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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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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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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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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공간을 열다

DUMMY

여륭으로 직접 가는 배는 없었다.

아랑누는 사로잔과 마찬가지로 재가도를 목적지로 잡았다. 불라국과 소천국 사이의 작은 항구로 출발했다.

사로잔 일행은 이미 재가도로 가는 배에 올라탔으리라.


새봄이 무르익어 바람이 선선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아랑누는 유리산이 있던 동북쪽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산이 있다 해도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을 테지만, 거기 있는 듯 아련한 마음이었다.

‘시조새는 어디로 갔을까? 다시는 못 만나려나?’


“틔움 도사님은 같이 안 가신대요?”

이연이 못내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인사도 없이 휑 가버리시다니···.”


“약속을 지켜야 한 대. 오래전에 누군가와 약속했는데 결계로 너른벌을 지키기로 하셨대.”

“아이고, 그 쪼끄만 도사님이 너른벌을 지킨다고?”

온설지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나저나 여륭으로 직접 가는 방법이 없네···.”

“어떻게든 만나게 될 거야. 사로와 만나는 방법은 간단하니까.”

“좋아. 어쨌든 빨리 보고 싶네. 아치가 어떤지 궁금하지만, 사실 그쪽 일행 다들 흥미로워.”


까마귀 도조는 여전히 나귀 보리의 등에서 꾸벅꾸벅 졸며 흔들거렸다. 완벽하게 신조로 바뀌었어도 한결같은 자세였다.


이연과 온설지는 기행록에 쓸 이야기를 나누며 앞장서 걸었다.

“그러니까요. 좀 과장해서 써야 재미있잖아요?”

“그러네. 물이 그냥 주르륵 흘러내렸다고 하면 싱거워. 폭포처럼 쏟아지던 물이 때마침 불어온 폭풍 때문에 성난 괴물처럼 협곡을 덮쳤다고 써야지.”


“오, 형님 감각 있어요! 그럼, 차라리 유리산에서 검은 물이 흘렀다고 할까요? 아니다. 협곡이 마른 갈색이었으니까 시뻘건 흙탕물이 콸콸 쏟아졌다고 해야겠다.”

“그거 좋다! 그거로 해라.”

이연이 손뼉을 치며 깔깔거렸다. 곧바로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런 두 사람의 기운을 따라가며 아랑누는 비익정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분명 누구와 얘기한 것 같은데···. 꿈이었나?’


미사랑의 혼이 꿈에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누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잊었어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끝없이 어두운 공간이었다.

어둠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고 그 사이에서 전혀 본 적 없는 세계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곳에 빛나는 보석이 물방울처럼 박혀 있었다. 보석들 사이에서 무시궁과 반월도가 보였다. 개심수 가지와 하얀 날개가 지나갔다.

휘몰아치는 모래바람과 뜨거운 불길이 공간을 덮었다가 까맣게 돌아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암흑성 미사랑이 알려주었다.

‘차원의 정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모든 시간을 보지만,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과 달랐다. 천인이나 선인과도 달라서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래를 아는 것이 결코 좋은 건 아냐. 과거에 매달리는 것만큼 어리석어. 이미 흘러간 건 가버린 거고, 오늘을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꿈속에서 미사랑의 목소리도 들렸다.


차원의 정수에서 미사랑은 두 가지만은 확실히 보았다.

자신의 몸이 조각조각 나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의 자신. 거기서부터 그녀의 길고 긴 고민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번뇌를 끝내줘야지. 얼마 안 남았어. 미사랑, 네 혼을 완전하게 만들어줄게.’

아랑누는 지팡이를 또각거리며 부지런히 걸었다.


*


새봄의 바람은 부드럽지만 항해하기에는 너무 여렸다. 살랑이는 바람으로는 커다란 돛을 펼치기에도 모자랐다.

새로운 장치를 개발한 여객선이라 해도 바람이 약하니 느릿느릿 나아갔다.


“재가도에서 여륭으로 가는 배편이 있으려나?”

“정기적으로 다니는 건 없지만 고기잡이배는 다녀. 여륭은 사람이 살지 못해도 여륭 인근의 바다는 해산물의 보물창고거든.”

아순치가 사로잔의 걱정을 단번에 해결해 주었다.


