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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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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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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1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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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로잔_위혼제

DUMMY

하늘에는 거뭇한 구름이 빼곡히 들어찼다. 비를 품지 않았어도 공기는 습하고 바람은 스산했다.


도리울이 올려다 보이는 너르목 광장에 네 명의 악사와 용병, 아만상단의 수비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리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전투를 치르기 적당한 날씨네.”

해무찬이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전투에 적당하지 않은 날이 어디 있어?”

사로잔이 기운찬 웃음과 함께 그의 등짝을 두드렸다.


“그것도 그래. 비가 오면 땀과 피를 씻어주지.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면 열기를 식혀주니 냉정한 판단이 가능하단 말이야. 햇볕이 강하면 적의 움직임을 알기 쉽고. 그림자가 짙으면 매복하기 적당하고.”


“오, 소태장군. 아직 죽지 않았네.”

“오늘 확실하게 결판내자고!”

사로잔과 해무찬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자 아순치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젊은이들, 길을 막고 뭐 하는 거요? 다루가 서운해 하겠···. 어, 다루 어디 갔지?”

아순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광장 반대편에서 다루영이 종종거리며 뛰어왔다. 손에는 두건을 들고 있었다.


“뭐야? 언제 사라졌던 거야?”

해무찬이 입을 실룩거리자 다루영이 두건을 하나씩 나누었다.


“신녀가 최면 가루를 쓸 거야. 몸에 닿지 않도록 잘 쓰고 있어.”

“이걸로 사람을 조종하나?”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아름사원에서 행사나 제사를 하면 연노란 꽃가루가 흩뿌린대. 그것을 은혜의 가루라고 하는데, 근심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는 거야.”


“그런 가루라면 비싸게 팔리겠는데?”

아순치가 눈을 빛내자 사로잔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요귀를 상대할 분이 할 말은 아니오만?”


길게 늘어진 두건으로 머리와 목덜미까지 감싼 여섯 전사는 사람들 틈에 끼어 도리울로 올라갔다.


다루영은 신녀의 마차가 들어설 입구에 멈추었고, 다른 사람들은 제단 가까운 곳까지 나아갔다.


성주원의 병사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칼과 창을 들고 도리울을 에워쌌다.


주민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도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자신들이 무엇을 찾는지는 몰랐다.

부성주 차믜가 지시한 명령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 즉시 처리하라’ 한마디뿐이었다.


차믜와 의정관 사병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제사를 시작하려면 더 기다려야 하지만, 도리울에서 너르목 광장까지 이미 많은 사람이 들어찼다.


사로잔은 눈을 빛내며 백사귀파를 살펴보았다.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떤 무기를 들었는지, 그들이 어디에 자리 잡는지 눈여겨 보았다.

백사귀파를 맡은 나루뫼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짜 성주를 맡은 해무찬은 인파 속에서 특이한 움직임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시체가 발견된 이상 담덕의 모습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니 더욱 긴장했다.


아순치와 누리예는 신녀 고사나를 지켜보았다.

고사나는 화려한 천을 두르고 제단 앞에 앉아 북쪽의 사맟해를 바라보았다. 붉은색과 황금색이 섞인 천은 어두운 하늘과 대비되어 더욱 화려하게 보였다.


신녀는 웅성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를 향해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사람들은 제단에 가까이 가지 못하기에 경계목 바깥쪽에서 고사나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고사나가 검은 반지를 쓰다듬자 하늘에서 연노란 가루가 흩날렸다.

고운 가루는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자마자 녹아내렸다. 사람들은 환희에 가득 차 중얼거렸다.

“신녀님이 사널리를 구해주실 거야.”

“오늘은 타랑대귀도 안 보이잖아? 벌써 겁먹고 도망간 거라고.”

“이제 가뭄도 홍수도 없을 거야. 사널리에 신녀님이 계시는 한.”


중얼대는 소리를 들으며 사로잔은 한숨을 내쉬었다.


*


도리울 언덕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마차가 한 대 들어섰다.

