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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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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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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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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지키는 자와 떠나는 자

DUMMY

검은 모래바람에 둘러싸여 눈도 뜰 수 없었다.


사로잔과 한울은 고개를 숙이고 바람에 맞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눈가리개를 한 아랑누도 따끔거리는 모래에 머리를 들 수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어쩌면 하루가 지났는지 시간도 느낄 수 없었다.


회색빛 공간에 마른번개가 내리쳤다.

바닥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쩍쩍 갈라지며 여기저기서 용솟음쳤다.


걸을 때마다 아랑누의 영안이 점점 어두워졌다. 또렷했던 형상은 점차 뭉개지고 기운의 덩어리만 읽혔다.


낯선 공간은 소음으로 가득 차 사로잔을 부를 수도 없었다.

‘내 몸으로 싸울 수 없는 상대라면 사로의 몸에 내 혼을 몰아넣어야지. 나보다 훨씬 강하니까.’


혼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운명일 것이다. 아랑누는 신령석의 기운을 읽으며 결심을 다졌다.


벌판 너머 아득한 지평선에서 회오리가 일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 회오리가 그들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울이 경고했다.

“공간이 휘어집니다!”


바람을 피하려 안간힘을 썼으나 비껴갈 수 없었다. 회오리에 말려 몸을 가눌 수 없었다.


*


바람이 멈추고 눈을 뜰 수 있게 되자 사로잔은 자신이 또 다른 공간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고요하고 메마른 공간이었다.


눈을 뜸과 동시에 아픔이 밀려왔다. 칼바람에 맞아 살이 찢기고 피가 흘렀다.


한울 역시 온몸에서 피를 흘렸다.

천력을 잃었으니 너나족 사람과 다를 바 없지만, 끝까지 검을 놓지 않고 버티어 섰다.


아랑누도 찢어진 옷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지만, 이를 악물었다.


공간 속의 공간은 숨쉬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무언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땀에 젖어 옷이 무거웠다. 피와 땀이 눈을 찔러 앞을 볼 수 없었다. 아랑누만이 흐릿한 영안으로 눈앞을 응시했다.


그들 앞에 날개 달린 천인이 스르르 나타났다.


“아유라!”

한울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사로잔이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넋이 빠져나갈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뽀얀 피부와 찰랑이는 붉은 머리카락, 하얀 안개구름이 그녀를 떠받쳤다.

눈부시게 하얀 날개가 활짝 펼쳐지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순간 싸울 의지가 사라졌다. 그저 바라보고만 싶었다.


아유라는 아랑누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불쌍한 아랑누. 한 맺힌 귀령이나 위로하며 살면 좋았을 텐데. 쓸데없이 각성해서는.”


아랑누에게는 눈앞의 형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다. 영안이 어두워져 상대를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그녀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되살아났다.


‘아유라··· 라고? 그 흑과 백의 순수한 덩어리?’

아랑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미사랑, 새로운 차원을 여는 건 나의 숙명이야. 이제 새로운 세계를 열거야.”

“여긴 너에게 허락된 차원이 아니야.”


아랑누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미사랑은 당신을 돌려보내려 해. 당신을 필요로 하는 차원이 있을 거야. 아유라, 돌아갈 때가 되었어.”


“후후, 사람의 몸으로 그게 가능할까? 어긋나는 차원에 붙어있는 것도 고통이야. 완전하고 순순한 차원에서 새로 시작해야지.”

아유라가 팔을 벌려 흩어진 천력을 불러 모았다. 대기가 꿈틀거리며 그녀에게 끌려 들어갔다.


공간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사람의 몸으로 이 힘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랑누는 자신의 혼을 사로잔의 몸으로 옮기려고 힘을 모았다.


아유라가 손짓하자 허공에 미끈한 막이 펼쳐졌다.

아지랑이처럼 꿈틀대며 사로잔을 삼켰다. 아유라를 바라보느라 넋을 잃은 그녀는 자신이 투명한 막에 붙잡힌 것도 알지 못했다.


한울이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막에서 빼내려 힘을 주자 아유라가 손을 휘둘렀다.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창이 날아와 꽂혔다. 회오리에 찔려 다친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쏟아졌다.


사로잔은 안개 그물에 덮여 꼬치처럼 묶였다.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여전히 눈은 아유라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랑누 역시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선택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로의 기운을 내게로 가져오겠어.’


아랑누가 주문을 외우자 사로잔에게 있던 미사랑의 힘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사로잔의 강인한 전투력이 그녀의 몸을 채웠다.


사로잔은 정신을 잃고 나뭇잎처럼 늘어졌다. 안개 그물에 묶인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한울이 뛰어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빈껍데기처럼 늘어졌지만,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끝까지 반항하다니. 불쌍하구나. 호위무사조차 천력을 잃었는데 무슨 수로 날 이길까?”

아유라의 천력은 정점을 향해 모여들었다. 거대한 폭발을 위한 응집이었다.


아랑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만해. 당신이 공격하려 하면 사람의 기운이 더 강해질 거야. 난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야. 하늘의 성물이 선택한 전사들이 함께 싸우고 있어.”


“미사, 내가 충고 하나 하지. 사람을 믿지 마. 그들은 결국 너를 배신할 테니까.”

“아유라, 사람이 묶은 일은 사람이 풀 거야. 요귀를 만들고, 키우면서 요귀에게 고통 받지만, 이겨낼 거라고. 그렇게 인간세도 살아남을 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해! 지금 끝낼 테니까.”

