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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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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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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이 끝나고

DUMMY

혜부거 대장군의 응접실은 평온하고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요귀와 혈전을 치른 전사 두 명이 앉아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혜부거는 숨을 가다듬으며 손에 든 쌍검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검붉은 땅, 끓어오르는 열기 속에서 몰려드는 요귀를 상대로 몸을 던졌는데, 정신을 차리니 응접실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맞은편의 나루뫼도 어리둥절하여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통 땀에 젖었는데, 한 방울도 젖지 않았잖아?’


잠시 후, 하인이 문을 두드렸다.

“대장군님,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게.”


혜부거와 나루뫼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하인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끓는 땅에서 며칠이나 헤맸다고 생각했는데, 다과를 가지러간 그 잠깐 사이였다니.


“무술훈련소를 세운다고?”

“네. 장공거에 버금가는 수련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자네와 함께 싸운 것도 인연이니 이 진귀한 경험을 믿어야지. 좋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혜부거가 서실에 빼곡히 꽂힌 책을 돌아보았다.

“이왕 조수가 되기로 하였으니, 무예교본을 완성할 때까지 도와주게.”

“마지막 임무라고 하셨지요? 성심껏 돕겠습니다.”

“이러다 자네가 내 장례까지 치를지도 모르겠군. 허허허.”


나루뫼가 찻주전자에 물을 따랐다. 응접실에 가득한 차향을 맡으며 혜부거는 쓰던 교본을 몇 장 넘겼다.

“석 달 정도면 되지 않겠나. 내 모든 책을 넘기겠네. 그것도 함께 정리하세. 후배들을 위해 쓰인다면 의미 있는 일이지.”


나루뫼는 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쌍검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의 성물이 너른벌로 내려와 주인을 선택했다면, 주인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잘은 모르지만···.”


혜부거가 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딘가에 숨어서 다음 주인을 기다리지 않겠나?”


나루뫼도 자신의 검을 쥐었다. 반인반천인 자신도 죽을 때 검을 가져가지 못한다.

몸은 여기 남고, 혼만 영천옥으로 간다.

‘이 검은 진백성님이 다시 부를까? 과연 어떻게 될지···.’


혜부거와 나루뫼는 교본을 쓸 계획을 세우며 밤이 새도록 불을 밝혔다.


*


아만상단의 행렬이 진을 친 들판에도 밤이 찾아들었다.


누리예와 이곤은 숨을 헉헉 거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리개가 바람에 펄럭였다.

분명 떠나기 전에 들어온 천막 안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죠?”


조금 전까지 바닥도 없는 허공에서 몰려오는 요귀를 상대했다. 빙검과 연검이 빛을 발하며 어두운 공간을 밝혔다.

요귀의 비명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는데 천막 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했다.


“그 폭발이 사로잔님과 관계있을 겁니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빙검이 크게 흔들렸거든요.”

“그러고 보니, 빙검에 서린 기운이 제 것과 함께 한곳을 향해 날아갔었죠. 그곳일 겁니다.”


누리예와 이곤은 괴이한 싸움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손끝의 감각이 남아있었다. 눈앞이 여전히 어지러운 공간인 듯 했다.


수비대원이 가리개를 열었다.

“대장님, 술이 준비되었습니다. 나오시죠.”

“우리가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나?”

“예?”


대원이 어리둥절하여 누리예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들어가셨잖습니까? 왜 그러시나요?”

“아, 아니. 오늘은 손님도 계시니 한 잔 안 할 수가 없군.”


누리예와 이곤은 대원들 사이에 앉아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미지근한 술이 들어가니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요귀들과 싸우며 긴장했던 몸이 서서히 쉼을 찾아갔다.


“대장님, 다음에 다시 만나면 대련하고 싶습니다.”

“이곤 부장과 상대한다면,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아서 언제 어디서든 다시 만날 겁니다.”

“하하. 적어도 우리가 적으로 만나지는 않겠지요?”

“당연하죠!”


두 사람의 술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타오르는 불길이 긴 그림자를 만들며 넘실거렸다.


*


상재믈국 감항의 고연재 앞에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분명 귀신이나 요귀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 하나둘씩 등이 켜졌다.

고연재 앞의 등불을 켜기 위해 하늬도 촛불을 들고 나왔다. 간판이 잘 보이도록 커다랗게 만든 등이었다.