황금빛 천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마차는 신녀의 신호를 기다리며 길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 안에 위혼제 제물이 있는 걸 알고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모았다.

“부디 우리 가족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계속 풍년이 들어 부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도리울로 올라가는 사람 중에 마차를 보며 기도하지 않는 이가 거의 없었다. 너나없이 자신의 복을 빌며 지나갔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다루영은 화를 참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이를 제물로 내몰면서 저런 소원이나 빌다니!’


마차를 지키는 일곱 명은 모두 망석이었다.

보통 사람은 상대할 수 없는 힘을 가졌기에 파수꾼으로는 제격이지만, 다루영에게는 그런 힘 따위 통하지 않았다.


‘제사가 시작되면 사람들의 시선이 제단으로 쏠리겠지.’

아무도 모르게 망석을 처리하고 마차를 끌고 샛골 소사매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다루영의 계획이었다.


휘장 너머 비치는 형상을 살폈다. 로와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루영은 마차와 망석에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마차 안에서 로와는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사로 이모도 약속했어. 서늬 아줌마도 약속했어. 우리를 구하러 올 거라고.”

“진짜로 오는 거 맞지?”

“응. 꼭 올 거야.”

다른 두 아이도 로와를 따라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


신녀 고사나가 군중을 향해 돌아섰다.

하얀 돌조각 같은 얼굴에 붉게 칠한 입술이 도드라져 보였다. 눈동자는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멀리서도 눈동자의 빛깔이 보이니 이상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신녀의 신통한 힘이라 믿으며 절을 올렸다.


고사나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서는 의정관 사병대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부성주 차믜도 육중한 몸집으로 사람들 사이로 틈을 만들며 제단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의 뒤에 사병대장 부럼이 버티고 섰다.


‘흥. 너희들이 아무리 용을 써봐야 날 당할 수 있을까? 조금 귀찮은 것뿐이야.’

고사나는 차믜와 부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팔을 올려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시여, 바다시여. 오늘 이 자리에서 신성한 제물을 바치니 사널리에게 복을 내려주십시오.”

고사나는 마차를 지키는 망석을 부르기 위해 주문을 외웠다.


“내가 빚고 만든 심부름꾼들아, 오늘의 제물을 여기로···.”

그녀의 주문은 완성되지 못했다.


하늘에서 흰 구름 덩어리가 날아와 제단 위에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람들이 소리도 못 내는데 구름이 서서히 펼쳐졌다. 그 속에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성주님!”

“보허 성주님!”

사람들이 일제히 절을 하며 엎드렸다. 엎드린 그대로 머리를 조아리며 웅얼거렸다.


“사널리를 기억하시고, 다시 찾아주셨군요.”

사람들이 감격하며 눈물을 훔쳤다.


사로잔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엉거주춤 허리를 낮추고 옆 사람에게 눈짓했다.

“저분이 누구라고요?”


“이전 성주님이세요. 이십 년 넘게 사널리를 지켜주셨죠. 돌아가실 때 사널리를 위해 다시 오겠다고 하셨답니다. 약속대로 오시다니. 아, 성주님!”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을 내버려 두고 사로잔이 몸을 일으켰다.


‘최면 가루가 너무 센데. 죽은 사람이 다시 왔다고 믿을 정도이니.’

사로잔은 보허라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정수리는 흰 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목덜미는 흰 깃에 가려졌다. 눈동자도 백사귀파의 것은 아니었다.


제단 위의 신녀 고사나는 입을 실룩이며 뒤로 물러났다.

‘야우밀, 애가 닳았군. 크크. 하지만, 어림없지.’


이 소란을 잘 이용하면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해질 것이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볼까?’

그녀는 진짜 성주를 대하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보허 성주는 주민들을 축복하듯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때 사로잔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의 손등에서 팔로 이어진 가느다란 선이 보였다. 목덜미에 튼 살처럼 보이는 자국이 팔에서 이어졌다.


