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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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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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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5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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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DUMMY

이연과 운여 일행은 처음 도착했던 유리산 아래로 돌아왔다.


이연은 유리산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유리산이 거대한 물주머니처럼 출렁였다. 아직은 움직임이 미미하지만, 곧 쏟아질 것이다.

무아의 넋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운여도, 대원들도 전혀 알지 못하듯이.


몸에 힘이 빠져 뛰던 발이 걸음으로 바뀌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비익정까지 가야 했다.


‘마차까지만 가면 수행원 아저씨들과 나눠서 구역을 맡으면 돼. 그럼 시간 안에 사람들을 피신시킬 수 있어.’

이연이 가슴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눈앞으로 검은 물체가 툭 떨어졌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떨어진 물체가 무엇인지 확인한 이연이 비명을 질렀다.

“까망아!”


몸통과 날개에 화살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아랑누를 태우고 날아오른 도조가 아니라 작은 까마귀의 모습이었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까망아! 어떻게 된 거야!”

이연은 섣불리 화살에 손을 대지 못하고 안절부절 손을 떨었다. 비명은 통곡이 되어 계곡에 울려 퍼졌다.


운여가 다가왔다. 도조의 몸을 뚫었던 화살은 서서히 흙으로 스며들었다.

“이건 아까 그 화살?”

그는 화살비가 쏟아지던 유리산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것은 산이 아니었다. 분명 단단하고 번쩍거리던 하얀 유리산 꼭대기가 천천히 꾸물거렸다. 화산이 폭발하려고 꿈틀거리듯이.


“형님! 어떻게 해요? 까망이가 죽었나 봐요. 어흐흑.”

이연의 울음에 또 다른 고함이 끼어들었다.


“뭐야! 까망이가 죽었어?”

백호족 온설지가 뛰어왔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온설지가 아니라 멀쩡한 몸으로 성큼성큼 뛰어왔다.

그의 뒤를 도사 틔움이 사뿐사뿐 나는 듯 걸어왔다.


“이런. 내가 늦었구나. 온설지를 치료하느라 머물렀더니.”

틔움은 나긋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도사님, 까망이 좀 살려주세요. 네?”

도조 옆에 꿇어앉아 울던 이연이 틔움을 알아보았다. 무릎으로 걸어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까망이 죽으면 안 돼요. 이제 겨우 진짜 신조가 되었다고요.”

이연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틔움은 손등으로 도조의 몸을 쓸었다. 아직 숨이 남아있었다.

“어떻게든 해보마. 이런 증상에 맞는 비법을 알고 있단다. 하지만, 깨어나려면 한참 걸릴 거야.”


그녀는 두 손으로 도조의 작은 몸을 받쳐 들었다. 손수건으로 상처를 가볍게 눌렀다.

‘목숨까지 바치다니. 도조, 진짜 신조가 되었구나.’


틔움이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손바닥에서 빛이 스며 나왔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흐르던 피가 멈추었다.


“도사님, 그럼 까망이는 살 수 있는 거죠?”

“그래. 걱정하지 마라.”

틔움이 인자한 미소를 짓자 이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까망이를 도사님께 맡길게요. 저희는 마난 사람을 구해야 해요.”

“꼬마, 무슨 일인데? 왜 그렇게 급해?”

온설지가 동동거리는 이연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연이 손으로 유리산을 가리켰다. 출렁거리던 유리산 꼭대기가 서서히 주저앉고 있었다.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온설지는 어, 어 말을 잊지 못했다. 그 역시 호설의 눈을 가졌기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저 안이 모두 물이예요. 저게 터지면 이 주변이 모두 물에 잠긴다고요.”

“가만, 그럼 마난 말고도 반대편 성읍에도 알려야지.”

“그러네요. 그런데 지금 사람이···.”


운여가 수행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먼저 마차를 향해 뛰어갔다.

“마차로 가면 마난에는 충분히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주성까지 가기에는···.”


온설지가 휙 뛰어오르며 몸을 쭉 뻗었다. 다음 순간 거대한 흰 호랑이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꼬마! 넌 나와 가자. 단번에 대주성까지 간다.”

이연은 숨 쉴 틈 없이 호랑이 등으로 뛰어올랐다.



틔움이 이연의 손을 잡았다.

“비익정으로 오거라. 기다릴게.”

“거기도 물에 잠길 거예요. 도사님도 피하세요.”


틔움이 웃으며 이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연의 눈동자는 빠르게 빛깔이 바뀌다가 원래의 눈으로 돌아왔다.

“알았어요. 도사님, 그래도 조심하세요.”


호랑이 온설지는 성큼 뛰어오르더니 바람처럼 협곡 너머로 사라졌다.


운여도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불안한 마음에 유리산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에게도 산꼭대기가 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빨리, 빨리. 이러다 다 물에 잠기겠어!”


