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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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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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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2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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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잔_용신의 출현

DUMMY

해 뜰 무렵, 도리울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산제물을 기다렸다.


부성주 차믜도 미리 연락을 받고 병사들과 함께 통로를 지켰다.

어제의 싸움으로 성주원 병사들 대부분이 부상을 입었다. 이번에는 소단주 아순치의 부탁대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역할이었다.


아순치가 일부러 그녀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용신의 전설을 공식적으로 기록하기 위함이었지만, 거기까지는 알리지 않았다.


수평선에서 움직이던 타랑대귀가 사맟항 가까이 다가왔다.

동쪽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괴물, 타랑대귀에 이어 서쪽에 나타난 유령선은 도리울을 지켜보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거무스레한 괴물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겁에 질려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발을 구르며 손을 떨며 불안한 눈으로 타랑대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신녀 고사나도 제단 위에 서서 근엄한 얼굴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들이 나를 정귀로 만들어줄 것이다. 반파홍귀보다 위대하고 잔혹한 정귀가 되리라!’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으려니 입 주변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샛골에서 나온 마차가 도리울 아래 멈춰 섰다. 망석들이 주춤주춤 달려왔다.


말몰이꾼으로 변장한 사로잔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신성한 제물이니 함부로 손대면 안 됩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망석이 나무 인형처럼 삐그덕 다가왔다. 사로잔이 장검 모얀에 손을 얹었다.


그때 도리울에서 함성이 울렸다.

“타랑대귀가 사라졌다!”


바다를 건너오던 거무스레한 괴물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괴물이 부서진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크고 작은 물고기들로 흩어지고 있었다.

“저게 타랑대귀라고?”


사람들의 시선이 도리울로 쏠린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로잔은 망석들을 처리했다.

다루영은 사뿐히 마차에서 뛰어내려 미리 약속한 절벽 아래로 달려갔다.

사로잔과 누리예도 나룻배를 준비해놓은 곳으로 내려갔다.


*


“타랑대귀는 신녀가 물고기들로 만들었소! 이제 타랑대귀는 없소!”

제단 앞에 선 사람들 틈에서 해무찬이 큰소리로 외쳤다.


“신녀 고사나는 가면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라!”

아순치가 외치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네 놈들이 기어코 자기 무덤을 파는구나.”

고사나가 검은 반지를 쓰다듬었다. 두 손으로 반지의 힘을 끌어올리며 기로 뭉쳐진 공기의 공을 만들었다.


두 사람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혼미술을 쓰면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망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는 사이 아순치가 피리 혜윰을 꺼내 들었다.


피리 소리가 울리자 고사나의 몸이 일그러졌다. 일부는 녹아내렸고, 일부는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요귀가 미친 듯 몸을 비틀자 제단 아래 서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조그맣던 붉은 입이 옆으로 길게 늘어나며 얼굴의 절반을 차지했다. 높고 날카로운 비명이 사람들의 귀를 찔렀다.


바다에 떠 있던 타랑대귀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크기만 다를 뿐 거무스레한 껍질에 뾰족한 이빨, 네 개의 발. 그대로 타랑대귀였다.

사람들은 벌벌 떨면서 뒤로 물러섰다.


고사나가 아순치의 피리를 뺏기 위해 달려들었다. 발톱을 세우고 덤벼드는 순간, 해무찬이 달려 나갔다.


“주공!”

그의 손에 잡힌 장검 주공이 빛을 가르자 고사나는 반으로 갈라지며 그대로 제단 위에 털썩 쓰러졌다.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신녀님이 요귀였다니.”

“그럼 우리는···, 사널리는 어찌 됩니까?”


사람들은 사널리를 지킬 존재가 없어졌다고 중얼거렸다. 불안한 웅성거림이 도리울을 메웠다.

넋이 반쯤 빠져나갔을 때 그들 앞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푸른 용이 나타났다.


사맟해의 바다색처럼 짙푸른 비늘이 아침 해를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부드럽게 천천히 날아오른 용이 제단 위 하늘에 떠올랐다.


“용신이다!”

“진짜 용신이야!”

도리울에 있던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부성주 차믜와 성주원의 병사들도 푸른 용을 보자 넙죽 엎드렸다.


사맟해의 전설 그대로 바다를 닮은 수호신이었다.


*


나룻배는 유유히 유령선을 향해 나아갔다.


사로잔은 노를 저으면서도 자신이 노를 젓는지 바다가 배를 옮기는지 의아했다. 손에 힘을 주지 않아도 노가 움직였고, 노를 잡고만 있어도 배는 흘러갔다.


유령선이라고 해서 찢어진 돛대와 으스스한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배가 아니었다.


멀리서 보면 배와 비슷한 모양이나 커다란 회색 덩어리였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곤약처럼 물컹거려 발을 올릴 수 없었다. 모얀을 꺼내 갈랐으나 이내 꾸물거리는 덩어리로 돌아왔다.


“자를 수도 없어요. 어떻게 올라가죠?”

