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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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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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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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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DUMMY

따사로운 햇살이 불라국 곳곳에 새봄의 기운을 던져놓았지만, 땅은 여전히 비쩍비쩍 말랐다.


때맞춰 비가 내려도 물은 스며들지 않고 사라졌다. 물이 고이지 않으니 저수지며 우물에는 항상 물이 모자랐다.

젖었나 싶다가도 이내 마르기에 백성의 인심도 덩달아 흉흉해졌다.


몇 년째 계속되는 가뭄은 불라국 대리천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가뭄이라니.

가뜩이나 주름이 많은 대리천 유현의 얼굴에 흰머리까지 쌓였다.


오후의 나른한 시각, 유현은 궁인들을 이끌고 남동정원에 들어섰다.

하늘은 맑고 선선했다. 그늘에는 차와 과일도 준비되었고, 바람도 딱 적당했다.


“부르셨습니까?”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사뿐한 걸음으로 젊은 여인이 다가왔다. 다음 대리천으로 선택된 정아 윤슬이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큰 눈과 작은 입 때문에 스물셋의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아 보여도, 대리천 유현에게는 든든한 조언자였다.


“너무 답답해서 말이다. 차나 한 잔 하자꾸나.”

“소문 때문에 괴로우시죠?”

“그토록 요란하니 안 들릴 리 있나. 가뭄이 하늘의 저주라니. 소문을 만드는 자들이 해결책도 퍼뜨리면 좋겠구나.”


“해결책도 떠돌던데요?”

윤슬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대리천님이 혼자 되신지 오래여서 국모님을 새로 모셔야 한다고요.”


유현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어, 내가 들은 얘기는 다르다. 혼기가 꽉 찬 정아를 내버려두어서 저주가 내렸다던데?”

“예? 저는 아직 어린데요?”


“그러니까 제대로 된 해결책이 필요하지. 쓸데없는 헛소리 말고.”

유현은 윤슬을 둘러싼 다른 소문은 입에 담지 않았다.


‘새로운 대리천으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정아 윤슬이 대리천으로서의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응당 자격이 있는 아이를 정아로 삼아야 한다.’


궁에서도 이런 말이 떠돌았다.

당사자인 윤슬도 들었겠지만,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유현은 과자 접시를 윤슬 앞으로 밀어주었다. 윤슬은 빈 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데, 정말 혼인은 안 할 거냐?”

“아직 배울 것이 많아요. 대리천으로서 자격을 갖추면 생각하겠습니다.”

“혼인을 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지. 허나, 마음에 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유현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대대로 대리천을 보좌하는 중역 가문이 있지 않으냐. 앞날에 도움이 될 거다. 그들 중에서 널 사로잡은 젊은이가 없지는 않을 텐데···.”


윤슬은 그의 눈길을 피해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유현은 정원 너머 정갈하게 지어진 함은전을 올려다보았다. 대대로 대리천이 정무를 보는 함은전의 하얀 벽이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이 지독한 가뭄을 어떻게 할지 난감하구나. 비가 안 오는 것도 아닌데, 그 물이 죄다 어디로 갔느냐 말이다.”


윤슬도 그의 시선을 따라 지붕 위 깃털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세를 바로잡고 유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유리산을 둘러보겠습니다. 협곡은 넓어지고, 유리산은 높아지는 것이 수상합니다. 무언가 비밀이 있을 겁니다.”


“네가 유리산에 간다고?”

유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긴 여태까지 아무도 오르지 못했어. 특히 넌 안 된다. 잊은 건 아니지?”

그는 탁자에 팔을 얹고 비스듬히 돌려 앉았다.


“너를 잃고 싶지 않구나. 어디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조심해야지.”

유현이 한숨을 내쉬고 차를 한 잔 더 따랐다.


윤슬도 고개를 숙이고 오른쪽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소맷자락 안으로 길게 드리워진 화상 자국이 나 있었다.


*


그녀가 열일곱 살 되던 해였다.


불라국 동쪽 화륜산에 화산이 터지면서 많은 사람이 집과 터전을 잃었다. 윤슬은 정아로서 그들을 위로하고, 상황을 살피기 위해 화륜산 인근까지 직접 달려갔다.


윤슬이 직접 가야 한다고 요청하는 무리가 있어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정통성 있는 후계자를 정아로 세우는 것.


그들은 역대 대리천과 중역 가문의 인연으로 맺어진 진정한 후계자를 정아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정아는 대리천 유현의 먼 친척뻘이었다. 태어날 때 불사조 겨루가 지켜줬다는 이유로 정아가 되었으니 불만이 많았다.


그들의 계략은 성공한 듯 보였다.

화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로잡힌 윤슬은 움막에 갇혀 이틀 밤낮을 버텼다.


약 기운 때문에 깨어나서도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발과 손을 묶여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목마름을 달랬다. 오로지 한 사람을 생각하며 견뎠다.

‘그를 다시 만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어.’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짚풀 타는 냄새가 났다.

한쪽 기둥에서 시작된 불길이 순식간에 벽을 집어삼켰다. 마른 풀에 불이 붙어 여기저기로 흩날렸다.


움막 안은 이내 연기로 가득 찼다. 문을 향해 기어가다가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지막까지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까무룩 정신을 잃기 전, 누군가 움막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윤슬!”


그는 절규하며 윤슬을 끌어안았다.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자신이 상처 입은 것도 깨닫지 못했다.