하늬는 등불을 켜고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꺄아악!”


무조건 소리부터 지르고 다시 눈을 뜨니 사란야와 한 남자가 거기 서있었다.


“언니? 사란야 언니 맞아?”

“하늬야, 잘 지냈어? 새얼은 안에 있니?”

“와! 언니, 언니구나!”

하늬는 사란야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 새얼 오빠한테도 알려줘야지.”

하늬는 쏜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길가온은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 미소를 지었다. 고연재의 간판과 문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고연재구나.”


“어떻게 갑자기 여기로 바뀌었지?”

“아랑누님이 할 일을 잘 마친 걸 거야. 내가 그분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다.”

“오빠는 정말 대단했어. 그 많은 요귀들을 처리하다니.”


사란야는 반월도 두 개가 만들어내는 빛의 장막이 너무나 아름다워 숨을 멈추었다.


감항의 들판에서 그녀의 반월도는 빛의 궤적을 그리며 요귀를 막았는데, 반월도 두 개가 모인 힘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나선을 그리며 춤을 추듯 휘돌던 반월도는 거대한 빛의 장막을 만들어 요귀를 빨아들였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요귀들을 남김없이 무너뜨렸다.


사란야와 길가온은 한 쌍의 반월도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감동과 여운은 이내 소음에 묻혔다.


을단이 지팡이를 짚고 뛰다시피 문을 열었다. 하늬는 새얼의 바퀴 의자를 밀며 달려 나왔다.

“누나! 형!”


길가온과 사란야는 손을 맞잡고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노란 불꽃이 쉬익 하늘로 올라가더니 파팡 요란한 소리와 함께 꽃모양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봐. 불꽃놀이가 아직 안 끝났지?”

“진짜! 이루다는 대단하다. 어떻게 알았어?”


경운과 이루다는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불꽃 세 개가 한꺼번에 하늘로 올라갔다.


“아랑누님이 공간을 닫는 걸 봤거든. 너도 서서히 기억날 거야. 아랑누님이 어떻게 하얀 날개를 상대했는지.”

“난 방패를 휘두르느라 전혀 몰랐어. 아, 갑자기 기운이 쑥 빠져나가는 것은 느꼈어.”


“나중에 기억날 테니까. 지금은 불꽃놀이를 보자. 단주님이 엄청 궁금해 하시겠다.”

“그럼, 이루다는 내일 단주님을 찾아 가겠구나?”

“아랑누님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켠다니까. 저 불꽃보다 더 세게 불꽃이 튄다고.”


경운은 넋 놓고 불꽃을 바라보다가 손뼉을 쳤다.

“아, 운여 아저씨는 집에 잘 들어갔겠지?”

“우리가 여기 잘 왔으니, 잘 있을 거야.”

“그 아저씨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럴걸? 나중에는 루월상단 단주가 되지 않을까?”


경운과 이루다는 목을 쭉 빼고 불꽃이 터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신기하다. 이 방패도, 요귀와 싸운 것도.”

“맞아. 우리가 친구가 된 것도.”


마지막 불꽃이 쏘아 올려졌다.


*


운여는 자신의 방 침대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윤슬에게 가져다 줄 보석도 상자 안에서 얌전히 빛을 냈다. 어리둥절하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분명 요귀들과 격투를 벌였는데···.’

그의 손에는 여전히 단도 소연이 들어있었다.


그가 단도를 들어 살펴보자 한 줄기 빛이 예리하게 지나갔다. 날이 깨끗하고 맑았다. 그가 기억하는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루다와 경운도 잘 돌아갔겠지?”

끝없는 얼음판 위에서 요귀를 상대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끔찍한 괴물을 향해 빛의 화살을 당기고, 방패로 보호막을 만들면서 겁먹지 않던 아이들. 그곳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더 걱정이 많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설마 천궁문이 닫힐 시간은 아니겠지?”

운여는 조바심이 일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여전히 아침의 것이었다. 그는 매듭 노리개와 보석 상자를 품에 넣었다.


더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문을 향해 달음질쳤다.

정원을 건너 대문까지 한달음에 뛰었다. 숨이 찰 때까지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


낮은 울타리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두 노인이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너희들 뭐하냐? 왜 거기서 졸고 있어?”