“내게도 울음이 들려. 이것이 혼령의 집합체?”

누리예가 팔을 뻗어 덩어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이 쑥 들어갔지만 잡히는 것이 없었다. 거대한 덩어리는 나룻배 옆에서 떠나지 않고 쿨렁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아. 뭔가를 해달라는 건가?”

누리예는 찌르는 것은 그만두고 거대한 덩어리를 쓰다듬었다.


“유령선에서 날 기다리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사로잔이 모얀의 손잡이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건 우리 영역이 아니에요. 도와줄 사람을 알아요.”


사로잔은 나룻배에 앉아 모얀을 쓰다듬었다.

‘아랑누, 이번에는 빨리 들어줘. 부탁이야.’


공간이 열리고 건너편에 아랑누의 모습이 보였다. 수척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하얀 방 벽에 기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사로, 유령선에 도착했어?”


사로잔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덩어리는 기쁜지 더 심하게 쿨렁거렸다. 덩어리가 사로잔에게로 기울어지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휴, 이거 왜 이러냐. 아랑누, 여기로 와줘. 이 덩어리를 어떻게 좀 해봐.”


“지금은 공간을 이을 존재가 없어.”

“그럼 한울에게 도와달라고 할까?”


“안 돼. 그럼 그는 남은 영력까지 모두 잃을 거야. 영혼만 떠돌 거라고. 나와 함께 있는 천인 무아의 넋처럼.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겠지?”


사로잔이 대답할 말을 찾는데 아랑누가 다짐하듯 물었다.

“그와 함께 있고 싶다면 너도 그를 아껴야지.”

“그럼 어떻게 하지?”


공간 저편에서 아랑누가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몹시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

그녀가 부하나 동료였다면 사로잔은 다른 사람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아랑누가 아니면 할 수 없었다.


“네 몸을 빌릴게. 반쪽 검이 들어있는 장검을 절대 놓지 마.”

“알았어. 절대로 놓지 않을게.”

눈앞에 보이던 공간이 닫혔다.


누리예에게는 무슨 일인지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에게는 건너편의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장검 모얀을 꽉 잡고 일어섰다. 거대한 덩어리를 마주하고 섰다.

그녀의 몸으로 영력이 스며들었다.


서서히 조금씩 스며들던 영력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몸 안에 가득 찼다. 구석구석으로 알 수 없는 힘이 들어차서 모든 감각이 열 배 이상 밝아졌다.


몸은 공기보다 가벼웠고, 힘은 폭포처럼 거세졌다.


눈앞의 덩어리를 이룬 수많은 혼령이 보였다. 그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바닷물이, 나룻배가 된 나무가 속삭였다.

‘이게···, 이게 아랑누의 힘?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어?’


자신의 몸으로 들어온 아랑누가 느껴졌다.

‘너라서 그런 거야. 네 몸이 받쳐주니까 영력이 훨씬 커졌어, 난 태어날 때부터 허약해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영력에 한계가 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마음을 비우고 가만히 있어.’


아랑누가 사로잔의 몸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시작한다.’


*


사로잔의 몸으로 아랑누가 두 팔을 벌려 주문을 외웠다.

“수많은 세월을 떠돌았으니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길 잃은 영이여, 너를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라.”


속삭이듯 작은 소리였지만 거대한 혼 덩어리는 꽃가루가 터지듯 공중에서 작게 작게 나뉘었다. 스스로를 묶었던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와 모두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망령들은 사로잔의 주위를 맴돌았다. 저마다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아랑누는 끈기 있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지만, 사로잔은 언제까지 서 있어야 하는지 답답했다. 망령이 하는 말은 너나없이 똑같았다.


‘다 똑같은 얘기잖아? 아쉽다, 서운하다, 억울하다, 서럽다···.’

‘쉿!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해야지. 그것이 귀령송환사의 덕목이야.’

‘몸이 오그라들겠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귀령송환사는 망령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야. 잘 듣는다, 끝까지 듣는다.’


한 망령이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정귀가 사라져도 망석과 사음귀는 사라지지 않아요. 쇳디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은 기다리고 있어요. 자신을 놓아줄 손길을요.’


‘그래, 알았어. 우리가 꼭 그들을 돌려놓을게. 망석이 된 사람들과 쇳디는 천옥으로 보내주고, 사음귀는 사람으로 돌아가게 할게.’

‘고마워요. 아랑누님.’


그녀가 손을 움직이니 손끝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거대한 그물이 되어 망령을 감쌌다.


사로잔의 입에서 아랑누의 주문이 흘러나왔다.

“너의 생명이 시작된 곳, 새로운 시간이 기다리는 곳, 모든 한과 미련을 버리고 내 숨을 따라 빛의 흐름을 타고, 돌아가라!”


빛 그물은 눈부시게 빛났다. 그물에 담긴 망령들이 소리를 그치고 잠들었다. 점점 오그라들더니 물방울 모양이 되었다.


그녀의 몸집보다 작아진 그물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로잔이 손으로 그물을 밀어 올리니 빛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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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8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5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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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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