“오, 군침이 도는데? 그 정도라고?”

해무찬이 침을 꿀꺽 삼켰다.


네 명의 악사는 갑판 위에 서서 바다를 보면서도 바닷물을 보지 않았다.

쫀득쫀득하고 달콤한 생선요리를 떠올렸다. 시원한 국물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오직 한울 만이 바다를 바다로 보고 있었다.


입맛을 다시던 해무찬이 고개를 세게 저으며 환상을 떨쳐냈다.

“암귀모도 반파홍귀도 사라졌는데, 용각섬은 왜 안 돌아오지?”

“벌써 돌아왔는데 우리가 여기 있어서 모르는 건가?”


그들 곁에서 묵묵히 바다를 보던 한울이 사로잔에게로 돌아섰다.

“지금은 염라성의 힘이 있으니 들어갈 수 없소. 염라성이 손을 떼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요. 제 위치를 찾아가기는 하겠지만, 예전 모습을 찾으려면 다른 게 필요하오.”

“다른 무엇?”


“사마와 반나.”

“아, 용각섬을 수호한다는!”

사로잔은 해무찬과 다루영을 번갈아 살폈다.


“찬, 뫄한 대장군께는 알렸어?”

“뭘?”

“둘이 혼인했다고. 용각섬의 사마와 반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해무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험! 사로!”


사로잔이 그의 주먹을 피해 비켜서니 아순치가 막아섰다.


“뭐? 둘이 혼인했다고? 언제? 나도 모르게?”

“찬의 장식술이 다루에게 가 있잖아? 언약의 증표거든.”

사로잔이 혀를 빼꼼 내밀었다.


아순치가 고개를 저었다.

“무효야. 인정할 수 없어. 거대상단에서 혼인 잔치를 맡지 않는 이상 이건 무효라고.”

그는 싱글거리며 해무찬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러니까, 아직 기회가 있어. 우리 상단에 맡기면 최저 가격에 최고 효과를 장담하지. 어때?”


사로잔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치는 정말 장사꾼이구나. 시조새는 아치의 진짜 모습을 모르고 구해줬을 거야.”


“아, 시조새가 사라졌다고 했지?”

다루영이 그들의 장난을 보며 웃다가 유리산을 생각하고 웃음을 멈추었다.


사로잔을 통해 다른 네 사람도 아랑누의 소식을 들었다.

유리산이 녹아내리며 협곡 사이 깊은 강을 이루었고, 시조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아순치는 실망하지 않고 허공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도 무효야. 난 시조새를 직접 만나 당당히 말할 거야. 전설을 완성했다고! 시조새를 꼭 찾아낼 거라고!”


사로잔이 찬과 다루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자자, 아치는 내버려 두고, 우리가 먼저 재가도에 도착할 테니 뭘 하며 기다릴지 얘기해보자.”


“난 연주하는 거 좋아. 한울님의 요고 연주가 우리와 잘 맞아.”

“나쁘지 않아. 재가도는 휴양지로 유명한 섬이니까 손님들도 여유가 있을 테고.”

해무찬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딱였다.


한울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바다 건너에 시선을 두었다.


남쪽 하늘은 하얗고 깨끗한 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갔다. 그저 있는 그 모습일 뿐 그에게 다른 것은 보여주지 않았다.

‘인간세는 여전히 감추는 것이 많구나.’


한울이 고개를 돌려 사로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해무찬과 다루영과 머리를 맞대고 재가도에서 무엇을 할지 속삭이며 키득거렸다.


사로잔을 지켜보는 그의 얼굴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흘러갔다.


*


동쪽 하늘에서 햇귀가 밝아오는 시간, 사로잔은 홀로 갑판에 앉아 장검 모얀을 쓰다듬었다.

재가도로 가는 배에 오르고 나서 매일 이 시간에 아랑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모르고 살았지만, 지금은 함께 싸워야 할 동지였다. 무엇보다 그녀와 이야기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사람이면서 자기 자신이었다. 엄청난 영력과 주술을 마음대로 부리는 데다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재가도까지는 보름이면 충분해. 일단 거기서 기다릴게.”

“나도 곧 배를 탈 수 있어. 이삼일 후면 항구에 도착할 거야.”