창계가 무휼의 어깨를 흔들었다.


툇마루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졸고 있던 두 사람이 놀라 깨어났다.


‘꿈을 꾸었나?’

무휼과 시향여는 눈을 깜빡거리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은검과 장창이 그들 옆에 놓여있었다. 손끝의 감각이 남아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럼, 이건 뭐지? 왜 여기 있지?’


어렴풋이 공간 속의 공간이 기억났다.

자신들이 요귀와 상대할 때 사로잔과 해무찬, 다루영, 아순치가 어떻게 싸웠는지 서서히 기억났다.


그들이 모르는 사람들도 그 공간 속에서 함께 싸웠다.

눈가리개를 한 여인과 하얀 호랑이, 붓을 든 꼬마와 검붉은 날개를 가진 새가 있었다.


“너희들 아직도 꿈꾸냐?”

허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봐라. 이 정도면 저녁거리하고도 남지 않냐?”

창계가 잡아온 물고기를 들어보였다. 팔뚝보다는 작지만 제법 통통한 물고기가 세 마리 매달렸다.


“아가, 오늘 저녁은 매운탕이다. 기대해라.”

허신의 말에 시향여가 벌떡 일어났다.


“아, 제가 실력 발휘를 해볼까요?”

“어허!”

허신이 숨 쉴 틈 없이 그녀를 막아섰다.


“귀한 생선 망치지 마라. 매운탕에 있어서는 너보다 내 실력이 훨씬 낫다.”

“맞는 말일세. 사돈의 매운탕이 너른벌에서 최고지.”

창계가 껄껄 웃었다.


“그럼 제가 손질해드릴게요.”

무휼이 물고기를 받아들었다.


무휼이 시향여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직도 뛰는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시향여도 숨을 들이마시고 무휼에게 다가갔다.


놀라운 평범함, 눈부신 일상이었다.


*


구름이 엷게 깔려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었다.

이연은 나귀 보리의 고삐를 잡고 콧노래를 불렀다. 까마귀 도조는 여전히 나귀 등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형님들은 잘 다니고 있겠죠?”

“응. 하늘의 성물이 선택한 사람들이니 잘 해낼 거야.”

아랑누는 한 손으로는 바람을 부리며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또각거렸다.


“다루 누님과 찬 형님의 혼례식을 못 보다니. 아까워요.”

“다음에 한 번 더 하라고 하면 되지. 결혼기념일 같은 거로.”

“에휴, 아니에요. 혼례식에 망령이라도 찾아오면 그게 더 큰일이죠.”


이연은 아랑누가 부리는 바람과 흙 모양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망석이랑 쇳디랑 사음귀가 그렇게 많은데 사람들은 전혀 모르니 신기해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다 잊어버리지. 그건 아유라가 남긴 축복일 거야.”


“에에? 진짜는 모르고 다들 엉뚱하게 기억하는데요?”

“그들은 계속 모르는 게 나아. 진실은 때로 잔인하니까.”


이연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긴, 누님 말이 맞네요.”


이연이 종종거리며 아랑누의 옆으로 다가섰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주인이 죽으면 하늘의 성물은 어떻게 되나요?”

“자기가 있고 싶은 곳에 있겠지? 천계로 돌아갈 수도, 너른벌에 남을 수도.”

“오, 가문의 보배가 되는 건가요?”


아랑누가 바람을 보내고 물방울을 공처럼 만들어 손에 쥐었다.

“아닐 거야. 어디 숨어서 새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겠지. 지금은 정귀가 사라졌지만,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제든 요귀가 강해질 테니까.”

“언젠가 새로운 전사가 나오겠군요.”


‘그때 난 죽고 없겠죠? 무아는 천인으로 돌아갈 거고. 누님도 암흑성으로 돌아간 다음일 거예요.’

이연은 쓸쓸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아랑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전에 대모님과 만나서 일을 배울 생각을 해야지. 네가 할 일 말이야.”

“아, 그렇죠. 헤헤.”

이연은 활짝 웃으며 아랑누의 뒤를 따랐다.


나뭇잎 사이로 넘실거리던 바람이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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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인간세의 전사들 1 22.08.06 56 0 12쪽
207 공간을 열다 22.08.06 62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4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4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4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8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5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2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3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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