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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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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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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3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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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랑누_갈림길

DUMMY

주홍빛 길잡이 구름은 북쪽 하늘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저 길잡이 구름은 유리산 위에 떠 있으리라.


길잡이가 없어도 목적지를 알지만, 의리를 지키는 친구 같아 아랑누는 손바닥 모양의 구름이 반가웠다.


그녀는 여각 마당에 나와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들판을 지나온 저녁 바람이 시원하고 맑았다.


가만히 마음을 가다듬으면 지팡이 안에 스며든 미사랑의 검이 느껴졌다. 어떻게 검이 반으로 갈라졌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꿈이 미사랑의 마지막이라면, 검도 그때 나뉘었을 거야. 싸움에서 지면서 그녀가 쓰던 무기와 성물도 함께 천계에서 쫓겨났겠지.’

아랑누는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깨달은 사실이 진실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미사랑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쪼개진 암흑성의 혼은 부활하고 싶어서 나와 사로잔으로 태어났어. 새로운 암흑성이 나타났기에 천계로 돌아가지는 못해도 너른벌에서 요귀를 물리치고 사람을 도우려는 거야.’

아랑누는 지팡이를 세워 잡고 땅을 짚었다.


‘하늘의 성물도 자신들의 주인을 찾았어. 갈피도 찾았고, 암귀모를 봉인했으니 남은 정귀 하나만 봉인하면 돼.’


하늘은 밤의 어둠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흰 지팡이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품 안의 갈피는 잠든 듯 고요했다. 암귀모를 봉인했지만, 갈피는 처음과 똑같았다.

남은 공간에 반파홍귀를 봉인하면 길고 긴 여행이 끝날 것이다.


아랑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별빛이 또렷이 느껴졌다. 영안으로 보는 밤 풍경은 낮보다 고즈넉하고 얌전했다.


‘사로잔은 뭐 하고 있을까?’

건강하고 활기찬 사로잔을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거북고래섬에서 처음 사로잔을 본 이후, 반쪽짜리 검은 여러 번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로잔은 눈으로 세상을 보았으며, 산짐승처럼 거침없이 들판을 누볐다. 아랑누가 태어나 한 번도 갖지 못한 건강한 몸이었다.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내일은 사로를 불러볼까?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처음 만났을 때는 아랑누를 거부했지만, 언젠가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지. 초조할 필요 없어. 길잡이 구름이 떠 있는 건 내가 할 일이 남았다는 뜻이니까.’

아랑누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


아침 일찍 여각을 나섰으나, 얼마 걷지 않아 다리에 힘이 빠지고 몸이 오소소 떨렸다.

아랑누는 공터의 나무 그늘에 앉아 숨을 돌렸다.


이연이 얼굴을 실룩이며 아랑누 앞에 섰다.

“누님, 자꾸 공간을 열면 안 돼요. 그러다 영력이 다 사라진다고요!”

“알았어. 연아. 앞으로는 사로가 부를 때만 응답할게.”


아랑누는 머리가 무거워 나무 기둥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눈꺼풀을 닫고 햇살에 숨을 맡겼다.


사람의 몸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너른벌 최고의 귀령송환사여도, 영력이 뛰어나 영안으로 세상을 본다 해도 사람이 담을 수 있는 영력은 크지 않았다.


지금껏 정령원로 마로니와 인어족장 에레혼에게 받은 기운으로 버텼다. 아랑누를 찾아온 성물도 도움을 주었지만, 너나족 사람이라는 제한은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래서 스승님이 사람의 몸을 버리고 수행하는 방법을 찾으셨구나.’

아랑누는 아침햇살을 듬뿍 받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한계를 아는 것이 나쁘지는 않아. 내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그 안에서 얼마나 잘 해낼지 가늠할 수 있지.’

애써 기운을 끌어 모으며 내면의 힘에 집중했다.


아랑누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조는 온설지의 짐을 뒤적이며 간식을 찾았다.


“눈사람! 과자 없냐? 과자?”

“없어. 까망아. 아누가 명상하는데 부스럭대지 마라.”

온설지가 점잖게 타일렀다.


