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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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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5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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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DUMMY

여라함은 도사 틔움으로 변신했던 모습을 벗고 영진성의 모습으로 의자에 앉았다. 친구를 위한 향차도 잊지 않았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던 율명도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 변신을 풀어도 되나?”

“아무도 없어. 아랑누와 도조 외에는. 모두 피신했네.”

“그래서 이렇게 텅 빈 거군. 어떻게 여각이 외딴 섬에 있나 의아했는데.”


창밖에서는 여전히 우렁찬 물소리가 들렸다. 여라함이 쳐놓은 결계 덕분에 물줄기가 비익정만은 피해갔다.


“진유는 어디 가고, 진백성이 혼자 다니는가?”

“인간세에 있어. 미사의 힘이 아니면 못 깨어날 거야.”


율명 자신의 힘도 아니고 미사랑의 힘이라니. 여라함이 눈을 깜빡이며 율명을 바라보았다.

“진유가 무슨 일을 했든, 그건 율, 널 위해서였을 거야.”

“알아. 그래서 더는 곁에 둘 수 없었어.”


“아유라의 진짜 모습을 보았구나.”

순간 율명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여라함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리산의 맑은 물은 진한 흙탕물이 되어 포효하며 몰려갔다.


“괴로워하지 마라. 우린 신이 아니야. 모든 걸 알 수 없어.”

“하지만 나···, 내가 미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율명이 자신의 두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에서 바늘이 솟아나 모든 핏줄을 찌르는 것 같았다.


여라함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였다.

“지금부터 돌려놔야지.”

“어떻게? 아유라가 신력을 찾았으니 우리 힘으로는 무리야.”

“미사는 방법을 알고 있어.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한 거고.”


“그런··· 선택?”

율명이 눈빛으로 묻자 여라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할게.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 손으로 돌려야지.”


여라함은 웃으며 율명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삼신성이 되기 전 나누던 인사처럼 서로의 등을 다독였다.


율명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순수하고 맑은 눈빛으로 세상을 담던 어린 시절 그대로였다.


“그런데, 아랑누는 왜 찾았나?”

“사로잔을 보고 왔네. 겨루가 회강석도 건네줬더군. 용맹하고 강단 있는 모습은 미사와도 닮았지만, 영력이 전혀 없었어.”


“잘 봤어. 아랑누가 미사의 혼 조각 대부분을 갖고 있지.”

여라함이 향차를 맛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바로 잔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맛없는 차가 세상에 있다니.


“아직 의식이 없어. 하지만, 얼굴이라도 보고 싶겠지?”

“잠깐이면 돼. 네가 인간세에 있다면 난 바로 돌아가야지. 나마저 천선계를 비울 수 없으니까.”


“그럼, 난 도조를 보러 갈까. 그 녀석 아랑누를 돕다가 혼수상태야.”

“그 말썽꾸러기 도조 말인가?”

“지금은 완전히 신조가 되었다네. 완벽하게 변신도 가능하고. 무엇보다 아랑누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까.”

여라함이 싱긋 웃었다.


*


율명은 침대 옆에 앉아 물끄러미 낯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진백성단의 천사들을 통해 아랑누에 대한 소식은 듣고 있었다. 여라함이 얼마나 자주 인간세에 내려가는지도 알았다.


그러나 만나러 올 수는 없었다. 미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손이 떨렸다.

천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사람으로 태어난 그녀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율명은 아랑누의 손을 잡았다.

작고 차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녀의 오른쪽 손목에는 주홍빛 신령석이 달려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선대 진백성 주다가 소중히 간직하던 천계의 신령석이었다.


‘주다님, 알고 계셨군요.’

율명은 가슴이 먹먹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목에 달린 회강석 팔찌에서 붉은 빛이 반짝거렸다.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주다님을 잃은 것처럼 너희를 잃고 싶지 않아서. 미사, 난 삼신성이 온전히 하나가 될 거라 믿었어.”


율명은 고개를 숙이고 아랑누의 손에 이마를 갖다 댔다.

“어떻게 하면 너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회강석 팔찌의 붉은 빛이 아랑누의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붉은 기운이 그녀의 심장 가까이까지 다다랐다.


‘알고 있어. 율, 너도 날 아꼈다는 걸.’

미사랑의 목소리였다.


율명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미사랑의 영혼이 떠올랐다. 그가 기억하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널 미워한 적 없어. 단 한 번도. 여하의 모습이 일그러진 적 없잖아? 그건 너도 나를 아낀다는 증거야. 아유라를 사랑한 것처럼 나와 여하도 사랑한 거지.’


“미사, 그래도 난 날 용서할 수 없어.”

‘우리는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정귀는 이미 소멸했잖아? 그래도 돌아오지 않을 건가?”

‘아유라를 차원의 틈을 돌려보낼 거야. 그녀는 차원을 만드는 근원이야. 그녀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차원이 있을 거야.’


“넌, 정말 미사답구나. 아유라까지 위로하다니. 그래서 성물을 인간세로 보냈어?”

‘차원의 경계에서 온 존재이기에 천선계의 힘만으로는 돌려보낼 수 없어. 우리 차원은 인간세도 함께 있는 공간이니까.’