마음은 뛰었으나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운여는 부글거리는 화를 참으며 자신의 다리를 두드렸다.


*


모두 떠나고 혼자 남자 틔움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호설과 같은 기운. 자네도 미사랑을 기다렸던가.’


천선계에서는 보이지 않던 유리산이었다.

‘여태껏 인간세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니···. 자네의 눈물로 저 유리산을 채웠군.’


그녀는 피투성이 까마귀를 쓰다듬었다. 손바닥 위 까마귀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며 비익정으로 옮겨갔다.


도조는 비익정 아랑누의 침대에 눕혀졌다.

상처는 가장 안쪽부터 서서히 아물고 있었다. 선계라면 치유의 샘에 들어갔다 나오면 되겠지만, 인간세에서 지내니 아무리 선력을 쓴다 해도 열흘은 걸릴 것이다.


도사 틔움은 도조를 보내고 유리산을 올려다보았다.

“아랑누가 저기 들어갔을 텐데···.”


거대한 물주머니처럼 휘청거리는 유리산을 바라보았다. 틔움의 눈이 작은 점에서 멈췄다.


떨어지는 커다란 물방울 속에 아랑누가 있었다.

정신을 잃고 지팡이도 잡지 않았다. 흰 지팡이가 스스로 그녀 옆을 지켰다.


대분성 전투의 마지막과 똑같았다. 미타지산에서 조각이 되어 떨어지던 미사랑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틔움의 모습을 한 여라함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땅으로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빨라졌다.

틔움은 손을 뻗어 물방울을 멈추었다. 방울이 터지며 그 안의 물이 쏟아졌다. 아랑누가 떨어져나왔다.


틔움은 한 번의 발돋움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닿기 전 너울처럼 바람을 타고 땅에 내려앉았다.


아랑누는 죽은 듯 숨도 쉬지 않았다.

틔움은 그녀를 안고 아지랑이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기다렸다는 듯 유리산이 녹아내렸다.

시냇물처럼 떨어지던 물의 흐름이 점점 빨라졌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되었다가 점차 거대한 폭포가 되었다.


콸콸 흘러내린 물은 깊은 협곡 마른 바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갇혔던 물은 메마른 땅을 적시며 여울이 되었다. 소용돌이치며 바위를 집어삼켰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협곡은 잠깐 사이 강이 되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꿈틀거리며 가파른 협곡을 덮치더니 땅 위로 솟구쳐 올랐다.


마난 협곡은 폭풍우보다 큰 소리로 채워졌다.


*


비익정에는 아랑누와 도사 틔움, 까마귀 도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인도, 일꾼도, 남아있던 손님도 모두 떠났다.


아랑누를 치료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유리산 근처가 모두 물에 잠겨도 틔움이 있는 한 비익정은 작은 섬으로 남을 것이다.


아랑누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숨소리도 아주 작고 느렸다.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영력을 너무 소진한 것 이에는 이렇다 할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깨지 않는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 의식을 닫았구나. 몸도 따라서 닫혔어. 방법이 없어. 기다리는 것 외에는.”

틔움은 언제 일어날지 모를 아랑누의 손을 잡았다.


‘미음이라도 만들어볼까.’

아랑누가 스스로 깨지 않는다면 구태여 선력을 쓸 이유도 없었다.


도사 틔움은 주방으로 들어가 쌀을 씻고 물을 끓이며 달그락거렸다.

아랑누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 일 층을 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입구에서 계산대로, 응접실에서 복도까지 이어졌다. 문을 열며 기웃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틔움은 코웃음을 뱉으며 소리의 주인이 식당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학자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여인의 뒷모습에 대고 공손히 말을 붙였다.

“말씀 좀 물읍시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나요?”


틔움이 천천히 돌아섰다.

우람한 체격의 학자를 보고는 눈썹을 실룩거렸다. 그녀의 눈가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랑누라는 사람을 찾아왔는데, 혹시 여기 묵고 있나요?”

“율, 드디어 열쇠에 관심이 생겼어?”

“···.”


학자는 마주 선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인간세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누구지?’


틔움은 허리에 손을 얹고 싱글거리며 학자를 마주보았다.


‘눈빛이 익숙한데? 이 기운은···. 결계? 결계잖아? 영진성의···?’

율명은 찌리릿 몸이 굳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와 똑바로 설 수 없었다.

“하하하. 너, 너···.”


배를 움켜쥐고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여하, 여태 이런 모습으로 다닌 거야?”


그는 눈물을 찔끔거리다가 결국 주저앉아 바닥을 쳤다.

“너 언제부터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했어?”

“재미라기보다는···, 절실하다고 해줘.”

“그렇게 말하기에는 어딘지 좀···.”


다시 웃음이 터졌다.

국자를 흔들며 서 있는 여인을 보자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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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공간을 열다 22.08.06 61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3 0 10쪽
»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49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7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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