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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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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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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아랑누_해갈

DUMMY

마난과 대주의 모든 계곡이 물에 잠겼다. 골짜기마다 강을 이루었다.


하늘로 올라간 유리산의 잔해가 부슬비가 되어 내렸다.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부슬비는 여간해서 그치지 않았다.


아랑누는 가뿐한 몸으로 깨어났다. 머리가 맑았다.


유리산 둥지에서 거대한 새를 본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후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은 없어도 큰 짐을 던 듯 마음이 개운했다.


흰 지팡이는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알고 사뿐히 날아왔다.

창문을 열자마자 물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게 뭐야? 여기 비익정 아닌가?”


방을 둘러보니 비익정이 맞는데 창밖은 온통 호수였다.

지평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수평선이 되었다. 유리산이 있었던 자리에는 야트막한 흰바위산이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일어났구나.”

도사 틔움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미음 그릇이 들려있었다.


“도사님!”

아랑누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틔움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 어떻게 된 거예요?”

“우선 이것부터 먹어라. 이틀 동안이나 내리 잠만 잤으니.”

“이틀 동안요?”


그 말을 듣자마자 몹시 허기졌다.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미음을 물처럼 들이마셨지만, 꾸르륵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아랑누는 민망해서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마당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렸다. 온설지와 이연이었다.

주변이 모두 물에 잠겼으니 두 사람은 나룻배를 타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런 때 까망이가 있어야 하는 거지.”

“까망이가 누님은 태워도 형님은 절대 안 태워줄걸요?”


“호랑이는 안 되겠어. 날개 달린 호랑이라면 몰라도.”

“어! 그거 좋겠어요. 이왕이면 꼬리는 용처럼 길고, 입에서는 불을 뿜는 거예요.”

“아주 괴물을 만들어라. 네 몸 아니라고 마구 붙여대?”


아랑누가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이연이 그녀를 알아보고 팔을 번쩍 들었다.

“누님! 오셨군요. 혼자서도 잘 찾아오셨네요?”


이연은 방으로 뛰어들자마자 아랑누의 손을 붙잡고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 침을 튀기며 이틀 동안의 일을 떠들었다.

“그래서 대주 사람들은 다 피신했어요, 다친 사람은 없어요. 며칠 후에는 물이 많이 빠질 거라지만 협곡이 있던 자리는 강으로 남을 것 같아요. 어디서 물이 계속 솟아나는지.”


“운여는 아직 안 왔나? 마난 쪽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데.”

온설지가 두리번거리자 도사 틔움이 그를 안심시켰다.


“마난 사람들도 잘 대피했으니 곧 돌아올 거다. 배를 구하느라 늦어지겠지.”

“참, 도사님! 까망이는요?”

“내일이면 깨어날 거야.”


도사 틔움은 죽과 주먹밥을 가져다주었다. 이번에는 이연과 온설지가 전투에 임하는 병사처럼 게걸스럽게 두 그릇씩 해치웠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니?”

틔움의 물음에 두 사람은 동시에 아랑누를 바라보았다.


대접 바닥까지 죽을 긁어먹던 아랑누가 고개를 들었다.

“여륭이요. 사로잔과 만나기로 했어요.”

“여륭이라고?”

온설지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거긴 사람이 살지 않는데? 하긴, 너른벌에서 가장 영험한 땅이라고 스승님이 말씀하시긴 했어. 거기선 또 무슨 일을 하려고?”

“아직 몰라. 일단 만나서 상의해야지.”


“누님, 반파홍귀까지 봉인했는데, 또 할 일이 있나요?”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았어.”

“아누, 그 마지막은 진짜 마지막 맞지?”

“아···.”

아랑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유령선에서 망령이 부탁하지 않았던가. 그들을 도와달라고. 사로잔의 몸을 이용해 그들을 보냈으니 그녀도 들었으리라.


“그러네. 싸움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어. 정귀가 사라져도 망석과 사음귀, 쇳디는 남아있다니까. 그들을 도와야 해.”

“너른벌 어디에 뿌려졌는지 모를 그 수많은 사음귀들을 다 찾아서?”


“휘익!”

이연도 놀라 휘파람을 불었다.


“좋아. 까망이가 깨어나면 바로 출발이다!”

“맞아요. 형님! 어차피 할 일이면 미룰 이유가 없죠.”

