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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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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4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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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아랑누_소진된 영력

DUMMY

일 층 식당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복도까지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싸우던 사람이 상대의 주먹에 맞아 넘어지며 식탁에 부딪혔다. 식탁이 쓰러지며 그릇이 떨어져 깨지고 물 잔의 물도 쏟아졌다.

의자는 나뒹굴고, 이제는 식탁이라 할 수 없는 나무판자가 굴러다녔다.


주인의 신경질적인 외침이 식당을 울렸지만, 누구 하나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제도 싸움이 일어났다. 유독 비익정에서 싸움이 잦은 것이 이상했다.

목숨을 버릴 정도의 싸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무언가 다른 존재가 끼어든 징조였다.


그녀가 지팡이를 또각거리니 복도와 식당 입구에 선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싸우던 두 사람이 싸늘하고 묘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가, 장님 여자가 다가오자 피식 비웃었다.

사람들의 숙덕거림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아랑누가 소리 없이 바람을 불렀다.


넘어졌던 사람이 일어나 주먹에 힘을 실었다. 상대편 남자도 질세라 몸을 낮추고 상대의 허점을 찾았다.

서로 주먹을 앞으로 뻗는 순간, 그들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었다.


그녀의 손짓에 일어난 바람 한 줄기는 밧줄이 되어 싸우던 사람을 묶었고, 바닥의 나무판은 그들의 발에 단단히 달라붙었다.


그녀는 식당 구석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온전한 식탁과 의자가 남아있었다.

“밥 먹는 동안은 조용한 게 좋지요. 그렇게 잠시만 계세요.”


“여어, 아누. 제법인데? 젖은 옷을 말리던 아누가 아니야.”

온설지가 운여를 이끌고 그녀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몸이 굳은 두 사람을 비켜 가며 하인들이 식탁을 일으키고, 자리를 정리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에게 아랑누는 보물을 가로채려는 경쟁자였다.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 보물을 가로채려고?”


아랑누가 그들을 향해 똑바로 앉았다.

“이곳은 비명횡사한 혼이 많아요. 영천옥으로 가는 길에 동반자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누가 같이 가실래요?”


화장터 근처를 배회하던 망령이 다가왔다.

망령들은 아랑누의 말을 알아듣고 식당 불을 모두 꺼버렸다. 기괴한 울음도 들렸다.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스산하고 탁한 공기가 가득 차자 가슴이 죄어오며 답답했다.


아랑누가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손끝에서 빛이 뿜어 나왔다. 빛 그물을 타고 망령이 사라지고 나서야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렸다.


빛 그물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 천사와 비슷했다.


아랑누는 손끝을 움직여 다시 등불을 켰다.

보통 때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주술이지만, 더 이상의 싸움도, 피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귀령송환사임을 알려줬으니 적어도 그녀가 있는 동안은 다투지 않을 것이다.


“귀, 귀령송환사였어? 그럼, 우리는 먼저 실례···.”

저 정도 주술을 쓰는 귀령송환사라면 망령도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불이 꺼지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소리도 내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몸이 굳은 두 사람만 그 모습 그대로 식당에 남았다. 우우 소리를 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연이 약상자를 가져와 두 사람의 상처를 살폈다.

“그러니까요, 왜 누님 앞에서 싸우고 그러세요?”

찢어진 손등과 입술, 까맣게 멍이 든 눈두덩과 뺨에도 약을 발랐다.


“이제 싸우지 않는 거예요. 아셨죠?”

이연이 다짐하자 두 사람도 우우 소리를 냈다. 그제야 그들을 묶은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두 사람은 쏜살같이 식당에서 달려 나갔다. 동시에 나가려다 어깨를 부딪쳤지만, 이번에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운여는 하월에서 보았던 아랑누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매듭 상점 옆에서 처음 보았을 때도 망령을 보내고 있었다.

“귀령송환사가 유리산에는 왜 갑니까?”


“유리산이 불러서라고 해도 믿으시겠죠?”

아랑누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농담으로 받겠지만, 그녀가 말한다면 사실이리라.


운여는 어떤 예감에 설레었다. 무언가 가슴을 짓누르는 일이 해결될 것 같았다. 설렘이자 희망이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일이지만, 어쩌면···, 전혀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잖아?’


“형님, 식사하시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이연이 운여의 팔을 툭 쳤다.

“아, 그냥 이런저런 생각.”