도조는 이연에게로 옮겨갔다.

날개 달린 사람으로 완전하게 변신할 수 있는데도, 까마귀의 모습이 익숙한지 여간해서는 변신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수시로 머리를 사람으로 바꾸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고, 투정 부리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여기는 작은 읍이라 구경할 것도 없다. 지금 우리 큰 도시로 가는 거지?”

“아니. 유리산으로 간다는데?”

“엥? 유리산? 거긴 아무것도 없어. 쩍쩍 말라 비튼 계곡이 하얀 산을 둘러싸고 있는데, 물도 없고, 나무도 없어. 다 말라 죽었어.”


“아누가 간다면 가는 거지.”

온설지는 담장에 기대앉아 공터를 지나가는 마차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헹? 길잡이 구름이 가리키는 거 맞아? 사로인지 세로인지 사람이 부르는 거 아니고?”

도조의 물음에 쪼그려 앉은 이연도 고개를 들었다.


“그 사로잔은 어떤 사람일까요? 누님 말로는 용각국의 무사라서 엄청 튼튼하고, 싸움도 잘한다는데요.”

“허, 모르는 사람한테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아?”

“그 사람도 미사랑님의 한 조각이니까요. 누님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이연은 어깨를 들썩였다.


온설지 역시 사로잔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녀와 함께 다니는 거대상단의 소단주가 궁금했다.

‘아치, 넌 어떤 성물을 찾았을까?’


아랑누가 환영을 통해 네 명의 악사를 보고 그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온설지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들의 활약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했다.


‘곧 만날 수 있어. 아치. 밤새 술도 마실 수 있다고.’

그리운 친구를 만날 것 같은 예감에 껄껄 웃음이 흘러나왔다.


*


장중읍은 규모가 작은 간역이지만, 교통의 중심지여서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북동쪽으로는 유리산이 있는 마난으로 이어지고, 북서쪽으로는 하월로 이어졌다.


하월은 불라국 수도인 솔담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이므로 불라국에서 일을 도모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장중읍과 하월을 거쳐 갔다.


아랑누가 목적지로 삼은 마난은 아직도 까마득했다.

찻집 주인이 알려준 대로라면 장중읍에서 하월까지 가는 거리의 네 배 정도는 멀었다.


“느긋하게 가자고. 아누도 많이 지쳤고, 보리도 힘들어하니까.”

“보리를 수레에 싣고 다니면 좋겠어요. 저기 봐요. 상단 사람들은 나귀를 수레에 싣고 번갈아 걷게 하잖아요?”

“그거야, 나귀가 많은 부자 얘기고.”


아랑누 일행은 거리의 찻집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교통의 요충지답게 저잣거리는 사람과 말과 마차로 와글거렸다.


아랑누도 약차를 마시며 생기 가득한 기운에 흠뻑 빠져들었다.

고즈넉한 산길도 편안하고 좋지만, 가끔은 북적거리는 시장에 서야 힘찬 기운을 받았다. 번잡함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번잡함에 물들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온설지가 벌떡 일어섰다.

“아누, 기다려봐. 저기서 보양액을 파네. 아누한테 도움이 될 거야.”


“눈사람! 시장 구경이냐? 그럼 이 몸이 빠질 수 없지.”

도조도 부리나케 그를 따라 날아올랐다.


“아휴, 형님이나 까망이나. 시간이 지나도 철이 안 드네요. 쯧쯧.”

“아하하, 연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재미있다.”

아랑누가 배를 잡고 웃는데 나그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빈자리인가요? 사람이 많아서 앉을 자리가 없네요.”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아랑누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곧바로 온설지가 앉았던 의자를 가리켰다.


두 사람 모두 남자로 꾸몄지만, 한 명은 틀림없이 여자였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건장하고 다정한 남자라.

아랑누는 즐거운 마음으로 두 사람에게 영안을 집중했다.


“편히 앉으세요. 저희는 유리산을 찾아 마난으로 가는 길입니다. 두 분은 어디로 가시나요?”

“저희는 하월에 갑니다. 며칠 뒤에 참나로 의식이 열리거든요.”