온몸으로 윤슬을 감싸 안았다. 힘겹게 윤슬을 안고 일어났다.

문 앞까지 다가갔을 때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쓰러진 나무 기둥이 다리를 짓눌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문밖까지 걸어 나왔다.


천궁 수비대가 그들을 끌어냈다. 그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그녀를 안고 놓지 않았다.


*


대리천 유현은 고개 숙인 윤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윤슬이 고개를 들었다.

“유리산에는 사람을 보내겠다. 네 뜻이 그렇다면 확인해봐야지.”


유현은 친손녀 같은 정아 윤슬에게 다가가 앉았다.

“난 네가 정아라서 자랑스럽다. 쉽지 않을 테지만, 용기를 잃지 마라.”


그녀의 손등을 다독이고 일어섰다.

윤슬도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


불라국 수도 솔담에 위치한 대리천의 천궁은 다른 나라의 궁궐과는 많이 달랐다.

상재믈국의 성황이나 주련국의 국두가 사는 궁궐은 거대하고 화려하지만, 대리천의 천궁은 소박하고 정갈했다.


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수십 채의 궁전은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사람을 숙연하게 하는 기운이 서렸다. 사원과 같은 엄숙함과 경건함도 함께 있었다.


천궁에서도 가장 동쪽에 정아 윤슬이 머무는 영신재가 있었다.

궁녀의 안내를 받으며 젊은 남자가 영신재로 들어섰다.


기린족 남자는 흰머리에 검은 머리가 반쯤 섞여 화산재 같은 진회색으로 보였다. 천궁 수비대원 만큼이나 크고 건장한 몸집이었다.

구릿빛 피부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돋보이지만, 왼쪽 다리가 불편한지 걸을 때마다 심하게 절뚝거렸다.


윤슬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운여! 오랜만이야.”


운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두 손을 맞잡았다.

“정아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부르지 않으면 영영 안 올 거였어?”

윤슬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의자를 내주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이번에 운여가 유리산에 가지? 부탁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유리산에 비와 바람을 부리는 책이 있다고 했잖아? 모든 병을 고치는 의서도 있고. 그걸 찾아줘. 그 비결만 알면 우리 백성들이 가뭄과 홍수를 겪지 않아도 되잖아?”

“정아님이 원하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운여가 예의 바르게 대답하자 윤슬은 고개를 돌렸다.

“운여는 바뀌지 않는구나. 벌써 오 년이나 지났는데···.”


어느새 한 손으로 오른쪽 소매를 쓰다듬었다.

‘나 때문에 다리를 못 쓰게 되었으니 원망하는 것도 당연해. 그것 때문에 루월상단 소단주 자리에서도 물러났으니.’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난··· 운여를···.’

윤슬은 입술을 꼭 깨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운여는 재빨리 눈길을 피했다.


“내가 가겠다고 했는데, 허락하지 않으셔. 함께 가면 좋을 텐데. 마난까지 가려면 하월을 거쳐서 가겠구나?”

“예. 유리산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입니다.”


“하월이면···.”

윤슬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곧 참나로 의식이 열리겠네. 기억나? 거기서 우리가 같은 매듭을 잡았잖아.”

그녀가 바라보자 운여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면 같이 참나로 의식을 치르자고 약속했는데, 그건 못했지.”

윤슬이 왼쪽 소매를 살짝 걷었다.


손목에는 붉은색, 황금색, 흰색의 세 가지 실을 엮어 만든 매듭 팔찌가 묶여있었다.

“이것 봐. 그때 함께 만든 팔찌, 그대로 있어.”


그것을 보자 운여의 가슴도 따끔거렸다. 그녀의 손목에는 그것 말고도 은실에 매달린 홍요석 팔찌도 함께 있었다.


그것은 윤슬이 열 살, 그가 열한 살 때 루월상단 단주가 준 선물이었다.

‘너희들은 인연이 깊으니 하나씩 갖고 있어라. 이 모양, 이 색깔의 홍요석은 세상에 단 두 개뿐이란다.’


운여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바로 앉았다.

“정아님, 정아의 신분에 어울리는 장신구를 하셔야지요. 장차 대리천이 되실 분이 지나간 추억에 머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운여는 버렸어? 매듭도, 추억도?”

윤슬의 애원 섞인 질문에 운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왼쪽 발을 디딜 때마다 잘리는 듯 아파서 탁자를 잡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물러가겠습니다. 말씀하신 책은 성심을 다해 찾겠습니다.”

운여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무뚝뚝하게 돌아섰다.


걸음마다 절룩이면서도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닫을 때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윤슬은 매듭을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적셨다.

“운여,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윤슬은 고개를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나와 혼인하겠다고 했잖아? 내가 정아든 돼지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나도 네가 루월의 행상이든, 절름발이든 상관없어.’


열 살 때 처음 만나 열다섯 때까지 함께 공부하고, 수련한 그였다. 같이 지내는 동안 그는 항상 그녀를 먼저 챙겨주었다.

그런 그가 저렇게 바뀌다니.


열여섯이 되어 그녀가 궁으로 돌아오면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 다시 만난 것이 오 년 전, 불타는 움막에서였다.

그 사고로 다리를 다쳐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윤슬은 붉어진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잘 다녀와, 운여. 기다릴게.”


그녀는 손목의 매듭 팔찌를 쓰다듬었다.

‘삼신성께서 운여를 지켜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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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7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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