“어? 연아, 너 언제부터 운여님을 형님이라 불렀어?”

아랑누는 부쩍 친해진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아까 낮부터요. 형님이 은근 재미있어요. 온형님과 운형님이죠. 헤헤.”


“그런데, 아누, 그렇게 영력을 써도 돼? 영안이 흐려지는 거 아냐?”

“이 정도는 괜찮아. 아무래도 좀 수상해서···.”


아랑누가 소리를 낮췄다.

“백사귀파가 있는 것 같아. 조심해.”


온설지와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운여는 멀뚱거리며 세 사람을 보았다.

‘백사귀파라니? 새로운 비밀조직인가?’

운여의 궁금증에 이연이 속삭이듯 설명했다. 왜 백사귀파를 조심해야 하는지.


한입 가득 밥을 떠먹던 아랑누가 갑자기 생각난 듯 운여에게 눈짓했다.

“아, 수호대에 있는 하늘의 성물, 갖고 싶다고 하셨죠? 어디서 받고 싶으세요?”


‘어디서? 아, 어떻게 연락하냐는 말이겠지?’

운여는 아랑누의 말뜻을 헤아리고 대답했다.


“솔담에 제 거처가 있습니다. 루월상단 본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지요.”

“방에서 받고 싶으시군요. 그럼, 눈 떠보니 나의 빛이 머리맡에 있네라는 시구가 좋겠네요.”

“예? 무슨···.”


아랑누는 설명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청혼하러 가는 날 아침이 좋겠어요. 사뭇 낭만적이지 않나요?”

“하하, 청혼이라니요?”


운여는 웃고 싶었으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어느새 그의 손이 홍요석과 매듭으로 엮은 목걸이에 가서 머물렀다.

‘볼수록 이상한 사람이야. 말이 안 되는데 기대하게 만드네.’


아랑누에게는 운여가 마음으로 하는 말이 들렸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 그러면서도 누구라도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


이른 아침, 아랑누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그 소리가 꿈인지 환청인지, 아니면 바깥에서 들리는 것인지 아련했다.


‘이제야 왔구나. 여태껏 기다렸다.’

깊은 슬픔이 배어있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지?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가만히 누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불렀지?’


아랑누는 그의 소리에 영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전 다른 소리가 끼어들었다.


‘제발, 제발, 아누, 빨리.’

사로잔의 목소리였다. 미사랑의 검 반쪽을 쥐고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곧이어 다른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리가 되겠소.’

‘미쳤습니까? 천계로 못 돌아갑니다. 내가 합니다.’

‘자네는 목숨을 내놔야 하지만, 난 여기 남는 것뿐이다. 내 마음이 이르는 곳에 남겠네.’


두 남자가 다투는 소리였다. 무슨 일을 하려고?

아랑누는 머리맡을 지키는 지팡이를 잡았다. 이번에는 공간이 열리지 않아도 사로잔이 보였다.


‘···를 소환하겠다.’

그가 말하자 눈앞에 황금빛 구멍이 하나 드러났다. 구멍은 점점 커져 문이 되었다.


아랑누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


높은 절벽 위의 들판이었다. 북쪽으로 망망대해가 펼쳐졌고, 제단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죽어가고 있었다.


아랑누는 허공에 떠 있었다. 영안을 둘러보니 제단 위에 나무귀신이 서 있었다.

‘반파홍귀!’


그녀는 재빨리 품속의 갈피를 확인했다. 한쪽은 빈 채로 봉인할 요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파홍귀는 거대한 몸을 떨며 소리쳤다. 분노가 들판을 뒤엎을 기세였다.

‘나를 만든 것도, 날 이끈 것도 사람이야! 왜 나를!’


아랑누는 늘 궁금했다.

왜 미사랑은 정귀를 소멸하지 않고 봉인시켰을까. 암흑성의 힘이라면 정귀를 깨끗이 없애고도 남았을 텐데.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사람을 위해 일할 기회를 주려고 했구나. 미사랑 다운 생각이야.’


아랑누는 그녀의 믿음을 배신한 정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로잔에게 공격하라고 소리치고 흰 지팡이를 높이 쳐들었다. 갈피에 주문을 걸 시간이 필요했다.


반파홍귀가 분신술을 사용하자 그녀는 승리를 확신했다.

한 번에 많은 전사를 상대하려고 몸을 나눴겠지만, 그만큼 귀력도 나뉠 테니까.


