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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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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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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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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의 전사들 3

DUMMY

극단 가빈의 원형극장은 금협성을 내려다보며 아침을 맞았다.


어젯밤 마지막 공연에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공연이 없다고 공지한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지 늦잠을 자겠다고 벼르던 단원들이 일어나 수런거렸다. 그들의 말을 엿들은 아라치와 두나는 기다릴 것도 없이 단장실로 뛰어갔다.


“단장님! 극단이 문을 닫나요?”

“뭐? 왜 문을 닫아?”

“전 진짜 휴가인 줄 알았단 말이에요. 흐흑.”

두나가 훌쩍거렸다.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단원들이 모두 몰려왔다. 길가온과 사란야도 그들의 손에 이끌려 단장실 앞 복도에 섰다.


단원들이 소리쳤다.

“아니면 우리가 잘린 건가요?”

“한 달이나 공연을 쉰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어허···, 이 친구들 좀 보게.”

마우태가 헛기침을 하고 일어났다.


“극장에 비가 새는 거 모르나? 기둥도 손봐야 하고, 지붕도 고쳐야 하네. 이왕 공사 하는 김에 칠도 새로 할 거라고. 한 달 갖고도 빠듯한데, 무슨 헛소리들인가?”


아라치가 뾰루퉁해져서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 거였어요? 난 또···. 인색하기로 소문난 단장님이 갑자기 그러시니 다들 놀랐잖아요?”

“뭬야?”

“이왕 돈 쓰는 거 휴가에 포상금도 얹어주시지.”

“아라치!”

“아, 아니에요. 고정하시고. 그럼, 전 가볼게요.”


아라치가 손짓하자 두나가 따라 나갔다.

단원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길가온과 사란야는 떠나지 않고 단장실 앞에 서서 기다렸다.

그 두 사람은 우연히 사정을 들었지만, 총리 산애가 다른 단원들에게는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일에 쫓기다 보니 생겨난 오해였다.


마우태는 두 사람이 남아있는 것을 알아보고 문 앞으로 다가왔다.

“너희도 어서 출발해야지? 왜 그러고 있어?”

“저도 수리하는 거 도울게요.”

길가온이 환하게 웃었다.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마우태가 뒷짐을 지고 눈을 가늘게 올려 떴다.

“그 손으로 뭘 돕겠다고? 그냥 쉬는 게 돕는 거다. 너는.”

“저도 한때는 일했었는데요.”

“그게 일이었냐? 물동이에 물이 반은 쏟아지는 거? 허허. 하여튼 마음은 고맙다.”


마우태가 길가온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사란야를 보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샤샤, 널 위해서 휴가로 바꾼 거다. 상재믈에 다녀오라고. 거기 동생이 혼자 있다며?”

“예. 예?”

사란야가 엉겁결에 대답했다가 놀라서 단장을 바라보았다.


“고마워할 건 없다. 겸사겸사. 공연도 안 하는데 죄다 여기 있으면 밥값을 대기가 힘들잖나?”

“고맙습니다.”

사란야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


연천강은 여전히 맑은 소리를 내며 흘렀다. 강가에 세워진 오두막도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불에 그슬린 자국도 지우고, 청소도 깨끗이 해놓았다. 가리개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길가온과 사란야는 유기의 무덤에 들렀다가 곧장 오두막으로 내려왔다. 내일 아침 일찍 상재믈로 출발하려니 마음이 들떠 숙소에 있을 수가 없었다.


“새얼이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 궁금해. 편지에는 잘 지낸다고 했지만, 정말 잘 지내는지.”

“잘 해낼 거야. 원래 책을 좋아하던 아이였잖아? 작가가 될 줄 알았는데, 책방에서 일한다니.”

“을단 할아버지와 하늬도 많이 보고 싶다.”


오두막 안에 들어오자 두 사람은 유기와의 추억에 젖어 들었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웃고 떠들던 세 사람이 아직도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팔찌가 동시에 반짝였다.

“유기도 기뻐하나 봐.”


길가온이 오두막 구석을 가리켰다.

“여기서 반월도를 얻었어. 바닥에 떨어져 있더라고.”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런 신기한 일이 나한테 일어나다니.”


사란야는 반월도의 모습을 생각해냈다. 연기 귀신과 사음귀와 맞서서 날아다니던 반월도의 은빛 궤적.


길가온은 하늘의 성물이 가르치는 대로 꾸준히 반월도를 몸에 익혔다.

상대가 사람이 아님을, 어떤 괴상한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란야에게 들었다.


“반월도 두 개가 만났으니 만월도가 된 건가?”

그의 농담에 사란야가 소리 내어 웃었다.


문득, 오두막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물이 출렁이는 소리, 걸쭉한 죽이 끓어오르는 소리였다.


사란야가 무언가를 느끼고 벽 쪽으로 물러섰다.

어느새 팔에는 반월도가 자리를 잡았다. 길가온의 팔에도 반월도가 감겼다. 숙소에 두고 나온 반월도가 주인을 찾아온 것이다.


‘때가 되었다.’

반월도가 속삭이자 오두막 안 허공에 검은 막이 생겨났다.

숨을 들이마시는 짧은 순간 검은 막이 점점 커지더니 눈앞을 덮을 정도가 되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검은 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


진백성단으로 돌아온 율명은 유민재 가장 안쪽, 자신의 방을 서성거리며 생각을 거듭했다.

‘아랑누와 사로잔을 도울 방법이 필요해.’


