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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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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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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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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6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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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인간세의 전사들 1

DUMMY

월영국의 수도 엄안은 시나브로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요풍구 외곽에 위치한 대장군의 집에도 불이 하나씩 밝혀졌다.


혜부거는 무예 교본을 쓰느라 서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새벽까지 꼬박 앉아 글을 쓸 기세였다.


경운이 유우대륙까지 건너가 어렵게 구해온 약으로 기침도 가라앉고 오래 앓던 무릎 통증도 한결 나아졌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앉을 수 있게 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술에만 힘을 쏟으니 과연 좋은 일인지, 더 안 좋아진 건지 모호했다.


천동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나들이도 다니며 편안히 여생을 보내기를 바랐는데, 무예 교본을 쓴다고 서실의 책을 모조리 꺼내 다시 읽으며 날마다 밤을 새우니 걱정이 앞섰다.


가족들의 걱정은 아랑곳없이 혜부거는 흐릿한 눈에 힘을 주었다. 마음이 급했다.

‘이 책은 내 일생 마지막 사명이다. 죽기 전에 꼭 완수해야 해.’


그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쌍검을 바라보았다.


‘내 몫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이러다 때가 되어도 일어설 수 없게 될까 두려웠다.


혜부거가 쌍검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하인이 문을 두드렸다.

“대장군님, 손님이 오셨는데, 지금 드시라 할까요, 내일 아침에 드시라 할까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 모셔오너라.”

“예.”


하인이 돌아가고 혜부거는 손님을 맞기 위해 응접실로 나갔다. 서실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돌아앉으면 서가에 빼곡한 책이 잘 보였다.


손님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놀라 혜부거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일당백이 아닌가?’


나루뫼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루뫼입니다.”

“허허, 자네가 날 찾아오다니 놀랐네.”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요.”

“허허, 자네가 남 걱정을 하다니? 많이 변했구먼. 표정도 밝아지고.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군.”

“정신없었습니다. 사로잔과 얽히는 바람에···.”

“사로? 그 사로와 찬 말인가?”


혜부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과 엮인 일이라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인지 얘기 해주게. 사로와 찬이 얽힌 일이라면 너른벌 같지 않은 일이었겠구먼.”


나루뫼의 이야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가락국에서의 무성산 전투와 주련국에서 요귀를 물리친 일 등 그동안 겪은 일을 풀어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혜부거는 어린아이처럼 놀라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 사이 찻주전자에 있던 물은 다 마셨고, 접시 위에 얹은 과자도 부스러기만 남았다.


혜부거는 나루뫼의 옆에 놓인 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사람의 것이 아니야. 하늘의 성검, 그것도 빛의 기운이야.“


“그런데, 자네, 왜 날 찾아왔다고 했지?”

“사실은 제가 무술훈련소를 세우려 합니다. 대장군님께 병법서와 무예본을 빌리려고 왔습니다. 필사하고 돌려드리지요.”

“그거라면 말일세···.”


혜부거는 자신이 쓰고 있는 무예교본을 보여주었다.

“내 마지막 임무라네. 천간에게 바칠 것이지만, 완성되면 미리 자네에게 시간을 주지.”

“감사합니다.”

“그동안 계속 정리했지만, 막상 쓰려니 부족한 게 많아. 거의 새로 쓰는 기분이랄까.”


나루뫼는 실눈을 뜨고 대장군을 보았다.

“혹시 조수가 필요하십니까? 야트막한 지식이나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허허, 딱 맞춰 자네가 온 것이 내 복이군.”


혜부거는 하인을 불러 다과를 넉넉히 내오라고 했다. 새벽까지 할 일이 있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인이 문을 닫자마자 서실 안쪽 벽에서 쌍검이 날아와 혜부거의 양손에 자리 잡았다. 놀랄 사이도 없이 나루뫼의 검도 똑바로 일어섰다.


숨을 한 번 들이쉬는 순간 그들은 서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잿빛 연기로 가득 찬 대기를 뚫고 뜨거운 모래바람이 훅 지나갔다.


“기다리던 시간이군.”

혜부거가 중얼거리자 나루뫼도 기합을 넣었다.


*


엄안의 남쪽 구역이 거대한 축제장으로 바뀌었다. 하늘이 검푸르게 물들어가니 거리마다 가득한 꽃등에 하나씩 불이 켜졌다.


엄안의 삭가림제는 열세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의 청소년을 위한 축제였다. 겹보름에 비해서는 턱없이 작은 규모이지만, 의미는 남달랐다.

보름달이 삭을 가리며 흉흉한 기운을 막아주니 젊은이들이 밝은 기운을 받아 승승장구하라는 기원이 담겼다.


축제의 의미야 어떻든 그런 행사에 빠질 아만상단이 아니었다.

이루다는 경운의 손을 끌고 등불이 휘황찬란한 거리로 들어섰다. 이루다의 등에는 여전히 무시궁이 자리했다.


경운의 손에는 작은 주머니들이 옹기종기 들려있었다.

저잣거리에 예쁜 물건이 많으니 주고 싶은 사람도 많았다. 어머니와 이모, 저택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들부터 대장군님 것까지 주렁주렁 달렸다.


“운아, 방패는?”

“대장군님 빌려드렸어. 침실에 걸어놓으시라고.”

“어머니는 다 나았어?”

“응. 바느질도 하시고, 길쌈도 하셔. 우리 엄마는 자수 솜씨가 이거거든.”

경운이 엄지를 치켜들려 했지만, 선물 주머니를 들었기에 손가락을 뺄 수 없었다.


이루다는 경운을 끌고 가까운 떡집으로 들어갔다. 예쁜 떡만큼이나 곱게 차려입은 주인이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이루다구나, 마침 떡꼬치가 다 되었는데 먹어볼래?”