사로잔은 엎드린 사람들 사이로 달려 나갔다. 경계목을 디딤돌 삼아 뛰어올라 단숨에 제단 위로 올라섰다.

“급하게 변신하느라 껍데기가 허술하군!”


해무찬도 그녀와 같은 것을 보았다. 그가 제단 위에 올라섰을 때 이미 손에는 장검 주공이 쥐어있었다.


사로잔이 노인에게 장검 모얀을 겨누자 사람들이 고함쳤다.

“이놈들! 그분은 보허 성주님이시다!”

“천벌을 받을 놈들아! 어서 물러나라!”


사람들의 고함은 금방 끝났다.

모얀으로 노인의 살갗을 가르자 껍질이 벗겨지듯 가죽이 떨어져 내렸다. 그 자리에 담덕의 모습이 드러났다.


“요귀다! 저자는 요귀야!”

제단 아래 서 있던 대장 부럼이 칼을 빼 들고 뛰어올랐다.

“네 이놈! 용서하지 않겠다.”


사로잔과 해무찬, 대장 부럼이 야우밀을 에워쌌다. 야우밀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새된 소리로 웃었다.

“너희가 날 상대하려고? 용기가 가상하구나.”


사로잔은 모얀으로 야우밀을 내리쳤다. 야우밀의 몸이 사라졌다가 세 걸음 뒤에서 나타났다.

“네가 사로잔이군. 널 죽이면 반파홍귀님의 능력은 내 것이다.”


야우밀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담덕의 모습마저 벗겨지고 거대한 오소리로 바뀌었다. 몸에 붙은 가시나무 넝쿨을 휘두르자 제단 위에 가시가 날아와 박혔다.


이것을 신호로 주민들 틈에 끼어있던 이 백이 넘는 백사귀파들이 칼을 빼 들었다.

앞을 막은 사람들을 단칼로 베어버리며 제단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의 칼은 이내 피투성이가 되었다.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루뫼도 폭주하는 백사귀파들을 상대로 검을 휘둘렀다. 성주원 병사들은 사람들을 대피시켰고, 사병대원들은 백사귀파를 막아섰다.


칼에 찔리고 피를 흘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백사귀들이었다. 쓰러질 듯 하다가도 다시 일어섰다. 사병대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로지 나루뫼의 검만이 그들을 상대할 수 있으므로, 그는 땅에 내려설 틈도 없이 밀려오는 백사귀들의 검을 받아쳤다.

가짜 성주와 신녀 고사나를 처리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신녀 고사나는 조용히 제단 아래로 내려섰다.

때를 기다리던 아순치와 누리예가 그녀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고사나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희가 할 수 있을까?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


고사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 주위로 사널리성 주민들이 성큼성큼 모여들었다.


*


도리울 제단에서 보허 성주를 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다루영은 모든 시선이 제단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했다.


보허 성주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이들이 먼저였다.


망석을 상대하는 데는 세 개의 표창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자마자 다루영은 마차의 휘장을 걷어냈다.


로와가 놀라 움찔거렸다.

누구인지 확인하자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껏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언니! 언니!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이제 괜찮아. 할머니 집으로 데려다줄게.”


다루영은 몸을 떠는 로와를 힘껏 끌어안았다. 쌍둥이 남자아이들도 차례로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로 출발할 거야. 조금만 힘내.”


다루영은 말고삐를 붙잡았다.

“꽉 붙잡고 있어. 전속력으로 달릴 테니까.”


바람을 가르며 달리자 마차를 장식한 황금색 천이 떨어져 내렸다. 황금색 천은 길가를 구르다 흙더미에 처박혔다.


너르목 광장을 지나 쉬지 않고 달리던 다루영은 솟을산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속도를 늦추었다.


허리띠가 묵직하고 따뜻해졌다. 전령석 나망이 다른 돌멩이와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다루영은 한 손으로 나망을 토닥였다.

“나망이 돌아왔다면···, 그가 곧 오겠구나.”


말고삐를 잡아당기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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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5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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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 사로잔_위혼제 22.08.01 73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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