젊은 남자가 대답했다.


“참나로 의식요? 여기 와서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유명한가요?”

이연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럼요. 불라국에서 제일 유명하죠. 올해 스물이 되는 사람들을 위한 축제예요. 하월성 전체가 축제장이 돼요.”

남자가 말하자 여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라국 사람들은 스무 살을 하월에서 맞는 것이 꿈이에요.”

여자가 빙긋이 웃자 남자도 마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아랑누에게는 하월이고, 참나로 의식이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기운이 맑고 애틋해서 영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순수한 소망을 안고 하월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선한 기운이 보기 좋았다. 두려움을 떨쳐내는 용감함에 감동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들처럼 하월로 향하고 있을까.


차가 나오자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차를 권했다. 여자도 다식을 그에게 내밀었다.

아랑누와 이연이 물끄러미 바라보니 시선을 느끼고는 헛기침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 유리산에 가신다고요? 비밀의 책을 찾으러 가시나요?”

남자가 잔을 내려놓으며 아랑누의 눈가리개를 흘끗거렸다.


“거기 비밀의 책이 있나요?”

“예. 그런 전설이 있어요. 비와 바람을 부리는 방법이 쓰여 있고,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서도 있대요.”


남자 옷을 입은 여인이 빈 잔에 찻물을 채웠다.

“나도 들었어요. 비와 바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피와 살인을 부른다고요. 보물 사냥꾼들이 엄청 많대요. 절대로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젊은 남자가 걱정스레 아랑누를 바라보았다.

눈가리개를 하고, 여리여리한 몸으로 유리산까지 가겠다니. 유리산에 닿기도 전에 사냥꾼들에게 목숨을 잃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하월로 가시죠. 참나로 의식이 스무 살을 위한 축제이기는 해도, 스무 살만 모이는 건 아니거든요. 볼거리도 많고, 먹을거리도 많고, 진귀한 물건도 많이 나와요.”


“참나로 의식···. 저도 보고 싶네요.”

아랑누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


“뭐? 하월에 갔다가 가자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온설지가 짐을 내려놓으며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보양액만 사려고 갔지만, 물건을 보다 보니 순식간에 짐이 늘어났다.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의식이라면 길 잃은 망령도 많을 거야. 도조, 혹시 비밀의 책 알아? 유리산에 있다는데?”

“비밀의 책요?”


도조는 저잣거리에서 얻어온 과자를 삼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데요.”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고는 과자로 눈을 돌렸다.


“누님, 제 안의 넋이 해준 말이 있어요. 부녹이 쓴 책이 있기는 한데요. 참, 저한테는 대모님이시죠. 그분이 의서를 많이 썼고, 무아도 선도를 닦는 책을 썼대요. 하지만, 모두 고연재 지하에 모아놨다는데요?”


이연이 입술을 쫑긋거리며 목덜미를 긁었다.

“선도와 선법을 익히면 그 비슷한 능력이 생기는 거 아닐까요?”


“비와 바람? 그런 책이 있을 리가 없잖아? 분명 요귀가 만든 함정이야. 냄새가 난다.”

온설지가 물을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책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진짜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걸 갖겠다고 서로 죽인단 말이잖아? 이거야말로 요귀의 수법이지. 아누, 절대로 지나칠 수 없어.”


“비밀의 책이 있건 없건 유리산에는 꼭 가야 해. 일단은 하월에 들렀다가.”

“하월! 하월로 간다고요?”

도조가 펄쩍 뛰어올랐다.


“으흐흐, 축제 구경이다! 축제!”

도조가 탁자에서 이연의 어깨로 펄쩍 뛰었다.

“정말이죠? 거기 엄청나대요.”


이연은 흥분한 까마귀를 다독이면서 웃음을 흘렸다.

참나로 의식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꼭 가보고 싶었다.


기행록에 쓸 거리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유명한 축제를 직접 보고 싶었다. 갑자기 세상이 분홍빛으로 물들며 근사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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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인간세의 전사들 1 22.08.06 56 0 12쪽
207 공간을 열다 22.08.06 61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4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3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 아랑누_갈림길 22.08.03 58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2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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