암흑성단의 힘을 얼마나 가졌는지 모르나 아유라 역시 암흑성단의 신성이었다. 그가 나선다면 대분성 전투나 다름없게 된다.

진백성과 암흑성의 힘이 부딪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서성이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럼, 그때. 검을 겨누기도 전에 미사가 조각난 건···. 미사가 그걸 막은 거였구나.’


율명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에는 미사랑을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여하는 인간세를 위해 결계를 칠 테지. 여륭에서 움직이지 못할 거야.’


삼신성이 모두 천선계를 비울 수는 없었다. 잠깐이면 몰라도 신력이 폭발하는 싸움에는 더더욱 중심이 필요했다.


‘물의 전사!’

그가 소리쳤다.


대분성 전투에 실망한 물의 전사들이 인간세의 바닷물에 녹아들었다.

그때는 율명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물의 전사를 충분히 부릴 수 있었다.


‘그림자 전사는···.’

그림자 전사에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림자 전사는 부르지 않는 게 좋아.’

기록에 의하면 그림자 전사를 부른 건 단 한 번뿐이었다.


인간세가 스스로 자멸하자 선대 암흑성 태왁은 인간세를 온전히 태초로 돌려놔야 했다. 그때 그림자 전사들이 움직였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


‘그래. 물의 전사를 도우미로 부르자. 인간세 전사들의 숨에 스며들면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모를 거야. 아주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율명은 진백성의 집무실인 창주각으로 향했다. 물의 전사를 부를 수 있는 법라가 그곳에 있었다.


*


온설지는 갑자기 찾아온 안개를 손으로 휘휘 걷어냈다.

“아누! 아누! 거기 있어?”


바로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거센 데도 안개는 조금도 비켜나지 않았다. 안개가 마치 공기인 것처럼 버티고 있었다.


단단한 안개 속에서 손짓은 의미 없었다. 발 닿는 곳으로 나아갔다.


안개에 눈이 익을 무렵, 옅어진 안개 속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누! 거기 있어?”


검은 형상이 점점 다가왔다. 온설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치?”

“온설지?”

아순치가 안개를 뚫고 나왔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온설지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거 혹시 환상? 말로만 듣던 정신공격인가? 아니면 요귀의 주술?’


“둔갑한 요귀인가? 정체를 밝혀라.”

“이런, 사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를 증명해야 한다면···.”


아순치가 목걸이의 유리구슬을 꺼냈다. 그 안에서 백호의 눈썹이 하얗게 빛났다.


“호랑이 눈썹! 아치! 너 아치 맞구나!”

온설지는 뛰어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의 뜨거운 피가 느껴졌다. 주먹으로 등을 두드리며 반가운 인사를 대신했다.


“어디 보자. 거대상단 소단주님이 어떠신지···.”

환하게 웃던 온설지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아순치의 왼쪽 뺨에 길게 그어진 흉터를 보자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화를 낸 건 잠깐이었다.

가벼운 주먹으로 친구의 가슴을 쳤다.

“뭐야? 소단주의 왕관은 머리에 써야지, 왜 뺨에 그리고 다녀?”


“아하하, 그러는 너야말로. 여전히 호랑이 꿈을 꿔?”

“이젠 꾸고 싶을 때만 꾸지. 호랑이가 필요할 때는 내게 부탁하게나.”

“뭔가가 있었군. 어떻게 지냈나 얘기를 듣고 싶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안개가 물러난 벌판은 온통 끓는 모래였다.

붉은 흙이 끓어오르고 검은 물이 강을 이루며 부글거렸다. 후끈한 열기 때문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여기는 귀사전과 비슷해. 기기묘묘한 분위기 말이야. 탁한 공기와 냄새까지.”

온설지와 아순치는 나란히 서서 끓는 벌판을 바라보았다.


“이보세요, 형님들, 저희는 안 보이나요?”

뒤에서 이연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연의 옆에서 도조가 날개 달린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도조의 눈빛에는 살기가 어렸고, 검붉은 깃털에도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꼬마, 까망이! 너희들도 우리와 같은 자리인가 보구나.”

“형님들, 이제 싸우러 갈까요?”


“그럼, 인사는 싸움이 끝난 다음에 하자고.”

아순치가 부채를 꺼내 들었다.


“어! 계로!”

부채를 보자 이연이 소리쳤다.

“무아가 잃어버린 그 부채! 우와, 여기서 만나다니. 아니지. 이제 새 주인을 찾은 거죠.”


아순치는 처음 보는 소년이 대뜸 부채의 이름을 부르자 호기심이 일었다.

‘싸움이 끝나면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구나.’


“꼬마, 넌 걱정 마라. 우리가 지켜줄 테니.”

“걱정 마세요. 저도 무기가 있어요.”

이연이 소매에서 엄지 두께만 한 붓 한 자루를 꺼냈다.


“붓? 그걸로 싸운다고? 그건 하늘의 성물이 아니잖아?”

“천인 무아의 붓이죠. 지도를 그리던.”

이연이 생긋 웃었다.


온설지가 훅 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앞으로 뻗었다. 공중에서 거대한 호랑이로 바뀌었다. 붉은 흙을 배경으로 하얀 털이 더 하얗게 빛났다.

“아누가 여기 없다면, 다른 곳에서 싸울 거야. 우리는 우리가 맡은 적을 정리하자고.”


“좋지! 아주 깔끔하게 해치우자고!”

아순치가 부채 계로로 바람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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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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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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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7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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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7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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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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