나무귀신과 맞서는 전사 중에서 천인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미 천력을 소모하여 천계의 기운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날 부르느라 천력을 써버렸구나.’


천인 무아가 생각났다. 몸을 잃고 천력도 잃고 소년 이연의 몸에 스며든 혼. 그가 누구이든 무아처럼 만들 수 없었다.

이미 사람의 일에 너무 깊이 관여했다. 무아처럼 몸까지 잃게 해서는 안 된다.


“한울이 날 소환했어? 이제 그는 너른벌의 무사와 다를 바 없어. 네가 지켜야 해.”

’알았어. 다시는 한울을 놓치지 않을 거야.‘


“힘이 나뉘었으니 지금이 기회야. 한꺼번에 공격해.”

전사들이 반파홍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랑누가 지팡이를 던졌다. 흰 지팡이는 살아있는 무기처럼 그녀를 위한 방패가 되었다.


“요귀여, 인간세에서의 생은 끝났다. 암흑성 미사랑의 이름으로 너를 여기 봉인한다!”

아랑누가 주문을 외우니 갈피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 역시 빛의 폭발에 밀려 공간 너머로 들어섰다.

하얀빛과 뜨거운 바람에 밀려 허공으로 퉁겨졌다. 지팡이와 갈피를 놓치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했다.


허공에 스며들어 무게도 못 느끼고 둥둥 떠다녔다. 끝없이 검은 공간이었다.

아득히 암흑성 미사랑이 떠 있었다. 꿈에서 본 그 모습이었다.


다른 모습의 미사랑도 있었다. 겉모습은 달라도 그녀였다.

불꽃이 지나가고 하얀 날개가 지나갔다. 아름다운 보석이 공간을 잔뜩 메웠다가 사라졌다. 검은 공간이 무지개색으로 가득 차더니 점점 색이 희미해졌다.


누군가 소리쳤다.

그 소리 때문에 공간이 흔들렸다. 몸도 마구 흔들리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누! 일어나 봐! 어디 갔다 온 거야?”

“온형,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소리는 그만 질러.”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 알아? 지금 몸이 완전 나뭇잎 같아.”


“누님, 이번에는 아예 공간을 넘었던 거예요? 영력이 바닥난다고요! 바닥!”

“연아, 너도 살살 말해. 세상이 다 흔들려.”

아랑누는 누워서도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온설지와 이연이 걱정할 만도 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누워서 간신히 숨만 쉬었다.


‘날 송환한 한울은 어떻게 될까. 역시 돌아갈 수 없겠지. 무아처럼···.’

그녀는 종종거리는 이연을 바라보았다.

‘아직 유령선이 남았는데. 그건 어떻게 하지···.’


“아니, 사로잔님은 왜 자꾸 누님을 부른대요? 그쪽도 미사랑의 혼 조각이라면서요?”

“반파홍귀를···, 봉인했어.”

아랑누의 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뭐시? 반파홍귀를?”

온설지가 놀라 요란스럽게 뛰어올랐다.

“드디어, 정귀 두 마리를 모두 해치웠구나.”


“엥? 그럼 우리 여행이 끝나는 거 아냐?”

그가 손뼉을 치다 말고 아랑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유리산이 남았어. 아무래도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아랑누가 누워서 숨을 고르는데 아래층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이번에는 싸움이 아니었다.


이연과 온설지가 부리나케 뛰어 내려갔다.


보물 사냥꾼 세 명이 눈과 입, 귀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그들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신음하며 뒹굴었다.


갑작스러운 발작에 사람들이 소리 질렀다.

“빨리 의원을 불러!”

“여기서 의원까지 꼬박 하루는 걸릴 텐데! 큰일이군. 큰일이야!”


다른 사람들은 원인을 모르지만 온설지와 이연은 깨달았다. 그들이 백사귀파라는 것을.


그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사람들은 서둘러 그들을 방으로 날랐다.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며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돌아보았다.

‘분명 역병이야. 당장 떠나야겠어.’

‘여기 더는 머물 수 없어. 유리산으로 바로 가야지.’


한시라도 빨리 비익정을 떠날 생각에 마음이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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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인간세의 전사들 2 22.08.07 43 0 11쪽
208 인간세의 전사들 1 22.08.06 54 0 12쪽
207 공간을 열다 22.08.06 59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2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4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5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3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1 0 11쪽
»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5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49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6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57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4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7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7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3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59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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