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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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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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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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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랑누_일행이 되다

DUMMY

하월의 수많은 거리 중에서도 연인의 거리에는 유독 길 잃은 망령이 많았다.

아랑누는 귓가에서 하소연하는 망령에게 귀 기울이며 천천히 거리를 돌아보았다.


‘연인의 거리라···. 그래서 사랑을 맺지 못하고 죽은 혼들이 많았구나.’

형체만 보이는 흑백의 세계여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잘 읽혔다.


아랑누는 매듭을 묶는 젊은 연인들을 바라보며 지금의 애틋한 기운이 앞으로도 이어지기를 기도했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랑누는 구태여 돌아보지 않아도 영안으로 옆과 뒤를 볼 수 있었다. 태연하게 낯선 이의 기운을 읽어나갔다.


그가 뚫어지게 보는 것은 수호대였다.

‘영진성의 수호대라는 걸 알 리는 없고···, 여기 박힌 하늘의 성물을 보는구나.’


수호대를 빼앗으려는 보물 사냥꾼인지, 그저 호기심 때문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잠자코 서서 상대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읽어나갔다.


그의 목 부근에서 따뜻하고 애잔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지금 상점에 앉아 서로를 위해 매듭을 묶는 연인들의 것과 비슷했다.

그녀 앞에 앉아있는 연인들보다 오래되고 깊었으며 또한, 서글펐다.


아랑누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읽는 것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그가 직접 말하게 해야지.’


운여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선 장님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순간 고개를 떨어뜨렸다. 허리띠가 더욱 잘 보였다.


‘틀림없어. 저기 박힌 보석은 분명 하늘의 성물이야.’

아무리 크기가 작아도 확실했다. 저 정도면 백 개는 족히 될 텐데, 어떻게 구했을까.


‘엄청난 부자이거나 보물 사냥꾼? 도둑과 패거리인가? 부자라기에는 너무 초라한데? 정체가 뭐지?’

운여가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아랑누는 천천히 그의 옆을 지나갔다.


예상대로 운여는 자석에 끌리듯 아랑누를 뒤쫓았다.


연인의 거리답게 길 잃은 망령이 수시로 그녀를 붙잡았다. 아랑누는 망령을 위로하며 노래를 불렀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 평안히 쉴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빛 그물을 만들어 영천옥으로 보내주었다.


운여는 넋을 놓고 아랑누를 바라보았다.

이만큼 아름답고 절절한 노래가 없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나오는 빛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윤슬이 옆에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저토록 신비한 빛을 함께 보고 같이 노래를 들으면 좋을 텐데.


운여가 윤슬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한 무리의 왈짜패들이 아랑누에게 다가왔다.


“어이, 아가씨. 그 허리띠 넘기시지. 아가씨에게는 너무 위험해.”

“봐! 저 팔찌랑 비녀도 꽤 값나가겠어.”

“그래? 그럼 그것도 내놓으셔.”

다섯의 왈짜패들이 아랑누를 둘러쌌다.


아랑누는 왈짜패의 협박에도 조용히 웃었다. 그동안 온설지 덕분에 싸울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동안 수련한 봉술을 써볼까. 먼저 바람을 부르고···.’


바람을 불러 한 명씩 띄워 올리고 물 항아리의 물을 불러 기선을 제압한 다음, 봉술을 선보이리라.


그러나 그녀의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운여가 어느새 왈짜패들을 때려눕혔다. 다리를 절룩거린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디서 행패야?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그는 품에서 목패를 꺼내 보였다. 붉은 칠을 한 나무에는 검은 선으로 대리천의 문양이 새겨졌다.

대리천의 특별임무를 맡은 자에게 내리는 권한을 상징했다.


왈짜패 중에서 두 명이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를 따라 남은 사람도 비틀거리며 뛰어갔다.


아랑누는 모처럼 찾아온 기회가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고맙습니다. 흉한 꼴을 보일 뻔했네요.”


