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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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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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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누_유리산

DUMMY

하얀 유리산이 빛을 받아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멀리서는 눈에 덮인 듯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빛이 반사되어 눈을 뜰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얇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누구나 아랑누와 비슷한 눈가리개를 하고 있어서 누가 장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보다 일찍 떠난 사냥꾼들 몇 명이 녹초가 되어 널브러졌다. 포기하고 떠난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이미 목숨을 잃은 이도 있었다.


아랑누는 피를 흘리고 쓰러진 이들을 살펴보았다. 망령이 남지 않아 자세히 들을 수 없지만, 화살에 맞은 상처였다.

그들 주위 어디에도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아랑누는 유리산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이런 짓을···!’


사냥꾼들은 매끄러운 유리산 표면을 오르기 위해 장비를 준비해왔다. 밑창에 못을 붙인 신발이나 장갑은 기본이었다. 뾰족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져왔다.


한 사람이 밧줄에 갈고리를 매달아 던졌다. 여러 번 시도한 듯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그가 키 높이의 세 배 정도 올라가니 사람들이 환호를 질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유리산 곳곳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누가 활을 쏜 것이 아니라 매끈한 유리산 표면에서 불쑥 화살이 튀어나왔다.


그는 벽에 바짝 붙어 간신히 피했지만, 주르륵 미끄러졌다. 뒤 따라 올라가던 사람들이 화살에 맞아 비틀거렸다.


사냥꾼들의 신음에 아랑누도 주춤 뒤로 물러섰다. 요귀와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신성한 산이라고 들었는데, 벌써 요귀가 손을 쓴 거야?”

“여태까지 아무도 올라간 사람이 없다더니 저래서였군. 아누, 아무래도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온설지가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누님, 그런데, 화살이 가루가 되는데요?”

이연의 화살이 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땅에 떨어진 것이나 사람의 몸에 맞은 것이나 가루가 되어 땅으로 스며들었다.


운여도 한숨을 내쉬었다. 루월상단에서 준비한 것도 사냥꾼의 도구와 비슷한 것뿐이었다.

‘구태여 같은 시도를 할 필요는 없겠군.’


그는 유리산을 올려다보았다. 산이 높아 아래에서는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저 안에 비밀의 책이 있을 텐데···.’

비밀의 책을 가져다달라는 윤슬의 얼굴이 맑은 유리산에 비쳐졌다.


사냥꾼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이를 갈았다.

주섬주섬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며칠 동안 계속 도전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여기는 포기하겠어. 난 다른 보물을 찾으러 갈 거야.”

“닷새나 도전했으면 충분하지. 쳇, 이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어수선한 분위기를 타고 어디선가 검은 까마귀가 휙 날아왔다.


“아랑누님! 여기 계셨군요! 벌써 끝내신 건가요?”

“까망이구나. 아직 올라서지도 못했어.”

“캬캬캬, 그럼 아직 구경거리가 남았군요. 그런데 왜 안 가시나요?”


도조가 아랑누의 흰 지팡이 위에 내려앉았다.

“참나로 의식은 잘 끝났습니다. 정말 흥겹더군요. 거기서 누굴 봤는지 아십니까? 틔움 도사님이라고 기억하···.”


도조의 말에 귀 기울이려는데 쨍하고 머리를 꿰뚫는 신호가 다가왔다.

그 강렬한 신호를 아랑누만이 아니라 온설지와 이연도 느꼈다.


“아누, 이거 뭐지? 요귀의 신호인가?”

온설지가 놀라 아랑누를 보았다.

“날 부르고 있어. 저 위로 가야 해.”


아랑누는 바람을 불렀다. 지나가는 바람을 잡아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 바람을 타려고 했지만, 이내 산들바람으로 흩어지더니 바람 한 점 남지 않았다.


다시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는 술법이 안 통해. 무언가가 막고 있어. 결계인가? 이건 아주 강해.”


“그렇다면 내가 해 볼게. 백호의 기운은 통할지 몰라.”

온설지가 몸을 웅크렸다가 팔을 쭉 뻗었다. 그와 동시에 흰 호랑이로 변해 유리산을 뛰어올랐다.


거대한 호랑이는 유리산과 하나인 보였다. 하얀 눈송이가 사뿐히 나는 것처럼 보였다.

