링 책, 어디 있었어?’

은서는 다시 볼펜을 쥐고 수첩을 펼쳤다.


‘어떤 여자의 방이었어요. 침대 아래 상자에서 나왔어요.’

‘그 주인이 누군지 알아?’

‘이름이 나주연이라고 했어요.’


“주연이?”

은서가 놀라 소리치자 책방에 앉아있던 현재안이 돌아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귀에 갖다 댔다.


“맛집 식당 이 층에 사는 그 나주연?”

‘예. 여기서 멀지 않아요.’


“그럼 그 소설은 다른 사람이 쓴 거야. 주연이는 소설 안 써.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오래 앉아있지 못 하거든.”

은서가 스마트폰을 들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숨을 들이마시고는 폰을 내려놓았다.


‘나주연을 아세요?’

‘재작년에 같이 청소 알바 했어. 일 년 정도? 도배사 일을 배운다며 그만두었어. 나도 여기로 알바를 옮겼고.’


‘그럼 왜 책이 거기 있을까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중요한 단서일 거야. 한 번 물어볼게. 가끔 연락하거든. 그건 언제 쓴 소설이래?’

‘모르겠어요. 원장님은 아주 오래되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럼 더더욱 찾기 힘들걸.’


은서는 수첩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태까지 쓴 단어를 동그라미로 묶으며 무수히 많은 동그라미를 이어나갔다. 마치 생각을 비워내는 것처럼.


‘은서님은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난 특이체질이거든. 귀신 보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이쪽 세계에 특이체질이 많나요?’

‘아니. 거의 없어. 우리 빌라 식구들은 다르지만.’

은서는 또 생글거렸다. 무언가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너도 한 번 초대할게. 빌라 옥상에서 보면 경치가 아주 좋거든. 특히, 그믐밤에는.’

‘그믐의 야경요?’

등불을 잔뜩 건 달빛사원의 축제가 생각났다. 그 정도로 아름답다면 빨리 보고 싶었다.


은서가 벽시계를 보더니 탁 소리 나게 수첩을 닫았다.

‘일단, 뭔가를 찾으려면 컴퓨터부터 배워. 요즘은 뭐든 인터넷으로 찾으니까.’

‘컴퓨터요? 그거 뭔지 알아요.’


문이 열리고 어린 학생이 하나 들어왔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는 곧장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자주 왔는지 능숙하게 무릎담요와 쿠션을 찾아 들었다.


은서는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래? 상상계에서는 무슨 일을 했어?’


‘주술사예요. 달빛사원의 마법과 주술을 배웠어요.’

‘오! 그래서 파견되었구나. 너라면 하루면 충분히 익힐 거야.’

‘그건 어디서 배우나요?’


은서는 창가로 다가가 내게 손짓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맞은편 건물을 보니 삼 층에 ‘노닐 PC방’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저기서 사람들이 컴퓨터를 쓰고 있을 거야. 게임을 주로 하지만, 메일도 보내고, 검색도 하니까 잘 보고 배워.’


새로 들어온 학생이 은서를 불렀다.

“언니, 아아 한 잔 주세요.”

“넌 학교 안 가고 왜 또 왔어?”

“생리가 터져서 아프단 말이에요. 얼마나 아픈지 언니는 모를 거예요.”


“어쭈! 그렇게 아프면 의무실을 가든가 집에 가야지, 여기 오면 안 아프니?”

“아우, 잔소리, 잔소리. 왜 이렇게 잔소리쟁이가 많아? 정말 못 살겠어!”

아이는 툴툴거리며 주먹으로 쿠션을 두드렸다.


은서는 코웃음을 짓고는 계산대 뒤편 커튼을 열었다. 내게 손을 흔들기에 나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생각지도 못한 은인을 만나다니. 가슴이 뭉클거렸다.


*


노닐 PC방에는 열 명 정도의 손님이 띄엄띄엄 앉아있었다. 모두 헤드폰을 끼고 모니터만 노려보았다.

깨끗한 실내에는 조명도 아늑하고, 커피 향이 가득했다.


불 켜진 모니터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요란하고 화려한 그림이 마구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총기를 난사하고, 창검이 부딪치고, 회오리가 일어났다. 이런 그림을 보려고 온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런 표정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입술을 씰룩이고, 눈썹을 꿈틀거리고, 볼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으니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왔다.


계산대 근처에 앉은 사람은 게임이 아니라 다른 화면이었다. 헤드폰도 끼지 않았다.


‘아, 저거! 검색하는 거다.’

어떻게 하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모니터 옆에 딱 멈추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림이 잔뜩 붙은 반지하 방에서 본 남자.


‘집주인?’

그의 그림 속 오두막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집주인 맞지. 그의 이름도 알고 있다.

‘유연한.’


벽에 걸린 그림에 모두 이름을 적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가 그린 호수가 눈앞으로 떠올랐다. 진짜 미늘 호수는 아니지만, 미늘 호수라 부르기로 한 아름다운 그림.


어젯밤에는 모니터에 그림을 그렸지만, 벽에 걸린 그림은 모두 물감으로 칠한 것이었다. 그것이 더 따뜻하고 정이 가던데.

‘여기서도 그림을 그리나?’


그는 모니터에 떠 있는 사진을 둘러보고, 가져온 노트에 스케치도 하면서 느긋하게 손을 움직였다.


계산대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에게 속삭였다.

“형,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왜? 가야 해?”

“집에 가서 하세요. 한참 지났어요.”


“후배 좋다는 게 뭐냐? 너무 답답해서 그래. 거긴 창문도 못 연다니까.”

“답답하면 산책을 하거나 바람을 쐐야죠. 여긴 더 답답해요.”

“알았어. 금방 나갈게.”


젊은 남자가 약속을 받아내고는 계산대로 돌아갔다.

유연한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른 화면을 띄웠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모니터와 키보드, 그의 손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기억재생술이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달빛사원에서 배운 기억재생술은 무엇이든 한번 보면 바로 배우는 능력이었다. 우리 세계에서는 꽤 잘했는데, 여기서는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마법력이 살아나고 있어도 원래 있던 세계가 아니어서인지 따라가기 버거웠다.

속도도 늦고, 계속 깜빡거렸다. 뚝뚝 멈춰서 중간중간 끊어지는 부분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래도 필요한 것은 모두 알아냈다.

검색하는 것, 문서 작업하는 것, 메일 보내는 방법까지. 몇 번만 연습하면 이쪽 세계 사람들처럼 자유자재로 컴퓨터를 쓸 것이다.


유연한의 집에 컴퓨터가 있으니 그가 없을 때 쓰면 된다. 모자란 것은 그때그때 배우면 되고.


‘유연한, 당신을 나 심지아의 개인 교사로 임명하겠습니다.’

들리지 않겠지만. 나는 정중히 부탁했다.


이제 인터넷으로 이중인을 검색해야지. 안되면 사람을 찾는 게시물을 올리던가.

막막한 어둠에 희망이 생겼다. 왠지 뿌듯했다.


스프링 책을 다시 살펴봐야겠어. 내가 왜 거기서 나왔는지.

아니지. 도와줄 사람을 보낸다고 했으니 그 사람들부터 찾아야 하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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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결심 22.10.20 2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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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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