“일단 배부터 채우자고!”

“그럼요, 그럼요.”

두 사람은 다른 먹거리를 찾아 주방으로 내려갔다.


*


아랑누 일행은 가장 가까운 항구를 찾아 서쪽으로 떠났다. 아무리 가까운 항구라도 십여 일이 넘게 걸리는 거리여서 서둘러 출발했다.


운여는 수행원들을 보내고 비익정에 남았다.

수행원들이 마난과 대주에서의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비익정에 머물면서 신비로운 기억을 간직하고 싶었다.


마음을 읽는 귀령송환사와 물로 만들어진 유리산, 잠시나마 섬이 되었던 비익정, 호랑이로 바뀌는 백호족 용사, 신조로 변신하는 까마귀까지 무엇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다.

이런 경험은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비익정은 섬이 아니었다.

물이 빠지면서 배로 다니던 길에 바닥이 드러났다. 아직 마차가 지날 정도는 아니지만, 곧 넓어질 것이다.


운여는 아침의 선선한 공기를 맡으며 마당으로 나와 섰다. 유리산이 있던 자리에는 흰 바위가 언덕처럼 솟아있었다.


비밀의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던 윤슬의 모습이 아련했다.

‘슬아, 비밀의 책이 없어.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다른 누구의 명령보다 그녀의 부탁은 꼭 이뤄주고 싶었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제는 강이 된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입 안이 썼다. 아버지가 부탁한 하늘의 성물도 구하지 못했다.

‘하늘의 성물을 구하면 너에게도 주고 싶었는데···.


그가 바라던 소망 중 하나는 다리를 고치는 것이었다.

아랑누가 떠나기 전 치료를 부탁했지만, 그녀는 조용히 웃어 넘겼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예요. 사랑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죠. 자기 그릇에 넘치는 것을 나누니까요. 내가 헐벗고 배고픈데 누구에게 나누겠어요?’


그녀가 바람 한 줄기를 부르니 뜨거운 바람이 운여의 왼쪽 다리로 스며들었다.

허벅지에서 발목까지 뜨거워졌다가 이내 시원해졌다. 그러나 걸을 때마다 아픈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에는 당신의 사랑을 그 사람에게 나눠주세요. 그때 알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럼, 조금 더 고민해볼까요?’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하고, 윤슬에게 사랑을 나누라고?’


그가 내린 답은 하나였다. 다리를 고칠 수 없다는 것.

아랑누도 불치병인 것을 알고 완곡하게 돌려 말했으리라. 그렇다고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녀를 통해 그보다 더 큰 것을 얻었으니까. 다시는 보지 못할 진귀한 경험을.


운여는 절룩거리며 뭍이 드러난 길 끝까지 걸었다.

흰바위산 가까이 다가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흙탕물이 섞인 강물을 바라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수행원들과 마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나서 돌아본 유리산의 폭포는 너무나 위엄 있고 웅장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뿌연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물속에서 무언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도마뱀인가?’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았다. 움직이는 것은 호신용 단도였다.

수정으로 깎은 단도는 날이 갈려있지 않아 뭉툭했지만, 모양은 틀림없는 단도였다.


운여가 입을 떼지도 못하고 더듬었다.

“지금, 저거···. 단도가 기어 나오는 거야?”


그가 놀라 소리치자 단도가 튀어 올랐다. 엉겁결에 단도를 손에 쥔 그는 찌릿하는 느낌에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이름이 소연이라고?”


두 손으로 단도를 받쳐 들고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혹시 꿈인가?


“아저씨, 여기서 뭐 해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여는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열대여섯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둘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보라색 머리카락에 뾰족한 귀를 가졌다.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이 없는데도 산들거렸다.

‘너나족과 요마족?’


아이들은 나룻배를 타고 왔는지 작은 배에 말과 짐이 실려 있었다.

운여는 배와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뭘 좀 찾고 있다. 너희들은?”

“성물을 찾았으면 다 찾은 거예요. 뭘 더 찾아요?”

이루다가 싱글거리며 그의 손에 들린 단도를 들여다보았다.


“이게 성물이라고?”

“아저씨도 선택받았군요? 그럼, 준비해야 해요. 곧 전투가 시작될 거래요.”

경운도 새로운 무기를 신기해하며 발돋움했다.


“무슨 말이야?”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죠!”