짐을 싸던 사람들이 탄성을 쏟아냈다. 그들은 기적과 같이 나타난 신묘한 동물을 지켜보았다.


운여는 갑작스러운 변신에 잠깐 생각이 멈추었다.

“백호족인 건 알았지만, 진짜 호랑이로 변신한다고?”

그러나 그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중턱까지 올라간 호랑이가 갑자기 사라졌다. 유리산이 삼킨 것처럼 어느 순간 종적을 감추었다.


기대에 차서 바라보던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탄식했다.

“에이, 어디서 신물이 나타났나 싶더니만.”

“어서 가세. 빨리 다른 보물을 찾아야지.”


사냥꾼들은 간신히 짐만 챙겨들고 일어섰다.

준비해 온 갈고리나 신발은 버려두었다. 다른 보물을 찾는 데는 필요 없거니와, 무거워서 가져갈 수도 없었다.


아랑누도 온설지의 기운을 살펴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산 자보다 강한 죽음의 기운 역시 느껴지지 않았다.


도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랑누에게 다가갔다.

“제가 나설 차례인가요? 아랑누님, 타시죠!”

머리를 바짝 세우고 껄껄 웃었다.


운여는 바짝 긴장하고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말하는 까마귀도 처음이었다. 어디서 갑자기 까마귀가 나타나더니 말을 하고 사람을 태운다고 하니 생각이 멈춘 데 이어 몸도 굳었다.

‘이번에는 뭘 하려고?’


도조의 몸집이 부풀어 올랐다. 날개를 쫙 펴니 돛을 펼친 듯 크고 넓어졌다.

검은 깃털은 검붉은 빛으로 바뀌었고, 눈동자도 더 크고 날카로워졌다.


검붉은 신조는 아랑누를 타고 유리산 꼭대기까지 날아올랐다.


*


운여는 멍하니 서서 입도 다물지 못했다.

전설이나 괴담에서 요귀의 소문은 읽었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였다.

사람이 호랑이로 변하고, 까마귀가 거대한 신조로 바뀌다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운여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이연이 운여의 팔을 잡아끌었다.


“분명 다른 통로가 있을 거예요. 보세요! 저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어요.”

이연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다닐만한 좁은 길이 보였다.


사냥꾼들은 모두 돌아갔다. 상처가 깊어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서로 의지하며 비익정으로 향했다. 제대로 치료받으려면 거기서도 오래 머물 수는 없을 것이다.


운여는 이미 자신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잊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지금을 놓칠 수 없어. 일단 가보는 거야!’


그는 절룩이는 다리로 이연을 따라갔다. 다섯 명의 수행원도 그의 뒤를 따랐다.


*


산모퉁이를 돌자마자, 어디선가 신음이 들렸다.

온설지가 길 위에 서 피를 토하며 쓰러져있었다. 흙바닥이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형님!”

이연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머리를 안아 올리고 눈꺼풀을 열었다.

“형님! 정신 차려요!”


온설지가 켁켁 기침을 토하며 간신히 눈을 떴다.

“꼬마, 천국까지 따라온 거냐.”

“형님! 지금 농담이 나와요!”

“됐다. 됐어. 난 괜찮아.”


“어찌된 일입니까? 호랑이가 갑자기 사라지던데.”

“하아···. 호설의 힘을 담기에 내 그릇이 너무 작은가 보군요.”


온설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천천히 숨을 삼키고 내뱉었다.

‘아니면 호설로 변신한 게 마음에 안 들었나···.’


“형님, 까망이가 누님을 태우고 올라갔어요. 형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저희가 다른 통로를 찾아볼게요.”


온설지는 순간적인 통증에 몸을 웅크렸다.

“아우, 배야. 알았어.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뭔가 있을 거야. 언뜻 입구를 본 것 같거든.”


운여가 그를 위해 수행원 둘을 남겨주었다.

거구의 백호족을 비익정까지 부축하려면 한 사람으로는 부족했다.


이연은 온설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부리나케 오솔길을 따라 반달음으로 걸었다.

두 명의 수행원은 이연의 속도를 따라갔고, 한 명은 운여 곁에서 천천히 걸었다.