“괜찮으십니까? 여기는 외진 곳이라 혼자 다니면 위험합니다.”

운여의 손등에 피가 맺혔다.


“이런, 피가 나네요.”

아랑누는 그의 소매를 잡고 등불 아래 꿇어앉았다.


손수건을 감싸는 손놀림에 운여는 상대가 장님이 맞는지 자꾸 의심이 들었다.


기묘한 여인의 정체를 상상하며 갸웃거리는 사이 아픈 다리가 뜨거워졌다. 발바닥부터 시작해 뼛속으로 열기가 훅 지나갔다. 이상하다 생각하는 사이 그 기운은 사라지고 시원해졌다.


“다친 곳은 또 없으세요?”

아랑누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의 왼쪽 다리에 머무는 원망, 미련, 망설임, 지극한 사랑을 보았다. 목걸이도 처음부터 목걸이가 아니었다.

‘팔찌를 나눠 낀 상대 때문인가? 다리를 스스로 묶을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운여가 서둘러 손을 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으흠, 막무가내로 도와준다고 할 수는 없고. 거래를 해 볼까?’

아랑누는 혼자 미소 짓고는 지팡이를 잡고 일어섰다.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은 제가 가진 것이 없으니 내일 아침 첫 종이 울릴 때 제일관문 광장에서 뵙지요.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합니다.”


그 순간, 운여가 간절하게 마난의 유리산을 생각했으므로 아랑누에게도 전해졌다.


“아쉽네요. 저도 내일 떠나야 해서 일찍 뵈려 했는데···. 유리산을 찾아가는 길이라 서둘러야 하거든요.”

“유리산요? 거기에 가신다고요? 저도 거기 가는데!”


“그러세요? 그럼 같이 가도 될까요? 아랑누예요. 과희국 모여사원의 귀령송환사죠.”

아랑누가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운여는 아까 보았던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노래가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좋은 길동무가 될 것 같네요. 저는 루월상단의 운여입니다.”

운여도 기분 좋게 손을 맞잡았다.


*


“아누, 여기서 며칠 묵기로 한 거 아니었어? 어떻게 오자마자 출발이야?”

날이 밝기도 전에 짐부터 챙기느라 온설지와 이연은 시무룩했다.

느긋하게 축제를 구경하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유리산에 간다는 사람을 만났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야.”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아니고?”


“서로 돕는 거지. 연아, 어제는 재미있었어? 늦게 들어오던데?”

아랑누는 짐을 다 챙겨놓고 축 처진 이연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루다를 만났어요. 참나로 의식이 끝날 때까지 아만상단 천막을 지켜야 한 대요. 그래서 오늘 또 가보려 했는데···.”

“이런. 내가 미안한 일을 했네. 그럼, 다시 가서 취소할까. 나도 이루다 보고 싶다.”


아랑누가 진지하게 고민하니 이연이 손사래를 쳤다.

“어, 아니에요. 그보다 우리 할 일이 중요하죠. 어차피 단주님은 벌써 떠나셨다니까요.”

“연이 대모님?”

“예. 그리고 뭐, 축제가 거기서 거기죠. 저나 형님이나 연인이 없으니 재미없더라고요.”


“어쭈, 꼬마야, 왜 나까지 걸고 들어가? 난 재밌기만 하던데?”

온설지가 어깨를 들썩였다.


“나도 재미있다. 난 더 있다가 갈 거다. 먼저 가시오들.”

선반 위에서 도조도 깨어났다. 까마귀로 돌아와 자던 모습 웅크리고 종알거렸다.


이연은 봇짐을 들춰 메고 다른 기대에 부풀었다.

‘경운이 약을 구하러 유리산으로 올 테니, 거기서 또 만나려나?’


“그런데, 아누, 누구와 만나는데 이렇게 서둘러?”

“루월상단의 운여라고 했어. 기린족이고, 예의 바르고 싸움도 잘하던데?”

