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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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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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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잔_한밤의 회담

DUMMY

한밤중 아순치의 방에는 작은 촛불 하나가 흔들렸다.

탁자에 둘러앉은 여섯 명의 전사들은 결연한 눈빛으로 사널리성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하루 사이에 세상이 바뀌는 게 이런 건가?”

다루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이 한순간에 접점으로 모이다니.”


사로잔이 지도에서 노들산을 가리켰다.

“고사나와 타랑대귀가 나타난 것은 오 년 전, 가짜 성주가 온 것은 삼 년 전이야. 그들은 작년부터 겹그믐제사를 준비했어.

모든 사람, 모든 의식이 하나로 모이는 순간에 우리가 뛰어들었어. 그러니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


“말 한번 잘했어. 때맞춰 시신이 발견된 것도 분명 누군가의 술수야.”

아순치가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리예가 지도에서 아름사원을 가리켰다.

“고사나일 거야. 빙설화를 따라 수집한 소문 중에 신녀와 성주에 대한 소문이 있었어. 그때는 성주가 가짜인 줄 몰랐기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슨 소문인데요?”

다루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각자 자신들의 군대를 키우고, 경쟁하듯 재물을 모아들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런 경우 보통 치정사건이 많은데, 아름사원에서 보니 군대가 맞았어.”


“월영국에서 만난 서관 자홍도 그랬어요. 백사귀파에는 우두머리를 하나만 두지만, 반귀는 서로 경쟁하게 한대요. 그래야 서로 빼앗으려고 물불 안 가리며 강해진다고.”

다루영이 마른 협곡에서의 고난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원에 있는 일꾼들은 모두 망석과 백사귀파였어. 아! 사원에 주술도 걸려있었어. 들어가는 순간 몸이 백배는 무거워지는데, 젊은이들에게 겸손할 것을 가르치는 신녀의 교훈이라나.”

사로잔이 설명을 덧붙였다.


“하, 그건 병사들의 진입을 막으려는 수작이오. 말은 그럴듯하군.”

나루뫼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 가짜 성주가 지금 어디에도 안 나타나는 게 문제야.”

해무찬이 팔짱을 끼고 지도 위 성주원 그림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위혼제에는 나오겠지?”


“반파홍귀가 관여할 만큼 중요한 제사라면 그 요귀도 나올 거야.”

사로잔이 지도에서 도리울의 제단 그림을 가리켰다.

“주민들을 설득하려면 가짜 성주와 신녀의 정체를 보여줘야 해.”


“의정관 사병대와 성주원 병사도 돕기로 했소. 성주원 병사가 모두 백사귀파는 아니니.”

나루뫼가 의정관에서 나오기 전 들은 소식을 전달했다.


“제사가 시작되면 아이들부터 구해야 해.”

누리예는 팔찌가 있던 손목을 쓰다듬었다.

맏아들 들샘이 만들어준 팔찌는 지금 로와에게 가 있다. 두려움에 떨던 아이의 눈빛이 생생했다.


“당연하지!”

나루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널리성에 백사귀파가 이백 정도 모였다고 했지?”

사로잔이 아순치에게 물었다.

증패를 갖고 사널리로 모여든 숫자 외에 성주원과 아름사원의 백사귀파까지 계산하면 삼백 명 가까이 될 것이다.


“백사귀파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사람의 무기로는 죽지 않아.”

“그렇다고 신녀와 가짜 성주, 정귀를 놔두고 백사귀파를 상대할 수도 없잖아?”

다루영이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어떻게 해야 백사귀파를 처리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한울이라도 와주면 가능할까.

다루영이 눈을 반짝 떴다.

‘그래! 나망이 한울에게 닿을지도 몰라.’

허리띠에 얌전히 끼어 앉은 전령석 나망을 토닥였다. 가능할 것 같았다.


‘누구보다 한울이 필요해. 지혜를 알려주고, 함께 싸워줄.’

회합이 끝나는 대로 나망을 보내야지.

‘이번에야말로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어!’


다루영이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을 때 사로잔은 아랑누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백사귀는 정귀가 사라지면 몸을 지탱하기 어려워. 백사귀가 아무리 많아도 정귀만 상대하면 돼.’


“그때까지 백사귀들이 가만히 기다리냐고.”

생각이 말로 튀어나왔다.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니까. 아랑누가 해준 말이야.”

사로잔은 아랑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자신 역시 암흑성의 혼 조각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면 자신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아순치는 귀령송환사 보다 그녀와 함께 다니는 백호족 용사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온설지는 그녀가 암흑성의 혼 조각인 걸 알고 함께 다닌 걸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네. 빨리 녀석을 만나야겠는데.’