운여는 불편한 다리로 쫓아가느라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


도조와 아랑누가 유리산 꼭대기에 거의 다가갈 때였다.


화살이 산의 표면을 뚫고 튀어나와 비처럼 쏟아졌다. 보물 사냥꾼에게 쏟아지던 그 화살비였다.


도조는 화살을 피해 이리저리 날개를 움직였다. 아랑누는 떨어지지 않으려 깃털을 꽉 붙잡았다.


첫 번째로 쏟아진 화살은 그들을 스쳐 갔다. 떨어지며 모래가 되더니 땅에서는 먼지처럼 풀풀 내려앉았다.

그러나 두 번째로 튀어나온 세 개의 화살은 떨어지지 않고 도조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도조가 날개를 기울여 크게 돌며 날아도, 아래위로 높낮이를 바꾸어도 화살은 도조의 흔적을 따라 움직였다.


“아랑누님, 안 되겠어요. 저것은 피할 수 없어요. 여기서 뛰어내리세요.”

도조는 최대한 꼭대기에 가깝게 다가갔다. 둥근 눈이 반짝 빛났다.

“지금요!”


아랑누는 꼭대기의 평평한 바닥을 향해 몸을 던졌다.

바람을 부르는 주술을 외웠지만, 속절없이 벼랑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미끄러지면서 지팡이 끝으로 절벽 한 곳을 찍었다.

지팡이가 유리산에 박힌 채 주르륵 미끄러졌지만, 떨어지는 속도는 확연히 느려졌다. 숨을 가다듬고 바람의 주술을 다시 불렀다.


유리산의 결계 때문에 겨우 실바람이 생겨났지만, 더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버텨주었다.

실바람을 받치고 서서 중심을 잡았다.


지팡이를 빼내 조금 더 위쪽으로 박았다. 지팡이가 몸을 비틀더니 아랑누를 이끌고 벼랑 끝에 가서 박혔다.


순간, 실바람마저 훅 사라지고 그녀는 지팡이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빨을 앙다물었다. 바위에 발을 디디고 손과 팔에 힘을 주었다.


지팡이 한쪽이 아래위로 출렁거리더니 그녀를 튕겨 올렸다.

아랑누는 사뿐히 날아올라 바닥에 내려섰다. 그녀가 손을 뻗자 지팡이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손으로 날아왔다.


산 아래에서 꽤애액 비명이 들렸다. 도조의 목소리였다.

화살 두 개가 옆구리에 박혔다. 까마귀는 피를 흘리며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도조!”

아랑누가 소리쳤다.

“도조!”

하얀 유리 벼랑 위에 그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제는 도조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내려갈 방법이 없었다. 뛰어내리는 방법밖에는.


아랑누는 지팡이를 꽉 잡고 일어섰다.

도조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임무를 끝내야 했다.


*


유리산 꼭대기는 평평한 벌판이었다.

잘 다듬은 바닥 한가운데 커다란 둥지가 있었다. 보통의 알둥지가 아니라 둥근 알 모양의 성이었다.


보석을 깎아 다듬은 듯 햇빛을 받으면 표면이 오묘하게 다른 색으로 빛났다. 빛이 지나가는 각도에 따라 태양처럼 빛났다.


아랑누는 아름다운 유리성을 바라보다가 낯익은 기운을 느꼈다.


‘호설?’

분명 호설의 기운이었다.

‘온형이 여기로 들어왔나? 아니, 온형의 기운은 전혀 없어. 이건 분명 호설인데···.’


“호설! 호설! 여기 있어?”

아랑누는 반가운 마음에 뛰다시피 유리 둥지로 다가갔다.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듯 잿빛 형상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는 여기 없다. 네가 아랑누로 있는 동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다.”

굵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거대한 새였다. 아랑누는 목을 뒤로 젖혀 새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짙고 깨끗한 눈동자, 빛나는 깃털, 어마어마한 크기. 어딘지 위엄 있고 엄숙한 자태,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


“시조새? 꿈에서 날 찾아왔던 시조새인가요?”

“그것은 사람이 부르는 이름이다.”


“당신도 미사랑을 기다렸나요?”

“누구를 기다리든 상관없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너니까.”

시조새가 날개를 퍼덕이자 뿌연 안개가 아랑누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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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3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4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49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7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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