“루월상단, 운여?”


온설지는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서 들었더라?


똑같은 이름을 듣고도 이연은 다른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그럼, 마난까지 루월상단의 마차로 가는 거야? 편히 갈 수 있겠네? 오! 보리도 수레에 타고 쉬면서 갈 수 있잖아?’

조금 전의 시무룩한 모습은 사라지고 콧노래를 불렀다.


*


제일관문 광장에서 운여를 보자 온설지는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크고 하얀 손으로 운여를 덥석 끌어안았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무예도 뛰어나고, 지력과 혜안도 두루 갖췄으며 결단력 있고, 시장의 흐름도 볼 줄 안다는 운여님이시군요!”


“저를 아십니까?”

“아치, 아, 아순치에게 들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라고.”

“하하, 아순치요. 그 친구야말로 저를 자극하는 상대죠. 지금은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요.”

운여가 쓸쓸하게 웃었다.


‘어허,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구만. 하긴, 벌써 칠 년이 지난 이야기이니.’

온설지는 그늘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을 보며 그 이상의 말은 아꼈다.


그에 대해 들었을 때는 적어도 절름발이는 아니었으며, 지금처럼 의기소침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그는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온화하지만, 어딘가 그림자 속에서 사는 느낌이었다.


이연은 싱글생글거리며 운여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저씨, 그럼 가는 길에 루월상단의 숙소에서 머무시나요? 저희에게도 방 한 칸만 주시면···. 아, 식사도 같이···. 하하하.”


“꼬마야, 너 정말 얼굴만 두꺼워지는구나.”

“형님이나 도조만큼은 아니라고요. 이왕 가는 거 편하게 가면 좋잖아요?”


온설지와 이연이 투닥거리니 운여가 중재에 나섰다.

“친구가 되었으니 당연하죠. 함께 가시죠.”


*


여행용 마차에 앉아서도 운여의 시선은 수호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솔담을 떠나기 전 별채까지 찾아온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 가거든 하늘의 성물도 알아봐라. 우리라고 못 할 수 없지. 안 그러냐?’

‘왜 루월에서는 단서 하나 못 찾지? 분명 유우대륙에서 구했다던데···.’

‘그걸 찾아봐라.’


유리산에 가기도 전에 하늘의 성물을 보다니. 하지만, 이건 주인이 있는 물건이다. 이 사람은 어디서 구했을까.


“그 허리띠는 어디서 산겁니까? 혹시 팔 수 있나요? 값을 후하게 쳐드리지요.”

운여가 생각을 거듭하다 겨우 거래를 청했다.


아랑누는 웃으며 수호대를 토닥였다.

“이걸 갖고 싶으시군요? 팔수는 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때가 되면 꼭 운여님께 드릴게요.”

“정말입니까? 그런데 때가 되면 이라니요? 그건 언제?”

“정확히는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유리산에는 왜 가시나요?”

“운여님과는 목적이 다르니 안심하세요.”

“제가 왜 가는지 아시는 것 같네요?”


“다 알지는 못해요. 비밀의 책이나 불로불사의 비서를 찾으러 사냥꾼들이 많이 간다지만 운여님은 그런 이유가 아니지요.”

“귀령송환사라더니 마음도 읽으시는군요? 그럼 제가 왜 가는 걸까요?”


“그 이유보다 중요한 건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지요.”

아랑누의 말에 운여는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온설지는 눈을 감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운여도 유리산으로 간다고? 아랑누에게 유리산으로 가라고 한 건 호설이었어. 대체 거기 뭐가 있기에.’


눈을 감으니 으스스한 귀사전이 보였다. 어둡고 탁하며 끈적거리던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기괴한 모양의 요귀들이 서로를 찢으며 할퀴며 싸우던 모습마저도 생생했다.


‘설마 그런 곳은 아니겠지.’

온설지는 잠꼬대하는 척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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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4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4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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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4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8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5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2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3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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