“아누, 우리의 적은 대체 누구일까? 뭘 어떻게 준비하지?”

“누군지는 몰라. 내가 아는 거라곤 차원을 넘어온 존재라는 것, 암흑성의 힘도 갖고 있다는 것 정도야.”

“상대가 누구든 싸워야 하면 싸워야지. 진정한 전사는 불가피한 싸움을 피하지 않아.”

사로잔이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순간, 아랑누가 몸을 뻣뻣이 세웠다. 공간 너머 그녀가 돌처럼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또 쓰러지는 것은 아니겠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그녀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아랑누는 곧 정신을 차리고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맞서야 할 존재가 우리를 부르고 있어.”


“재가도까지 아직 멀었는데?”

“거기까지 갈 이유가 없어졌어. 기다릴 필요 없어. 전사들도 모두 준비를 끝냈어.”


아랑누가 지팡이를 잡고 일어섰다.

그녀를 보호하는 성물이 손목과 허리에서 반짝 빛을 냈다.

“지금 바로 공간을 열거야. 모두 준비해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데리고 나올게.”


사로잔도 벌떡 일어났다.

영력과 주술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아랑누가 한다고 하면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그녀는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


아랑누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올라섰다. 항구까지 내려갈 시간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우리를 초대했으니 초대에 응해야지. 그럼···.’


문제는 상대가 있는 곳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공간을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공간을 열 것인가.

‘분명 내가 가진 것 중에 열쇠가 있을 거야.’

늘 그랬다. 해답은 그녀 자신이 이미 갖고 있었다. 알아보지 못했을 뿐.


신령석? 수호대? 하나석과 정령수 비녀? 개심수 가지?

차례대로 불러도 그것들은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설마 갈피?’

그녀가 갈피를 부르자 품 안의 갈피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게 열쇠였구나. 드디어 정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구나.’


아랑누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온설지와 이연도 마음을 가다듬었다.


‘보리는 못 들어갈 테니, 여기서 궤짝을 지키라고 해야지.’

이연은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봇짐만 짊어졌다.


도조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간신히 일어났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이연의 어깨 위에 앉았다.


갈피를 쥔 그녀의 기운은 더욱 강렬했고, 엷은 후광을 만들어냈다.

그녀를 지켜보며 두 사람은 숨을 들이마셨다. 까마귀도 침을 꿀꺽 삼켰다.


준비가 끝났다.


아랑누는 갈피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손을 움직여 공기 중의 기운을 하나로 끌어모았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일어난 빛의 기운이 갈피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귀가 봉인된 갈피가 천둥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진 갈피 조각을 확인할 틈도 없이 그들은 이미 다른 공간에 가 있었다.


*


아랑누는 회색빛 공간에 떠 있다.


너른벌에 있는 무엇도 없는 공간, 소리도, 냄새도, 온도도 낯선 곳이었다. 인간세도, 천선계도 아니며 귀사전과도 다른 곳이었다.

모든 것이 이어져 있으면서 떨어져 있는, 완전히 뒤섞인 혼돈의 상태였다.


차원의 처음과 끝이 함께 있는 곳, 시간도 공간도 구분이 없었다. 하늘의 성물이 없으면 길을 잃고 영원히 헤맬 것이다.


아랑누는 온설지와 이연이 함께 왔는지 주위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온설지와 이연이 아니었다.

그녀 곁에는 사로잔과 한울이 서 있었다.


사로잔은 갑자기 바뀐 공간에 어리둥절해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허허벌판을 둘러보는데, 한울은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움직이는 사물이 있는지 앞을 노려보았다.


사로잔도 휼과 모얀을 손에 들었다.

“여기가 전장이군. 지금부터 시작인가?”


“싸움은 오래전에 시작되었소. 사람이 하늘의 무기를 손에 쥔 순간부터. 그들도 몰랐겠지만.”

한울이 앞장섰다.


아랑누는 지팡이를 창처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선택받은 전사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갈 거야. 우린 우리의 상대만 똑바로 보면 돼.”


저기 어딘가 요귀들이 우글거릴 것이다.

회오리치고 부글거리는 대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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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인간세의 전사들 1 22.08.06 56 0 12쪽
» 공간을 열다 22.08.06 62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4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4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8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5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2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3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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