아유라가 마지막 힘을 다해 천력을 쏟아 넣었다.


그들이 있는 공간 속의 공간이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찼다. 거대한 핵이 되어 응어리졌다.


열린 공간의 다른 곳에 있던 인간세의 전사들 역시 검은 핵을 바라보았다.

산처럼 쌓인 요귀의 시체를 넘어 공간 전체가 하나의 핵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들이 가진 무기에서 동시에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사방에서 아랑누에게로 모여들었다.


사로잔의 휼과 모얀에서도, 회강석 목걸이에서도 빛이 났다.

아랑누가 가진 하늘의 성물이 빛의 중심이 되어 사방에서 몰려드는 빛을 받아들였다.


아랑누를 위한 빛의 장막이 완성되는 순간, 아유라가 날개를 활짝 폈다.

그녀의 검은 핵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열린 공간 너머 인간세까지 미치는 강한 힘이었다.


인간세 전사들이 보낸 힘의 결계가 불끈거리며 막아섰다.

장막으로 밀려드는 아유라의 힘을 퉁겨냈다. 폭발하는 천력을 되돌려 힘의 주인에게로 반사했다.


아유라의 힘이 거꾸로 아유라에게로 날아갔다.


아랑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 돼!”


그녀는 바람을 불렀다. 곧장 아유라에게로 날아올랐다.


“죽으면 안 돼! 당신은 새로운 차원을 위한 원천이야!”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웠다. 보호막을 만들어 아유라를 감쌌다.


“후, 날 걱정하는 거야?”

“미사랑은 당신을 제 자리로 돌려놓겠다고 맹세했어.”


“왜 나를 두고 맹세하지? 휘모랑이 없다면 난 의미 없어.”

아유라는 쓸쓸하게 웃으며 아랑누가 만든 보호막을 쳐냈다.


순간, 아유라가 만든 파괴의 힘이 폭발했다.

열린 공간이 전부 빛에 싸일 만큼 눈부신 폭발이었다.


빛의 장막에 가로막혀 공간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했으나 인간세의 땅과 하늘이 잠시나마 흔들릴 만큼 무시무시한 폭발이었다.


*


아랑누의 영안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시조새?”


유리산 둥지에서 사라졌던 시조새가 그곳에 있었다. 이제 그는 새가 아니었다. 거대한 천인의 형상이었다.


아유라가 만든 이 공간을 찾기 위해, 이 공간으로 들어오기 위해 가진 능력을 모두 써버려 그는 몹시 지쳐있었다.


“싸움은 끝났다. 미사랑, 아유라를 지켜줘서 고맙다.”

그는 아유라를 감싸 안았다.


온몸이 찢어지고 만신창이가 된 아유라는 검은 피를 흘리며 힘들게 눈을 떴다.

“휘, 휘모랑···. 드디어 만났어.”

아유라가 손을 뻗어 휘모랑의 뺨을 어루만졌다.


휘모랑이 그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맞대었다.

“아유라, 넌 미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 인간세로 떨어질 결심을 한 순간 이미 그녀가 승리한 거야.”


휘모랑이 아유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새로운 차원을 보게 될 거라는 건, 네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니야.”


그는 아유라의 작은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모든 차원은 태어나고, 언젠가는 닫혀. 우리는 그 순간을 살다 가는 거야. 닫혀야 또 다른 차원이 시작하니까.”


“휘모랑, 당신은··· 진정한 신이잖아···.”

“신이라고 믿었던 나도 신이 아니었어. 아유라, 우리는 차원의 심부름꾼이야. 이제 다시 새로운 차원을 열자.”


휘모랑은 아유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몸은 동그랗게 오므라들며 알의 모양이 되었다. 그는 근원의 알을 품에 안고 아랑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순수한 근원이다. 새로운 차원을 만들려면 아유라가 필요해.”

“당신은 아유라 때문에 여기로 왔나요?”


“이쪽 차원에 온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나도, 아유라도 선택할 수 없는 일. 네가 암흑성으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휘모랑의 형상도 점차 덩어리로 뭉그러졌다.


“나는 새로운 차원을 보았다. 여기는 무너진 이전 차원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람들은 다른 신을 만들지 않았고, 삼신성도 자신이 신이 아님을 알고 있다. 숭배 받으려 하지 않고 지키고 보살피려 하지.”

휘모랑의 형상이 하나의 원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파괴하고 요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걸 바로잡는 것도 사람들이다. 그래서 천선계와 함께 차원의 방문자를 보낼 힘이 생긴 것이지.”


“당신들은 차원의 틈으로 돌아가나요?”

아랑누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익족을 남겨두겠다. 나의 깃털로 미사랑이 만든 전령새. 아랑누로 있을 때는 아랑누에게, 미사랑으로 돌아가면 미사랑에게 속할 것이다. 천계에서는 인간세를 보지 못하니 도움이 될 거다.”

휘모랑은 아유라를 감싼 알이 되었다.


그것은 지금의 삼신성이 담월곡에 태어날 때 여라함의 혼이 미사랑의 혼을 감싸고 있던 모습과 비슷했다.

휘모랑과 아유라의 알은 공간을 넘어 차원의 틈으로 사라졌다.


염라성 아유라가 사라지자 요귀들은 괴력을 잃었다.

전사들의 무기에 가루가 되어 흩어지거나 혼란의 틈을 타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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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인간세의 전사들 2 22.08.07 44 0 11쪽
208 인간세의 전사들 1 22.08.06 56 0 12쪽
207 공간을 열다 22.08.06 61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4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4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8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5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2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3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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