사로잔이 설명하는 동안 나루뫼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왼쪽 손등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인정하기 시작했군. 곧 각성하겠지.’


다루영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갈피로 반파홍귀까지 봉인하면 용각섬을 되찾는 거야?”

아랑누라는 귀령송환사가 있으면 반파홍귀를 없애고, 부모의 원수를 갚고, 용각섬을 되찾을 수 있다.


환하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해무찬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그 사람을 어떻게 데려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며?”

“어? 그게, 그러니까···.”

사로잔은 말문이 막혔다.


공간 너머로 아랑누를 보고 대화도 나누지만, 정귀를 봉인할 갈피는 실제로 여기 있어야 했다.


“귀령송환사니까 공간이동도 할 수 있나?”

“그건 걱정 마시오.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소.”

나루뫼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누군가 공간을 열면 된다. 너른벌의 사람은 불가능하지만, 천인이나 선인은 가능하다. 그리고 반쪽짜리 천인도.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반인반천의 삶을 뜻깊게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루뫼, 그럼 부탁하겠소.”

사로잔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루뫼는 참수리호에서 그녀와 처음 악수할 때처럼 왼손을 내밀었다. 사로잔도 그때 일을 기억하는지 빙긋 웃으며 왼손으로 바꾸었다.


손등의 무늬에서 비쳐 나오는 황금빛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지도 않는데 눈물이 맺혔다.

나루뫼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손을 던지듯 휙 놓아버렸다.


“좋아. 그럼 도리울 제사에서 가짜 성주는 나와 찬이 맡을게. 요귀는 하늘의 성물로만 상대할 수 있다고 했어. 다루는 아이들을 구해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줘.”

“알았어.”

다루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순치가 다음 순서를 받았다.

“그럼 신녀는 나와 누리예 대장이 맡지. 나루뫼는 병사들과 함께 백사귀파를 맡고. 반파홍귀가 나타나면 사로와 귀령송환사를 연결해주시오.”

“알겠소.”

누리예와 나루뫼가 동시에 대답했다.


“병사들이 백사귀파를 상대하기는 힘들어. 우리가 최대한 빨리 요귀를 없애고, 백사귀까지 처리해야 해.”

해무찬이 다짐하듯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사로잔은 유령선에 생각이 미쳤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거기 있다고 했어. 분명 미사랑의 혼 조각일 거야.’


”유령선은 어땠어? 거기 꼭 가야 할 이유가 생겼어.“

“그것도 수상하긴 해. 지금까지는 가끔 지나갔는데 며칠 전부터 매일 나타난대. 신성한 제사를 앞두고 이방인이 들어와서 그런다고 무서워하더군.”

해무찬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총체적인 난관이지. 타랑대귀에 유령선까지.”

“그러니까 우리가 도착한 날부터 매일 나타났다는 거야?”

“오, 얘기가 그렇게 되나?”

해무찬과 다루영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나 때문인가?’

유령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필이면 타랑대귀와 신녀에 가짜 성주까지 판을 치는 사널리에서?


아니, 유령선이 있는 곳에 신녀가 타랑대귀를 데려온 것이 제대로 된 순서지. 거기에 가짜 성주가 들어왔고.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들어왔다.


“정귀가 사라지지 않으면 이번 일도 다른 기억으로 편집되겠지?”

다루영이 손가락으로 깍지를 끼고는 힘껏 눌렀다.


용각섬을 잊은 용각국 사람들처럼, 그들을 위해 싸우다 죽은 존재들도 잊히는 것이다.

해무찬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눈빛이 마주치자 어깨를 토닥였다.


누리예가 의자 깊숙이 기대앉으며 지도의 사맟해를 가리켰다.

“누군가 타랑대귀도 상대해야지.”

“신녀가 죽으면 주술도 사라지니 자연히 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러면 좋지만, 사람들이 다칠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움직이자.”

“네. 신녀든 가짜 성주든, 반파홍귀든.”

사로잔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난 궁금한 게 있어.”

아순치가 지도 위의 성주원을 톡톡 두드렸다.


“왜 증패를 만들면서까지 백사귀파를 불러들였을까? 가짜 성주든, 신녀든 목적이 있었을 텐데, 이렇다 할 이유가 안 보이거든.”

“위혼제에서 목적이 드러나려나?”

해무찬이 턱을 쓸어내렸다.


누리예가 미소를 지었다.

“두 요귀의 목적은 같을 거야. 서로가 상대라는 것만 다를 뿐.”


그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백사귀파를 이용해 서로가 서로를 없애려 한다면 위혼제에서의 싸움은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이다.


어둠이 묽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루월관 복도를 따라 두 쌍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창밖으로는 보름떡 모양의 돌 하나가 소리 없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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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49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6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57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4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7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7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59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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