“고맙습니다. 이모님, 짐 좀 맡겨도 될까요? 불꽃놀이를 보려는데, 짐이 너무 많아서요.”

“그럼, 구경 다 하고 찾아가렴.”


주인은 떡꼬치 두 개를 내밀었다.

동글동글하게 빚은 쌀떡 사이 고기완자를 끼운 간식이었다. 달콤하고 짭조름한 양념에서는 향긋한 냄새까지 났다.

경운이 침을 꼴깍 삼켰다.


“가자, 불꽃놀이 보기에 제일 좋은 자리를 알고 있어.”

이루다는 경운의 손을 잡고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지붕을 살짝 밟고 그 옆의 아름드리나무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두 사람은 굵고 단단한 가지에 나란히 앉았다.


“우와, 여기선 시장이 다 보이네.”

경운은 떡을 오물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여기서 보면 정말 예뻐.”

이루다는 목에 걸린 보라색 조약돌을 매만졌다.


불꽃이 하나 피어오르더니 하늘에서 꽃잎처럼 터졌다. 이어 하나가 더 올라갔고, 다음에는 세 개의 불꽃이 한꺼번에 터졌다.


불꽃이 터지면서 무시궁이 함께 울었다.

“무시궁이 떨고 있어!”

이루다와 경운이 눈이 마주쳤다.


다섯 개의 불꽃이 한꺼번에 하늘을 수놓았지만, 아름드리 나뭇가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


유우대륙 불라국에도 선택받은 전사가 있었다.


운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원하게 소리를 질렀다. 대리천 유현에게 마난에서의 일을 설명하느라 긴장한 탓에 온몸이 노곤했다.


오랜 가뭄은 해결되었고, 앞으로도 가뭄으로 고통 받지 않으리라.

대리천은 다른 무엇보다 그의 다리가 완쾌된 것을 기뻐해 주었다.


운여는 마당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싫었다.


높이 뜬 구름을 배경으로 작은 구름이 거무스름하게 떠다녔다.

구름은 유리산이 되었다가 지팡이를 잡은 여인이 되었다. 유리산에서의 일이 아주 오래전처럼 아득했다.


’아이들은 고향에 잘 돌아갔겠지?‘

하월까지 자신을 태워준 아이들도 신기했다. 두 아이 모두 하늘의 성물을 갖고 있었다.


’히야, 그럼 우리가 삼인방이네요?‘

’무시궁과 방패에 단도라···. 곧 싸움이 시작될 테니 아저씨도 준비하세요.‘

경운과 이루다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싸움이라는데 그렇게 기쁠까? 아이들인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무기를 드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운여는 하늘을 보고 누운 채 매듭이 달린 노리개를 꺼냈다.

돌아오는 길에 하월의 매듭 가게에서 산 것이다.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니 구름이 뭉게뭉게 윤슬의 모습을 그려냈다.


마난의 비익정에서 아랑누에게 들은 말이 용기를 주었다.

’그게 왜 안 되는데요? 그분이 어떤 마음인지 모르잖아요? 만약 운여님과 같은 바람이라면요? 둘 다 불행해지잖아요?‘

’될지 안 될지는 부딪쳐봐야죠. 아니라면 깨끗이 단념할 수 있으니 좋고, 그분도 바란다면 함께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죠.‘


아랑누가 귀령송환사가 아니었다면 그저 지나가는 말로 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장님이 아니라 멀쩡했다면, 지금보다 건강했다면 오히려 반발했을 지도 모른다.


운여는 노리개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들숨 날숨을 따라 노리개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내일 아침에···.‘


청혼하겠다고 결심하니 마음이 설레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새워 뒤척이며, 선잠에 시달렸더니 정신이 몽롱했다.


창틈으로 햇살이 비쳐들었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눈꺼풀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맡에서 누군가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기의 옹알이처럼 작고 가는 소리였다. 아득하게 들리니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가 꾸물대며 일어나지 않자 소리가 점점 커졌다.

운여는 신경질을 내며 이불을 걷어찼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머리맡에 보석들이 반짝이며 자그락거렸다.


눈이 저절로 크게 뜨였다.

’이건 그 허리띠에 있던 성물?‘


보석을 손에 쥐니 아랑누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걸 어디서 받고 싶으세요?‘

’그럼 아침 일찍 이 아이들이 깨워주면 좋겠네요. 아! 청혼하러 가는 날 아침이라면 사뭇 낭만적이겠군요.‘


그때는 그저 황당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운여는 헛웃음이 나와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 웃었다.


몇 십 개나 되는 보석 중에서 윤슬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하나를 골랐다. 자신이 골랐다기보다는 보석이 쪼르르 굴러왔지만, 어쨌든 고심 끝에 고른 것이다.


청혼하기에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을 것이다. 매듭 노리개와 보석 상자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침대 옆에 놓은 단도 소연이 휙 소리를 내며 눈앞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운여는 손으로 단도를 잡는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


“아저씨, 뭐해요? 만세를 왜 불러요?”

경운의 목소리였다.


운여가 눈을 뜨니 그는 이미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얼음이었다. 온 세상이 빙판으로 둘러싸였고, 여기저기서 얼음판이 꿈틀댔다.


“온통 얼음이에요. 그런데 춥지는 않네요?”

“요귀의 공간이라 그럴 거야.”

이루다가 대답했다.


경운은 방패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루다는 무시궁을 들고 언제라도 활시위를 당길 준비를 끝냈다.

“대장군님이 말씀하시던 그때인가 봐. 보이지 않는 적과 여기가 아닌 공간.”


“아저씨, 제 뒤로 숨어요. 내가 지켜줄게요.”

경운이 방패를 들어 올리니 거대한 보호막이 그들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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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6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57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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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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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59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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