미사랑의 혼은 희미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아랑누의 숨에 따라 깊이가 달라졌다.


‘무기를 감당할 사람을 찾아야 했거든. 그들의 힘과 성물의 기운이 맞아야 하니까. 천계의 명령이 아니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타죽으니까.’


“넌? 너는 어떻게 되는데?”

‘때가 되면 돌아갈 거야. 지금은 아니지만. 아랑누는 아랑누로 살게 해야지. 얼마 걸리지 않아. 사람의 시간은 찰나니까.’


“도와줄게. 널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내 깊은 죄를 씻고 싶어.”

‘괜찮아, 율. 애쓰지 않아도 돼. 지금의 널 사랑하면 그걸로 충분해.’


미사랑의 혼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흔들거렸다.

그녀의 혼이 사라질까 율은 조바심이 났다. 조금만 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율, 나는 비로소 진짜 암흑성이 되는 거야. 사람으로서 겪은 고난과 갈등, 두려움과 번민이 날 진짜 암흑성으로 만들 거야.’


아랑누가 몸을 뒤척이자 미사랑의 혼도 사라졌다.

율명은 아쉬운 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


여라함이 들어왔을 때 율명은 이미 천계로 떠난 뒤였다.

‘어쩔 수 없는 진백성이군. 그 잠깐을 비워두지 못하다니.’


그는 세흔액이 담긴 대접을 탁자에 내려놓고 아랑누 옆에 앉았다.

아랑누는 깨어날 듯 눈꺼풀을 꿈틀거렸지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여라함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사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까?’


‘날 불렀어?’

바로 옆에서 장난기 가득한 소리가 들렸다. 여라함은 또다시 환영이 찾아온 것이 반가웠다.


“미사, 부녹에게 건넨 편지 받았어.”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도 너는 날 찾아낼 테니 널 믿고 한 일이기도 해.’


“사로잔도 너의 계획 중의 하나인가?”

그의 질문에 미사랑의 환영이 소리 높여 웃었다.


‘네가 한울을 지킨 이유와 같아. 나도 흉내 낸 거야.’

“알고 있었어?”

‘약속했잖아? 인간세에 살면서 사람들처럼 지내보자고. 내가 바라는 걸 너도 바라니까. 다시없을 소중한 시간이 될 거야.’


아지랑이처럼 떠다니는 환영이 아랑누의 머리 위로 흘러 다녔다.


‘한울의 혼이 환생할 때가 머지않았어. 날 위해 천명을 바쳤으니 천인으로 만들어야지. 파소연랑은 내 힘이 부족해서 대명천으로 갔지만, 한울은 지킬 수 있어.’


“아랑누로 지내니 어때? 사람의 몸도 견딜 만해?”

‘그럭저럭.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많이 배웠어.’


미사랑의 혼이 만들어낸 환영이 침대 끝에 앉아 여라함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상관없는 아기를 살리고, 키워주었지. 가진 것을 다 팔아 금화 한 닢을 남겨준 사람이 있었어. 그녀가 내게 알려줬어. 인간세에도 희망이 있다고.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우리가 인간세를 보는 데는 한계가 있어.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진실이야. 그런 건 사람의 눈으로 봐야만 보여.’

“그래도 사람이 요귀를 만들어내잖아. 그들을 키우고 그들에게 힘을 주고.”


‘그만큼 염원이 크고 강하다는 거야. 천사와 선사와 비교하면서 버텨내려니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감정일 거야.

사람은 주어진 시간이 짧으니 하루를 불꽃처럼 살아. 찰나를 살면서도 뜨겁게 사니까 그런 힘이 생기는 거야.’


“미사, 인간세에 궤네를 심었다던데?”

여라함은 선사 시나에게 들은 궤네의 접점을 기억했다.


‘천선계는 스스로 돌아가니 놔두면 되지만 인간세는 아니야. 궤네가 둘러싸도 의외의 방향으로 틀어져. 아이처럼 돌보지 않으면 사람 손에 자멸할 거야.

인간세로 궤네를 그냥 보내면 어딘가로 숨어버리겠지. 사람의 보살핌을 받아야 기운을 끌어낼 수 있어.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모습으로 보냈어.‘


“넌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여라함은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웃었다.


‘삼신성은 차원이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 태어나. 역대 삼신성 모두 다르게 태어났어.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살피면 돼.’

“미사, 이제 암흑성단으로 돌아오는 거지?”


‘조금만 기다려줘.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난 널 도울 수 없어. 할 수 있는 건 결계뿐이야.”

여라함은 쓸쓸하게 읊조렸다.


‘그거면 충분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약속해줘. 무슨 일이 있어도 결계에만 전념하겠다고. 너의 소명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그녀의 당부에 여라함은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여라함 자신은 못 하는 일이지만, 그에게는 한울이 있었다.

‘한울, 무슨 일이 생기면 부디 미사를 지켜다오.’


아랑누가 깨어나려고 신음을 뱉었다.

미사랑의 혼은 사라졌고, 여라함도 도사 틔움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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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4 0 13쪽
»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4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8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2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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