경운이 폴짝 뛰어 뒤돌아섰다. 그의 등에는 오색의 투명한 방패가 매달려있었다.


“이게 뭔지 보이시죠?”

이루다도 등에 짊어진 무시궁을 보여주었다.


머릿속에 번개가 친 것처럼 눈이 확 띄었다.

“성물! 하늘의 성물이구나!”

“맞아요! 하늘의 성물은 스스로 주인을 정한대요.”

손에 들린 단도가 방패와 활을 반기며 몸을 떨었다.


그제야 단도 소연을 쓰는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언제 발을 내디뎌야 하는지.


경운이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 난 경운이에요. 이 친구는 이루다예요. 이루다는 백 년도 훨씬 전에 태어났대요. 지금은 아만상단에서 일하고요.”


운여가 눈을 반짝였다.

“오! 네가 부녹님이 고용했다는 요마족 심부름꾼?”

“사다녜라니까요.”

이루다가 싱글거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경운은 그의 손을 잡고 흔들다가 이루다와 손을 잡도록 넘겨주었다.

“와, 우리가 삼인방인 거네요?”

“둘보다는 셋이 든든하기는 하다.”

이루다도 기뻐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너희는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물이 불어 위험한데.”

“약재를 구하러 왔어요.”

“약재? 여기서?”

운여가 출렁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벌써 다 찾았어요. 이제 돌아가는 길이에요.”

경운이 싱글거렸다.


유리산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생각보다 늦어졌지만, 마난 협곡 가장 안쪽 동굴은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보송보송했다.

경운은 톱말풀을 찾았고, 이루다는 시조새의 알둥지 조각을 찾았다.


암흑성 미사랑이 만든 둥지는 보석을 다듬은 듯 빛을 받으면 오묘하게 색이 바뀌었다. 그것은 흘러가지 않고 그대로 흰바위산 꼭대기로 내려앉았다.


부녹은 그곳에서 알둥지 조각을 찾으라고 부탁했다.

그때는 유리산이 내려앉을 줄 몰랐기에 아랑누를 쫓아가면 길이 보일 것이라고만 예상했다.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너는 알아볼 거야.’

단주의 말 그대로였다. 경운에게도 투명한 유리 조각으로만 보였으니까.


“어디까지 가세요? 태워다 드릴게요.”

“난 걸어도 돼. 저기 비익정까지 가니까.”


“으흠. 그럼 우리도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갈까?”

이루다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경운과 이루다는 배를 끌어 올리고 양옆의 바퀴를 내렸다. 데려온 말에게 고리를 씌우니 나룻배가 마차로 바뀌었다.

두 아이의 손발이 척척 맞아 금방 일이 끝났다.


“타세요. 비익정까지 모셔다드리죠.”

“아만상단의 신기술이구나. 루월상단에서도 만들어야겠는걸.”


“보기에는 간단해도, 비밀이 숨어있어요.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 없죠.”

이루다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비밀이라···. 사실 나도 유리산에 비밀의 책을 찾으러 왔는데···.”

“그거 원래 없는 거 아니에요? 단주님이 그런 것은 없다고 했는데?”

이루다가 배 위에서 그들이 앉을 자리를 정리했다.


경운은 바퀴 이음새를 확인하며 재잘거렸다.

“책은 없어도 성물을 찾았잖아요? 성물이 아저씨를 주인으로 삼은 것은 엄청 대단한 일이에요. 그리고요, 여기 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다 가뭄 때문에 걱정했는데, 이제 가뭄도 사라졌잖아요?”


운여는 두 아이의 대화를 들으며 심장이 불끈거렸다.

‘그래. 난 성물의 주인이 되었어. 가뭄도 해결되었고. 뭐가 더 필요하지?’


가슴이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윤슬에게 청혼해야겠어. 내게도 시험 볼 기회를 달라고 하겠어.’


경운이 그를 부축하러 다가왔다.

아이의 팔을 잡다가 운여는 문득 깨달았다.

발을 디뎌도 아프지 않았다. 다리를 뻗을 때마다 뼈마디에 느껴지던 통증도 사라졌다.


그는 허리를 세우고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마차배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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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인간세의 전사들 2 22.08.07 44 0 11쪽
208 인간세의 전사들 1 22.08.06 56 0 12쪽
207 공간을 열다 22.08.06 61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 아랑누_해갈 22.08.06 44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3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7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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